김홍진 브리티시텔레콤코리아 사장
브리티시텔레콤(BT)은 ‘유연 근무제’로 기업 체질을 바꾼 대표적인 성공 사례다. BT는 2000년대 초반 글로벌 사업 실패로 파산 직전의 위기에 몰리자 생존을 위한 변신을 시도했다.유선전화와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하는 전통적 통신사에서 기업 고객에 초점을 맞춘 네트워크 정보기술(IT) 서비스 기업으로 전환했다.
이를 위해 일하는 방식도 과감하게 뜯어고쳤다. 모든 직원이 정해진 사무실에 오전 9시에 출근해 오후 6시에 퇴근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일부는 집에서 근무하거나 사무실에도 정해진 시간에만 나오는 방식을 적극 도입했다.
성과는 놀라웠다. BT는 연간 1000억 원의 부동산 비용과 연료 비용을 절감했고 생산성과 종업원 만족도는 극적으로 개선됐다.
이러한 BT의 모델은 녹색 성장이라는 화두와 맞물려 최근 국내에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BT는 ‘유연 근무제’대신 ‘민첩 근무제(Agile Working)’라는 용어를 쓴다. 김홍진(57) BT코리아 사장은 “유연 근무는 교통 혼잡에서부터 탄소 배출, 부동산, 출산율, 기업 생산성까지 한국이 안고 있는 많은 문제들을 풀 수 있는 확실한 대안”이라며 “유연 근무제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사고와 조직의 유연성이 먼저 갖춰져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4월 19일 서울 여의도 사무실에서 김 사장을 만났다.
‘민첩 근무제’라는 용어를 쓰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현재 10만5000명에 달하는 BT 근무자 가운데 절반 이상이 다양한 형태의 유연 근무 제도를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중 1만5000여 명은 아예 회사에 나오지 않고 집에서 일하지요. BT는 유연 근무를 하나의 기업 문화로 강조합니다. 이를 민첩 근무제라고 부르는 것은 이런 활동들이 궁극적으로는 고객들이 원하는 서비스를 보다 민첩하게 제공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에요. 직원들이 편하기 위해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죠.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십시오.
아시아 지역에서 근무하는 컨설턴트들은 싱가포르에 살 것인가, 말레이시아에 살 것인가 스스로 선택합니다. 컨설턴트의 본래 임무는 고객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 아닙니까. 고객에게 좋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면 지구상에 어디에 살든 문제되지 않는 거죠.
장소 개념이 과거와 완전히 달라졌어요. 고객 서비스에 꼭 필요한 컨설턴트인데, 그가 이를테면 반드시 싱가포르에 거주해야 하는 것이 싫어 오지 않는다면 그건 옳지 않아요. 핵심은 바로 고객인 거죠.
유연 근무제의 효과는 무엇입니까.
유연 근무로 BT는 연간 1조 원의 사무실 임차료를 절감하고 있습니다. 직원들의 출퇴근에 드는 비용과 시간도 마찬가집니다. 생산성도 분야별로 15~30%가량 올라갔어요. 예전에는 몸이 아프면 무조건 결근해야 했지만, 이제는 몸이 조금 아파도 집에서 일할 수 있지요.
남성 직원의 37%, 여성 직원의 34%는 급여를 인상하지 않아도 좋으니 유연 근무를 하고 싶다고 응답했어요. 직원 만족도가 높아지면 고객 만족도도 자연히 올라갑니다. 유능한 인재들도 몰려들지요.
국내에서도 관심이 커지고 있습니다.
유연 근무는 한국 사회의 핵심 현안들과 모두 연관돼 있습니다. 우선 탄소 배출을 어떻게 줄일 것이냐는 문제가 있지요. 또한 부동산 문제도 심각합니다. 기업들이 언제까지 그 부담을 지고 가야 할지 걱정이에요.
서울 시내의 교통 혼잡과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도 빼놓을 수 없어요. 유연 근무는 이런 복잡한 문제들을 푸는 확실한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작은 노력으로 한국의 국가 경쟁력을 크게 끌어올릴 수 있는 좋은 기회지요.
문제점은 없습니까.
유연 근무의 필요성은 공감하지만 구체적인 방법론에 대한 고민은 부족한 것 같아요. 유연 근무제를 도입하는 것은 일하는 방식을 바꾸는 상당히 방대한 프로젝트입니다. 한국 사회를 어떻게 바꾸겠다는 마스터플랜을 먼저 세우고 이를 사회적 화두로 삼아 강력하게 추진해야만 성공할 수 있어요. 지금처럼 정부 부처 중심으로 소규모로 하는 것은 생색내기밖에 되지 않아요. 수만 명 조직에서 100~200명을 별동대식으로 운영해서는 추진력을 갖기 어려워요.
유연 근무제가 성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근무시간만 유연하게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사고의 유연성과 조직의 유연성이죠. 유연 근무제를 하려면 지금의 회사 체제도 달라져야 해요.
인사 평가와 보수 책정의 기준부터 바뀌어야 합니다. 철저하게 업무 기준으로 해야죠. 회사가 재택근무자를 어떻게 지원하고 근무 상황을 검증할지도 생각해 봐야 해요.
유연 근무 환경에 맞는 내부 커뮤니케이션 채널도 필요합니다. 또 하나는 운영 능력이에요. 한국은 ‘대면 문화’를 중시하죠. 얼굴을 보지 못하면 좀처럼 신뢰하지 않아요. 눈앞에 있어야 안심하는 거죠. 이런 상황에서는 유연 근무제가 제대로 뿌리 내리기 어렵습니다. 유연 근무제를 이끌어 갈 수 있는 ‘매니지먼트 스킬’이 필요해요. 바꿀게 하나둘이 아니죠. 제대로 하려면 최소 3년 이상은 필요해요.
BT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습니까.
BT는 ‘베스트 프랙티스’를 먼저 스스로 만들어 놓고, 이를 활용해 남을 도와주는 일을 합니다. BT의 독특한 비즈니스 모델이죠. BT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에 가장 앞서 있는 기업으로 인정받고 있어요. BT는 자신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다른 기업의 CSR 전략을 컨설팅해 주고 있지요. ‘민첩 근무제’도 마찬가집니다. BT는 많은 경험과 노하우를 갖고 있습니다.
올해 글로벌 IT 업계 흐름을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기업들이 시설 투자(CAPEX) 모델에서 운영비용(OPEX) 모델로 전향하면서 클라우드 컴퓨팅이나 서비스의 가상화가 큰 인기를 끌 것으로 예상됩니다. 또한 기업들이 핵심 사업 분야에 해당하지 않는 사내 네트워크나 IT 관련 수요를 자체적으로 해결하기보다 네트워크 IT 전문 업체들에 맡기는 추세가 강해져 아웃소싱과 전문 관리 서비스의 수요도 크게 증가할 것으로 봐요.
컨버전스(융합)는 고정 공간과 이동 공간의 경계를 허무는 주요 트렌드로 계속 자리를 지킬 거예요. 소셜 네트워킹 툴들을 사업에 적용하는 기업들이 많아지면서 그에 대한 인기도 높아질 것으로 기대됩니다.
BT는 글로벌 시장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고 있습니다. 국내 IT 기업들이 어떤 점을 배워야 한다고 보십니까.
BT의 탄력적인 오픈 네트워크 플랫폼 ‘21CN(21Centry Network)’이 세계 각국 시장에 새로운 서비스들을 빠르게 내놓을 수 있도록 해주는 기반이 되고 있습니다. 이 글로벌 인프라는 뉴욕·런던·모스크바·서울 등 세계 각지의 고객들에게 동일한 품질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해줘요.
또한 BT는 현지 최고 업체들과 제휴하는 방식으로 각 지역의 고객들이 신뢰하는 현지 기업을 통해 모국어로 세계 수준의 서비스를 제공하며 각 시장들의 강점을 결합해 내고 있습니다.
김홍진 사장은…
약력 :1953년 서울 출생. 1976년 서울대 사범대 졸업. 1982년 한국컴퓨터 근무. 1986년 KCC정보통신 근무. 1992년 스트라투스컴퓨터 코리아 대표. 1998년 어센드커뮤니케이션즈 한국지사장. 1999년 한국루슨트테크놀로지 신규사업담당 부사장. 2001년 플라리온테크놀로지 아시아태평양본부 부사장. 2004년 식스윈드 아시아 담당 부사장. 2008년 BT코리아 사장(현).
장승규 기자 skjang@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