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시장 돌격대’…음지에서 양지로

금융 부티크의 세계

‘작은 것은 아름다운 것인가.’ 최근 세계 금융시장에서 ‘부티크’의 급성장이 화제가 되고 있다.

금융 부티크란 소수의 전문가들이 모여 차린 금융회사로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2009년 상반기 세계 인수·합병(M&A) 시장에서 이들의 시장점유율은 역대 최고치인 14%까지 치솟은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서도 금융 부티크들이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변신에 빠른 금융 부티크들이 다양한 맞춤형 금융 컨설팅을 제공하며 금융 위기의 끝자락에서 효율적 투자에 고민하는 고액 자산가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

‘돈 되는 것이면 다한다’는 ‘자본시장의 돌격대’ 금융 부티크에 대해 알아봤다.

사실 ‘부티크’란 단어를 들으면 고급 숙녀복 매장을 연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어로 상점·가게를 뜻하는 부티크에 다른 단어가 합해지면 그 의미가 달라진다.

예를 들어 부티크 로펌은 대형 로펌이 놓친 틈새시장을 적극적으로 파고드는 로펌이고, 리서치 부티크는 경제·금융 관련 분석 자료를 제공하는 리서치 업체다. 즉, 부티크란 ‘특정 업무를 수행하는 소수의 전문가 집단’이란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금융계에도 부티크가 있다. 금융 부티크는 기업 간의 M&A에서부터 기업공개(IPO) 또는 우회 상장, 유상증자나 신주인수권부사채(BW) 발행, 개인 자산가의 주식, 혹은 파생상품 투자 자문 등 쉽게 말해 자본시장 내에서 ‘돈 되는 건 다하는’ 전문가 집단이다. 즉, 금융계의 ‘타짜’들이 적게는 두세 명에서 많게는 십여 명 정도가 모여 한발 앞선 기법과 다양한 거래 방식을 통해 부를 창출해 내는 게 바로 ‘금융 부티크’다.

금융 부티크의 운영자들은 대부분 금융계에서 쟁쟁한 경력을 쌓은 사람들이다. 우선 증권사, 투자 자문사 및 자산 운용사, 은행권 출신이 주를 이룬다. 이들은 회사 내에서도 M&A 전문가, 국제금융 담당자, 주식 및 채권 운용 담당자, 선물 전문가, 외환 전문가, 애널리스트 등 고도의 전문적인 업무를 맡고 있는 사람들이 다수다. 이 밖에 변호사·회계사·세무사·변리사 등도 함께 일하는 경우가 많다.

‘M&A가 최대 수익처’

특히 요즘 들어서는 이른바 ‘투 잡’을 뛰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낮에는 직장에 다니면서 밤이나 주말에만 모여 부티크의 일에 관여한다. 현직에서 누릴 수 있는 각종 권한이나 정보들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다.

한때 금융 부티크에서 ‘투 잡’을 했었다는 한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애널리스트라는 직업은 생명이 짧고 하는 일도 고되다”며 “웬만한 규모의 M&A 자문 업무를 맡아 몇 달만 고생하면 2~3년치 연봉을 한 번에 벌 수 있으니 유혹이 컸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처음부터 고객과 ‘번 돈의 몇 퍼센트’라고 정해 놓고 프로젝트별로 건별로 대가를 받으니 많이 뛸수록 내 몫이 더 늘어나는 게 당연하다”고 설명했다.

세금의 차이도 무시할 수 없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대부분의 월급쟁이들은 ‘유리지갑’이다. 절세라고 해봐야 연말정산을 꼼꼼히 하는 방법밖에 없다. 특히 이들 같은 고액 연봉자는 많게는 번 돈의 40%까지 세금으로 내야 한다.

하지만 금융 부티크는 대다수가 법인이다. 당연히 법인은 막대한 세금을 피해갈 수 있는 방법을 가지고 있다. 법인세가 개인에게 적용되는 세율보다 훨씬 낮고 각종 절세법도 다양하게 구사할 수 있다.

다양한 기법을 동원할 수 있다는 것도 매력이다. 제도권에서는 지켜야 할 법규나 규칙이 많다. 수많은 고객의 돈을 관리하는 입장에서는 당연하다. 하지만 부티크는 제도권 밖의 조직이니 눈치 볼 일이 별로 없다. 규제 산업인 금융의 특성상 아직 법이 정해지지 않은 ‘비법(非法)’의 영역이라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어 과감한 베팅이 가능하다.

어차피 금융 부티크를 찾는 전주들도 웬만한 전문가들을 능가하는 부호들이다. 이들은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의 원칙을 철저하게 숙지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일이 틀어지더라도 명백한 책임이 부티크 측에 있지 않는 한 더 이상 따지지 않는 게 불문율이다. 물론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한두 번의 실수만으로도 업계에 소문이 퍼져 바로 ‘아웃’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열심히 뛴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대다수 금융 부티크의 주수입원은 M&A 자문 수수료다. 실제로 현재 국내 금융 부티크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소시어스·두우컨설팅·MVP파트너스 등은 모두 M&A에 주력하고 있다.

산업은행에서 M&A 업무를 담당했던 인사들이 주축인 소시어스는 작년 두산DST와 한국항공우주산업 매각에 관여하며 성과를 올렸다. 이 회사가 자문한 딜의 규모는 6984억 원(완료 기준) 규모다.

두우컨설팅은 법무법인 두우의 비즈니스파트너로 농협중앙회의 세종증권(NH증권) 인수, 해태제과 해외 컨소시엄 매각 등의 트랙 레코드를 보유하고 있는 기업이다. 작년 이 회사가 자문한 딜의 규모는 118억 원(완료 기준) 수준이다.

이처럼 M&A를 통해 성장해 온 금융 부티크들은 이제 새로운 틈새시장을 공략하기에 혈안이 돼 있다. 은행·증권사·법무법인·회계법인 등 M&A 시장에 뛰어들고 있는 주체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금융 부티크의 경우 ‘자문(advisory)’역할에 한정돼 있는 게 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다.

M&A 업계의 한 관계자는 “부동산 등 자산 매매는 법무법인을 통해 자체적으로 해결하는 경우가 많고 대형 거래는 금융 위기로 인해 가물에 콩 나듯 했다”며 “그나마 있는 대형 M&A도 은행 계열 증권사들이 수주하면서 부티크들이 점점 더 기회를 얻기가 힘든 실정”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사실 국내 금융 부티크의 1차 전성기는 외환위기 이후 벤처 버블 당시라고 할 수 있다. 그때만 해도 해외와 국내 금융 기법의 수준 차이가 꽤 커서 조금이라도 나라 밖 사정에 밝은 전문가라면 상당한 부를 거머쥘 수 있었다. 또 제도권 전문가들의 상당수도 밖으로 내몰리면서 그간 쌓아온 인맥이나 금융 기술을 활용해 비제도권에서 성공을 일궈냈다.


차별화된 서비스로 자산가 사로잡아

하지만 벤처 버블이 꺼짐과 동시에 여러 부티크들이 경영 위기에 몰리게 됐다. 특히 잇따른 M&A를 성사시키며 주목받았던 금융 부티크 1세대 진승현 MCI코리아 사장과 정현준 한국디지탈라인(KDL) 사장,이용호 G&G그룹 회장 등은 각종 게이트의 주역으로 물의를 일으키며 도덕성에 치명상을 입었다. 또 2004년 사모 투자 펀드(PEF)의 허용과 제도권 금융사들의 전방위적인 영업 확대 등으로 주춤했던 게 사실이다.

최근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미국 금융계에선 에버코어·페렐라인와인버그·그린힐앤코·라자드 등 제도권 금융사의 스타 임원들이 차린 금융 부티크들이 전성기를 맞고 있다고 한다. 2009년 상반기 전 세계 M&A 시장에서 금융 부티크의 점유율은 역대 최고 수준인 14%까지 점유율이 높아졌다.

이들은 자산 관리와 사모 투자 등으로 영역을 넓혀가며 기존 IB들이나 상업은행들이 놓치고 있는 틈새시장을 집중 공략하며 자산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금융 위기 이후 우수 인력들의 유입이 속속 이어지고 있어 경쟁력이 더욱 높아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서도 최근 금융 부티크들의 숫자가 다시 늘어나며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는 게 금융권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자본시장의 돌격대’라는 별명답게 보다 다양한 영업 형태와 방식을 개발하며 몸집을 키워가고 있는 것.

특히 지난해 국내 주식시장이 되살아나고 개인들의 주식 투자가 많아지면서 주식거래 관련 금융 부티크가 크게 늘어나고 있다. 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적립식 펀드에 투자했던 고액 자산가들이 많이 실망했던 것 같다”며 “이 같은 실망과 자본시장에 대한 학습 효과가 맞물려 차별화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금융 부티크 등으로 돌아서게 하는 원인”이라고 설명했다.

금융 위기에 따라 해외에서 근무하던 전문가들의 국내 U턴 현상이 일어나고 있으며 2세대에 해당하는 해외 유학파들이 국내 금융사에서 몇 년간의 경험을 쌓은 뒤 독립하기 시작한 것도 한 원인이다.

‘양지’로 이끌어내야

사실 금융 부티크의 숫자에 대한 공식적 집계는 전무하다. 쉽게 말해 누구나 사무실을 열고 ‘금융 부티크’라고 하면 끝이다. 캐피털·컨설팅·투자자문·파이낸스·인큐베이팅·인베스트먼트 등 서울 강남권이나 여의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상호명을 가진 업체들의 대다수가 바로 금융 부티크다.

현재 ‘기타법인’으로 분류되는 이들 중에는 대부 업체와 사채 업체 등도 꽤 많다. 이들도 수익성 다변화 차원에서 현금 동원력을 바탕으로 다양한 기법을 구사하면서 금융 부티크화하고 있는 추세다. 또 주식시장, 선물 및 옵션시장, 외환시장 등에서 큰돈을 번 개인 자산가들인 이른바 ‘슈퍼개미’들 몇몇이 모여 금융 부티크라는 방식으로 법인화하고 있다.

늘어나고 있는 금융 부티크의 숫자를 가장 쉽게 가늠해 볼 수 있는 게 유사 투자 자문이나 투자 자문사의 숫자다. 유사 투자 자문은 인터넷 등을 이용해 불특정 투자자에게 일정한 대가를 받고 증권 투자 정보를 제공하는 영업을 하는 곳이다. 제도적으로 일정한 요건 없이 금융 감독 당국에 신고만 하면 영업 활동을 할 수 있어 M&A 관련 회사와 함께 금융 부티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곳이다.

1월 17일 금감원에 따르면 이 같은 유사 투자 자문사는 지난해 12월 말 현재 총 259개에 달한다. 이는 2008년 12월 말 194개사에서 65개사가 늘어난 규모다.

전업 투자 자문사의 숫자로도 금융 부티크의 확산을 가늠해볼 수 있다. 전업 투자 자문사는 투자 자문과 투자 일임 라이선스를 획득한 업체다. 자문업의 최소 설립 요건은 자기자본 5억 원, 일임업의 경우 자기자본 15억 원만 있으면 되는 등록제이므로 진입 장벽이 높지 않다.

즉, 필요에 따라 비제도권에 있기를 원하는 곳이 아니라면 성공한 금융 부티크의 경우 투자 자문사와 투자 일임사로 발전해 가며 제도권 안으로 들어오는 수순을 밟는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이 같은 전업 투자 자문사는 2008년 말 90개사에서 작년 9월 말 기준으로 103개사로 13곳이 늘어났다. 이는 자본시장법 시행 이전에 전업 투자 자문사를 신설하려는 수요가 몰렸던 2008년 16개와 비슷한 숫자로 전업 투자 자문사의 30%가 1~2년 사이 생겨난 셈이다.

물론 급증하는 금융 부티크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은 게 사실이다. 실체가 확인되지 않은 테마주를 만들어 내거나 M&A설을 유포하는 등 다양한 방식의 ‘작전’을 벌이는 이들이 본거지로 삼는 곳이 바로 금융 부티크다.

김정환 밸류25 대표가 쓴 ‘한국의 작전세력들’이란 책에 따르면 국내에서 활동하는 수백 개의 부티크 중 10% 정도가 바로 작전의 ‘아지트’라고 진단했다.

하지만 잡초처럼 성장해 온 금융 부티크들은 금융시장의 건전한 성장을 위해 필수적인 요소 중 하나다. 쉽게 말해 워런 버핏도 친척들의 돈을 모아 투자하는 금융 부티크를 통해 산전수전 겪어가며 성장해 온 사람이다. 금융 산업을 새 성장 동력으로 외치고 있는 지금 아이디어와 실력으로 부를 쌓아가는 음지의 금융 부티크들이 양지에서 보다 많이 꽃을 피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할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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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보기 │금융 부티크 1세대들



국내 금융 부티크의 효시로는 중앙종합금융 김석기 전 사장이 거론된다. 김 전 사장은 미 하버드대 경영학 박사 출신으로 1990년대 초 홍콩에 금융 부티크를 열어 아비트리지(차익 거래) 기법을 활용해 큰돈을 벌었다.

이후 국내 유수 기업의 자산 운용, 해외 자금 유치에 관여하거나 투자 자문가로 활동하며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다. 하지만 2000년 불법 주식거래 혐의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는 곤욕을 치르며 자취를 감췄다.

김석기 전 중앙종금 사장처럼 금융계에서 사라져간 인물들도 있지만 금융 부티크 운영을 발판으로 중견 그룹의 오너로 거듭난 인물도 상당수다. 권성문 KTB 회장, 이영두 그린손해보험 회장, 윤현수 한국저축은행 회장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권성문 회장은 동부그룹과 한국종금에서 경력을 쌓은 뒤 1995년 한국M&A란 부티크를 창업했다. 1999년 한국종합기술금융(KTB)을 사들여 최대 벤처캐피털 업체인 KTB네트워크(현 KTB투자증권)로 키웠다. 그는 지금 KTB자산운용 등을 거느린 KTB금융그룹의 오너가 됐다.

이영두 회장은 증권맨 출신이다. 현대증권과 동방페레그린증권을 거친 후 인핸스먼트M&A라는 부티크를 만들어 독립했다. 그는 2004년 그린손보 경영권을 인수해 보험사의 오너가 됐다. 윤현수 회장도 M&A를 통해 경영자로 변신했다.

그는 산업은행과 한외종금을 거쳐 1996년 금융 부티크인 코미트M&A를 설립했다. 이후 2000년 진흥상호신용금고(현 한국저축은행) 등 저축은행을 줄줄이 인수하며 한국저축은행그룹 오너에 올랐다.

왼쪽부터 권성문 KTB회장, 윤현수 한국저축은행 회장, 이영두 그린손보 회장.

이홍표 기자 hawlling@kbizwee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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