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기계는 ‘경기선행지수’…전망 ‘맑음’

화천기공 광주공장 오픈하우스 탐방기

공작기계는 기계를 만드는 기계다. 쉽게 말해 쇠를 깎아 부품을 만들 때 필요한 것이다.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 손 안의 컴퓨터인 스마트폰, 첨단 발광다이오드(LED) TV도 기본은 공작기계에서 시작한다.

자동차의 엔진 블록도 공작기계가 실린더 내부를 정밀하게 깎아 만드는 것이고, 휴대전화 외형도 쇠를 깎아 금형을 만들어야 플라스틱 주물을 뜰 수 있는 것이다. 공작기계가 정밀할수록 엔진이나 휴대전화 외관의 품질이 좋아지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공작기계는 모든 산업의 기초가 된다. 1960~70년대 국내 산업 발전의 원동력 또한 공작기계가 있어 가능했고 기능올림픽 때 선반으로 쇠를 깎는 모습이 TV 방송을 통해 종종 방영되기도 했다.

지난 3월 3일 국내 굴지의 공작기계 제조업체인 화천(貨泉)기공의 오픈하우스가 이틀에 걸쳐 열렸다. 2006년에 이어 두 번째다. 본격적인 경기 회복을 앞두고 공격적으로 개발한 10기의 신제품을 비롯한 화천의 기술력을 전 세계 딜러들에게 보여주겠다는 의도로 4년 만에 기획됐다. 공장 내부에 축구장 절반 넓이를 할애해 신제품 10종을 비롯해 23종의 제품을 전시장처럼 꾸며놓고 손님맞이를 했다.

공작기계가 제조업의 기초가 되듯이 화천기공의 주문량은 경기선행지수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 화천기공 측은 “올해 1분기 수주량이 사상 최대다. 특히 1월 주문량은 전년 대비 40%나 증가했다.

현재 상황으로 봤을 때 향후 경기가 좋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얘기했다. “국내 주문량이 늘어난 것에 비해 해외 주문은 상대적으로 활발하지 않은 편”이라는 말은 글로벌 경기에 비해 한국의 경기 회복세가 더 빠르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로봇 팔이 저절로 쇠를 깎아

광주광역시 광산구 첨단공업단지의 화천기공 공장은 이날 공장답지 않게 희고 푸른 대형 현수막으로 둘러싸여 마치 코엑스 전시장과 같은 분위기였다. 오전 11시 오프닝 행사에 이어 공장 안뜰에 운집한 손님들이 일제히 공장 안으로 들어섰다.

공작기계라고 하면 흔히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의 가내수공업체에서 쇳가루가 날리는 선반을 떠올리게 마련이지만, 이날 전시장에서 본 제품은 거대한 로봇 팔이 스스로 움직이면서 엔진 블록을 깎고 있었다. 이를 CNC(Computer Numerical Control)라고 부른다. 이 기계를 박스에서 꺼내 레일 위에 설치하면 항공기 날개처럼 거대한 부품도 제작할 수 있다.

이 3점식 지지대의 로봇 팔 콘셉트 모델은 유럽에서 개발했지만 화천은 세계 3번째로 상용화에 성공했고 스위스의 규델(Gudel)이 이 모듈을 장착해 미국 보잉사에 납품해 항공기 제작에 사용하고 있다. 그만큼 화천의 기술력은 세계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다.

한국의 공작기계 생산 규모는 세계 5위 수준이다. 화천을 비롯해 두산그룹의 두산인프라코어, 현대자동차그룹의 위아가 국내 빅3를 형성하고 있다. 화천은 화천기공이 연 1500억 원(2008년 1507억 원), 화천기계공업이 연 1500억 원대의 매출(2008년 1487억 원)을 올리고 있다. 화천 계열사에서 생산되는 제품의 50% 이상은 해외로 수출된다.

광주에 공장을 둔 화천기공은 CNC 제조와 고객 맞춤형 자동화 사업을 담당하고 있고 창원에 공장을 둔 화천기계공업(본사 서울)은 CNC와 세미CNC, 그리고 수동형 범용 선반을 생산한다.

화천기계공업은 정밀 가공 노하우를 이용해 엔진 블록과 실린더헤드, 크랭크샤프트를 생산해 현대·기아차에 납품하고 있다. 서암기계공업은 공작기계에 들어가는 정밀기어, 유압 척(hydraulic chuck), 실린더 등을 생산하고 있다.

기능공들 대부분은 화천 제품으로 기술 배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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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고(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에게는 화천의 이름이 굉장히 친숙하다. 1972년 3차 경제개발계획에서 중화학공업을 육성하기로 하면서 기능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공업계 고등학교의 공작기계 실습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1973년 기능사 자격시험에서 부산의 한독직업학교(현 부산기계공업고등학교) 학생들이 전국의 공고 학생들을 제치고 가장 많은 합격생을 냈다.

정부는 이 학교의 교육 방법에 관심을 갖게 되고 박정희 대통령이 그 학교를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교장이 “교사와 학생들의 노력이 컸지만 성능 좋은 기계로 훈련시킨 것이 큰 힘이 됐다”고 한 것이 계기가 됐다.

이후 전국의 공업계 고등학교 관계자의 공장 방문이 이어졌고 생산 주문이 쇄도한 것이다. 또 화천에서 일하다 독립한 기술자들이 전국에 퍼지면서 화천은 ‘기술사관학교’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까지 생산품의 70%를 실습용으로 관납하고 시중에는 30%만을 내다 팔면서 수익성이 크게 악화되기도 했다. 관납가가 시중가에 비해 15% 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 창업주 권승관 회장(작고)은 “우리 기계로 기술을 익힌 학생들이 사회에 나와 훌륭한 기능인이 되고 기술자가 되었을 때 어떤 기계를 찾겠습니까?”라며 직원들을 설득했다.

이 때문에 화천은 한국 산업 발전의 기초가 되었다는 자부심을 갖게 됐다. 오픈하우스 첫날 오후에는 관광버스를 타고 온 광주 인근의 공고와 기술대학 학생들이 줄을 이었다.

행사장에서 손님들을 안내하던 권영렬 회장은 인터뷰 요청에 “특별히 할 말이 없다”면서도 “공작기계의 중요성을 좀 알리기 위해 행사를 마련했다.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지만 가만히 있다고 알아주는 것도 아니다.

요즘 제조업 관련 인력이 많이 부족하다. 일자리가 없다고 하는데, 정작 공장에는 일할 사람이 부족하다. 뭔가 정책이 방향을 잘못 잡은 것 아닌가. 일단 기계에 친숙해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행사 취지를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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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보기 l 화천기공 안뜰 바위의 정체

돈보다 명예를 남긴 창업자의 뜻

화천의 창업자 권승관(1916~2004) 회장은 열네 살 때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보통학교 4년을 중퇴하고 과일을 팔던 중 철공소에서 일하는 또래 아이들과 마주치면서 일본인 소유의 철공소에 견습공으로 취업하게 된다.

당시 그가 받은 일당 25전으로 온 가족이 끼니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권 회장은 이때가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비록 적은 액수의 돈이지만 마음이 든든하고 배가 부르다며 어머니가 기뻐한 것을 떠올렸다.

이후에도 권 회장은 평생 자신의 축재에는 관심이 없는 베푸는 삶을 살았다. 1972년 오일 쇼크 이후 전국의 기업들이 자금난에 허덕이자 정부는 기업들의 자금 사정을 개선하기 위해 8 ·3 사채 동결 조치를 내렸다.

그러나 권 회장은 어려울 때 자신을 도운 사람들을 저버릴 수 없다며 사채 신고를 하지 않았다. 고리의 사채를 쓸 정도였으니 자금 사정이 넉넉하지 않았는데도 신용이 먼저라며 정부 정책을 따르지 않은 것이다. 신고하지 않은 것이 발각될 경우 형사처분도 받을 수 있는 때였다.

권 회장은 광복 후 성실성과 근면함으로 일본인 사장으로부터 공장을 받았고 이를 토대로 1951년 화천기공사로 간판을 바꿔달았다. 저수지 갑문, 건설용 철재, 농기구 등을 만들던 화천기공은 당시 불모지에 가까웠던 공작기계 제작에 도전해 1959년 선반 개발에 성공했고 1964년 기존의 벨트식을 대체하는 기어 구동식 선반을, 1977년에 NC(Numerical Control) 선반을 개발했다. 이렇게 회사가 커 나가는 동안에도 요령을 모르고 오직 정도만을 걸었던 권 회장은 오일 쇼크 등으로 인한 불황 때 자금 조달을 위해 사방팔방 뛰어다녀야 했다.

화천은 1981년 부도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직원들 스스로 체불임금을 유보하거나 상여금을 반납하고 생산직 직원들이 스스로 영업에 나서기도 했다. 당시 노조위원장은 “회사의 자금 사정을 노조원 모두가 알고 있었고 더욱이 기업주가 빼돌린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고 할 정도로 권 회장은 오로지 공작기계에만 매달렸다.

또한 지역사회에도 덕망이 높아 1993년에는 지역 주민들이 송덕비를 세우기도 했다. 지금 화천기공의 광주공장 안뜰에 ‘덕인(德人)’이라고 음각된 큰 바위가 그것이다. 당시 화천기공이 있던 공장 자리에 고속터미널을 짓는다고 하자 권 회장이 금호그룹에 시세보다 싸게 넘기기도 했다. 주위에서 이를 만류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권 회장으로부터 쓴소리를 들어야 했다.

우종국 기자 xyz@kbizwee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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