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겨울’… 미분양 해소 ‘관건’

5월 위기설 ‘솔솔’ 중견 건설 업체 속사정

A 건설사에 근무하는 B 과장은 지난해 12월 입사 후 처음으로 급여가 연체되는 일을 겪었다. 시공 능력 평가 순위 10위권이던 대기업 계열의 이 회사가 직원들의 급여를 연체한 것은 지난 1998년 외환위기 이후 처음이다.

보름 정도 지난 다음에 밀린 월급을 받았지만 직원 후생복지 차원에서 지급하던 각종 수당은 작년 하반기 이후 완전히 끊겼다. 설과 추석 때 지급하던 특별 상여금은 아예 꿈도 꾸지 못하는 실정이다.

해외·공공 수주 증가로 건설사들의 자금 사정이 나아지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형 건설사들만의 얘기다. 중견 건설사들은 정상적인 자금 조달이 어려워지면서 심각한 자금난에 휩싸여 있다.

월급이 벌써 7~8개월 연체된 곳도 있다. 이에 따라 자금난으로 어려움에 직면한 건설사들이 조금씩 늘고 있다. 이들 중에는 유명 아파트 브랜드를 보유한 건설사들도 포함돼 있다.

이른바 건설사별 양극화가 본격화되면서 자금난에 빠진 이들 중견 건설사들의 향배에 시장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일단 대형 건설사들은 민간 주택 부문 미분양 문제가 다소 완화되는데다 원전 등 해외 공사 물량이 조금씩 늘면서 자금 사정이 한결 나아졌다.

대형 건설사들의 경우 신용 등급이 빠르게 향상되는 모습이다. 지난해 9월 현대건설과 GS건설은 회사채 발행 기준 신용등급이 기존 ‘A+’에서 한 단계 높은 ‘AA-’로 격상됐다.

그러나 중견 건설사들의 사정은 시간이 갈수록 상황이 악화되는 모습이다. 자금력을 갖춘 대형 건설사들이 민간 주택 부문을 싹쓸이하면서 신규 수주는 사실상 중단됐고 미분양 가구 수는 늘고 있다.

지난 2월 11일 기점으로 지방 미분양 아파트에 대한 정부의 양도세 감면 혜택이 종료되면서 다시 상황은 악화되는 모습이다.

국토해양부가 발표한 2009년 12월 미분양 가구는 전달 대비 0.6%(755가구) 증가한 12만3297가구를 기록했다. 준공 후 미분양도 전월 대비 2.1%(1012가구) 증가한 5만87가구였다.


1년 만기 도래 PF액 24조 원

문제는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중견 건설사 주택담당 임원은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말이 딱 어울릴 정도로 상황이 심각하다”면서 현 난국을 돌파하기가 상당히 어렵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설명했다.

실제로 지난해 국내 건설사들의 경영 악화에 결정타를 날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대출은 사정이 더 복잡해졌다. 지난해 9월 말 기준 37개 주요 건설사들의 부채비율은 191%로 2008년 6월 말 187%보다 더 높아졌다.

부동산 PF 대출을 포함한 조정 부채비율은 350.2%에 달한다. 이는 대형 건설사와 중견 건설사의 대출금이 포함된 규모다. 자금난을 겪고 있는 중견 건설사들의 부채비율이 평균치보다 높다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정부가 대주단을 구성해 PF로 인한 건설사들의 단기 유동성을 해결해 줬지만 현재 상황은 그리 낙관적이지 못하다. 한국기업평가에 따르면 국내 36개사의 PF 우발채무 잔액은 약 46조 원 수준이다. PF 우발채무란 시행사나 특수목적회사(SPC) 등의 부도 등 채무불이행으로 지급보증을 선 건설사가 대신 갚아야 하는 돈까지 포함된 금액이다.

한마디로 최악의 상황에 놓일 경우를 가정한 수치다. 이 가운데 1년 이내 만기 도래 예정인 PF 우발채무액은 24조 원으로 전체의 53.3%에 이른다. 지역별로 살펴보면 수도권 사업장은 48.8%인 반면에 지방 소재 사업장은 63.3%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익산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신용부문)은 “대형사에 비해 지방 사업 비중이 높은 중견 건설사의 경우 PF 우발채무 부담으로 유동성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고 우려를 표시했다. 금년 내 만기가 도래하는 7조 원의 회사채를 어떻게 상환해야 할지도 숙제다. 이 중 2조 원은 당장 1분기가 만기다.

이런 상황이면 건설사로선 매달 살얼음 위를 걷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단기 유동성 위기로 경영이 절체절명의 상태에까지 이를 수도 있다. 더군다나 아직도 PF 대출 잔액은 줄지 않고 있다.

금융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9월 금융권 PF 대출 잔액은 83조3000억 원으로 2008년 말 보다 1조1000억 원 늘었다. 이 기간 연체율은 4조3000억 원에서 5조9000억 원으로 증가했다.

그렇다고 시장에서 자금을 융통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신용 등급이 ‘BBB-’ 이하인 기업은 8~10%의 고금리를 약속해도 회사채 발행이 어렵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지금은 최소 ‘A-’ 이상 등급을 받아야 회사채 발행이 가능한데 자금난을 겪고 있는 중견 건설사들은 대부분 ‘BBB’ 이하 등급”이라면서 “최근 심각한 경영 위기를 겪고 있는 저축은행에서 PF 대출을 받았기 때문에 상환 압력도 대형 건설사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다”고 전했다.


‘분양가 상한제 폐지해야’

이에 따라 최근 중견 건설사들이 저가로 무리하게 공공사업을 수주하는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지난 1월 한국수자원공사가 발주한 4대강 2차 턴키(설계 시공 일괄사업) 발주 공사 입찰에서 금강 5공구의 경우 D기업 컨소시엄이 예정가 1260억 원의 절반인 633억 원(50.24%)에 수주했다.

낙동강 25공구도 E기업 컨소시엄이 예정가 1458억 원의 58%인 846억 원에, 낙동강 31공구에서는 F 기업 컨소시엄이 예정가 990억 원 대비 59.5%인 589억 원에 낙찰 받았다. 80% 선에 입찰한 상위 대형 건설사와 달리 이들 업체들은 저가로라도 무리하게 낙찰 받는 모습이다.
한 중견 건설사 공공 토목 담당자는 “정부 공사는 절대로 떼일 염려가 없기 때문에 다소 손해를 보더라도 일단 수주할 생각”이라면서 “당장은 손해지만 실적 등을 고려하면 그다지 나쁜 선택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문제는 채권단의 결정이다. 오는 5월 대주단 협약이 끝나는 시점이 기로다. 익명을 요구한 모 증권사 은행 담당 애널리스트는 “신용 등급이 ‘B’ 이하여서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에 돌입한 건설사들에 대해서는 오히려 우호적인 분위기가 많지만 문제는 워크아웃을 간신히 통과한 신용등급 ‘B’ 대의 건설사들”이라면서 “미분양 해소 여부가 관건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KB투자증권 허문욱 연구원도 “해외 공사 수주로 부채를 줄일 수 있는 곳에 대해서는 다소 낙관적이지만 민간 부문에 지나치게 많이 쏠려 있는 기업들은 올해도 힘겨운 시간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만일 최악의 시나리오처럼 중견 건설사들이 연쇄 부도를 일으킬 경우 피해는 고스란히 소비자의 몫이다.

현재로선 유동성 위기에 직면한 중견 건설사들을 연착륙시키는 방안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공동 수주 확대 등 공공 공사 입찰제도 변경과 아파트 분양가 상한제 폐지 등 제도 보완도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물론 건설 업체들의 자성도 필요하다. 아파트·오피스텔 등 민간 부문에 집중된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해야 한다.

건설산업전략연구소 김선덕 소장은 “아파트 분양만으로 돈 버는 시대는 이미 끝났다”면서 “대주단 협약 연장이 필요하되 앞으로 건설사들은 전원주택, 임대주택 사업 등 돈 되는 사업은 모두 한다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며 업계의 자성을 촉구했다.

송창섭 기자 realsong@kbizwee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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