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할아버지’

항일 투쟁과정에서 옥사하신 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해소할 수 없는 평생의 그리움으로 남았다. 아버지에게 몰아닥친 비극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아버지는 체구가 크지 않지만 나에게는 큰 산이다. 바깥의 험한 바람을 모두 막아 주면서도 마음껏 뛰고 자유스럽게 사색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을 만들어 주셨다.

그렇게 넉넉하고 미동도 하지 않는 분이지만 지금도 할아버지의 얘기만 나오면 눈가가 벌게지신다. 여든을 훨씬 넘긴 연세에도 할아버지 말씀만 나오면 말을 잇지 못하시는 아버지에게는 그럴 수밖에 없는 사연이 있다.

아버지는 나의 할아버지를 한 번도 뵌 적이 없다. 나이 여섯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한 번도 할아버지를 만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어렸던 시절 할머니는 작은 돈이나마 독립 투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아버지를 데리고 국내에 머물러 계셨고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북경과 만주에서 끊임없는 피신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친척집을 전전하면서 기차 소리만 들으면 “아버지 보러 가자”고 아버지는 졸랐다고 한다. 일제로 인해 초래된 한국사의 비극은 아버지의 가슴에 그렇게 시커먼 멍을 남겼다. 그리고 항일 투쟁 과정에서 옥사하신 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해소할 수 없는 평생의 그리움으로 남았다.

아버지에게 몰아닥친 비극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할아버지를 모시고 함께 독립 투쟁을 하던 바로 손위 형을 법정에서 처음으로 상면하게 된 것이다. 큰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상해거류민단장 암살 사건에 가담해 거사에 성공한 후 체포돼 국내로 압송됐다. 그 당시 법정에 나오는 범인에게는 갈대로 만든 용수라는 이름의 벙거지를 머리부터 얼굴 전체에 씌웠다. 그래서 법정에 참석하고 있는 사람들은 범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범인은 갈대 줄기의 성긴 틈으로 법정을 부분적으로 볼 수 있었다고 한다. 큰아버지는 당시 사형을 선고받을지, 무기형을 받을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큰아버지는 할머니 옆에 앉아 있는 아이를 보고 “저애가 말로만 듣던 동생이구나”라고 깨달았다고 한다. 그리고 첫 형제 상봉이 영원한 이별을 예고하는 자리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용수 속에서 펑펑 우셨다고 한다.

얼굴도 볼 수 없는 첫 상봉에서 아버지는 포승줄에 묶인 용수 속의 형이 이미 사선에 다가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때 아버지가 느꼈을 고통을 나는 헤아릴 길이 없다. 역사의 비극이 완충 없이 개인사를 덮쳤을 때 어느 누가 그 부담을 감당해 낼 수 있을까.

그리고 반세기가 지난 후 아버지는 형사에게 쫓기는 아들을 대면해야 했다. 며칠을 밖에서 보내다 잠깐 집에 들른 어느 날, 아버지는 나에게 딱 한마디 고통스럽게 말씀하셨다. “할아버지의 뜻으로 보면 네 행동이 틀렸다고 할 수 없다.” 아! 그때 나는 아버지의 삶 속에 숨 쉬고 있는 할아버지를 느낄 수 있었다.

고통의 원천이기도 했던 아버지의 아버지, 그러나 아버지는 간난신고를 겪으면서도 할아버지의 삶을 자식들에게 전해 줄 교훈으로 부여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까지 나름대로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던 나에게 아버지는 한 번도 생활의 명리를 말씀하신 적이 없다. 올바른 삶의 태도에 대해서 늘 자상하게 설명해 주시곤 했다. 그렇게 하시던 아버지가 쓴잔을 삼키는 표정으로 할아버지의 뜻을 말씀하실 때 가슴이 아렸다. 매우 힘드셨던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이름으로, 늘 그랬던 것처럼, 산처럼 나에게 믿음을 주고 스스로 고민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셨다.

이제 자식들이 자라 내가 세상을 만나 고민하던 즈음의 나이를 지나고 있다. 아버지는 아이들에게도 할아버지의 뜻과 교훈에 대해 열심히 가르쳐 주신다. 아이들은 할아버지를 통해 듣는 증조할아버지의 행적을 흥미 있게, 때론 심각하게 듣곤 한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유훈을 전달하는 것으로 평생의 그리움을 달래고자 하신다. 아버지는 살아 있는 할아버지인 것이다.

이종걸 국회의원·국회 교육과학기술위원회 위원장

약력 :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해 인권 변호사의 길을 걸어왔다. 16, 17, 18대 3선 의원으로 18대 국회 교육과학기술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 중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조부 이회영 등 6형제는 항일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이주해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며 항일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상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