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위 ‘경제검찰 옛말’…아! 옛날이여

경제부처 24시

“‘경제검찰’이라고요? 기업·시민단체·정치권 할 것 없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데 무슨 경제검찰입니까?”

SK에너지·GS칼텍스 등 가격 담합 혐의로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과징금을 부과 받은 액화석유가스(LPG) 업체들이 얼마 전 법원에 행정소송을 제기하겠다고 하자 한 공정위 간부가 늘어놓은 푸념이다. 공정위가 제재를 내려도 수긍하고 받아들이는 기업이 거의 없는데 공정위가 마치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것처럼 알려져 있어 억울하다는 얘기였다.

공정위가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공정위는 지난해 12월 6개 LPG 업체에 대해 가격 담합 혐의로 6689억 원이라는 사상 최대의 과징금을 부과했고 올 들어서는 소주 가격 담합에 대해 시정명령과 함께 272억 원의 과징금을 매겼다.

12일 오후 서울 서초동 공정거래위원회에서 6개 액화석유가스(LPG) 공급회사들의 담합 혐의와 관련한 전원회의에서 정호열 위원장이 의사 진행을 하고있다. /강은구기자 egkang@hankyung.com 2009.11.12
그러나 공정위 직원들이 전하는 실상은 다르다. 공정위는 담합과 카르텔 등에 대한 조사 권한을 갖고 있지만 강제력을 행사할 수는 없다. 조사 대상 기업이 버티면 계획대로 조사를 진행하기 어렵다.

조사에 들어가도 공정위의 동향을 미리 파악한 기업들이 관련 자료를 폐기하거나 e메일 등을 지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는 일도 다반사다. 국세청처럼 기업의 자금 흐름을 낱낱이 들여다볼 수도 없고 금융감독원처럼 감독과 검사를 벌여 문제가 있는 임직원에 대해 징계를 명할 수 있는 권한도 없다.

과징금 부과에 대해 기업들이 행정소송을 내는 일은 거의 관행이 돼 버렸다. 소송에서 이기면 과징금 부과가 취소되고 일부승소만 하더라도 과징금을 줄일 수 있으니 기업으로서는 소송을 걸지 않을 이유가 없다.

기업들 반발, 정치권 압력 ‘속병’

기업들은 공정위의 과도한 규제로 경영 활동이 위축된다고 항변하지만 반대로 진보 성향의 시민 단체들은 공정위가 기업들을 너무 봐준다고 비판한다.

LPG 업체들에 사상 최대 규모의 과징금을 매겼을 때도 시민 단체들은 ‘과징금이 너무 적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사건 초기에는 1조 원이 넘는 과징금을 부과할 것으로 예상됐는데 최종적으로는 과징금 액수가 대폭 줄었다는 것이다.

공정위가 정치권에 휘둘리는 일도 많다. 공정거래법 개정안 처리 과정이 대표적인 사례다. 일반 지주회사도 금융자회사를 보유할 수 있도록 하는 등 기존의 규제를 완화하는 안이 포함된 공정거래법 개정안은 2년여 전 입법 예고됐지만 아직까지 국회를 통과하지 못하고 표류하고 있다.

지주회사제도는 기업의 지배구조를 투명하게 하자는 취지에서 도입됐었다. 하지만 대기업들이 지주회사로 전환하려면 기존에 갖고 있던 증권사나 보험사 등 금융사를 팔아야 해 기업들의 부담이 컸다. 공정위는 이를 완화하는 방향의 개정안을 냈지만 금산 분리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야당의 반대로 법안이 두 차례나 수정됐다.

논란 끝에 4월 임시국회에서 소관 상임위인 정무위원회를 통과했지만 법사위에서 다시 벽에 부딪쳤다. 민주당 박영선 의원은 정무위에서 여야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고 개정안이 일부 대기업에 특혜를 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며 법안을 법사위 법안심사 소위로 내려보냈다.

지난 3월 26일 열렸어야 할 법사위 소위마저 ‘스폰서 검사’를 둘러싼 여야 간 충돌로 취소되면서 공정거래법 개정안 처리는 다시 다음 국회로 미뤄졌다.

공정위의 정치적 독립성이 훼손되는 일도 일어난다. 소속 상임위 의원들이 특정 기업의 인수·합병(M&A)을 문제 삼으면서 조사가 필요한 것 아니냐는 발언을 하면 공정위는 만사를 제쳐두고 그 일에 매달려야 한다.

어쩌면 칭찬보다 비판을 받는 것이 공정위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소비자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서는 기업의 가격 담합 행위를 제재해야 하지만 당하는 기업 입장에서는 억울한 면이 없을 수가 없다.

각계각층의 비판을 의식한 듯 공정위도 다방면에서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정호열 공정거래위원장은 “규제 기관이기보다 시장 경쟁을 촉진하는 시장경제의 파수꾼이 되겠다”고 다짐했고 이를 위한 다양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소비자 후생을 높이기 위해 각종 진입 장벽도 낮춘다는 방침이다.

공정위 관계자는 “경제검찰이라기보다 시장경제의 파수꾼으로서 독립성을 갖고 시장 경쟁을 촉진시킨다는 본연의 임무를 묵묵히 수행해 나가는 것이 정도”라고 말했다.

서기열 한국경제 경제부 기자 philo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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