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하칠보 공동대표 김선경 회장·박수경 사장 모녀
형형색색의 기품 어린 빛을 발하는 칠보공예는 한국의 대표적인 전통 문화 상품이다.국제화·세계화의 시대이기에 더욱 각광받고 있는 한국의 칠보공예를 이끌어 가는 모녀가 있다.칠보공예 전문 업체 (주)금하칠보의 공동대표로 있는 김선경 회장과 그 딸인 박수경 사장이다.김선경(왼쪽) 1946년생. 이화여대 경영대학원 수료. 86년 올림픽공모전서울시장상 수상. 2001년 금하칠보 연구실 개원. 2005년 제8회 전국관광기념품공모전 특선. 2008년 서울공예상 공모전 금상 수상. (주)금하칠보 공동대표(현).박수경 1972년생. 이화여대 교육대학원 졸업. 플로리다 ELI대 수료. 2006년 노동부 지정 제2005-03호 칠보유약제조 기능전수자. 2007년 (재)한국공예문화진흥원 칠보전문위원. 2008년 신지식인상 수상(중소기업분야). 2008년 (사)한국칠보공예협회 이사장. (주)금하칠보 공동대표(현).금하칠보는 아버지에게서 딸로, 딸에게서 다시 그 딸로 이어진 이른바 가업형 회사다.“어머니가 재정·운영·재료개발 부문을 맡고 제가 교육·문화상품·홍보·마케팅·해외 쪽을 담당하고 있죠. 하지만 어머니나 저나 가업이라서 이어받은 건 아니에요. 칠보가 너무 좋아, 칠보를 더 발전시키고 싶어서 힘을 보탰다고 할 수 있죠.”(박수경) 금하칠보의 첫 시작은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평소 공예 디자인에 관심이 많으셨던 아버지가 집 옆에 작은 액세서리 공장을 차리고 남대문에 ‘금하상회’라는 이름으로 액세서리 전문 매장을 내신 것이 금하칠보의 첫 시작이었죠.”(김선경) 1967년의 일이다. 창업 초기만 하더라도 진주 장식품을 만들어 팔던 김 회장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우리나라 전통 공예인 칠보를 배울 것을 권유했고 이후 아들은 아버지의 일을 도와 칠보 유약의 제조와 제품 디자인 등을 도맡게 된다. 그가 바로 현재 우리나라의 대표적 칠보공예 작가인 김선봉 명인이다.김선경 회장 역시 아버지로부터 본격적인 경영 수업을 받고 공장에서 직접 칠보공예를 만드는 과정을 배우기도 했다. 하지만 동생과 그녀의 역할은 처음부터 분명하게 나눠졌다. “처음 아버지 일을 도울 때부터 남동생이 제품 디자인과 생산을 담당하고 매장 경영과 판매는 제가 도왔었죠. 그 때문에 그 후 아버지가 지병 악화로 몸이 많이 나빠진 후로는 자연스레 회사를 맡게 된 거예요.”(김선경)한때 금하상회는 그야말로 물건이 없어서 팔지 못할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여느 비싼 보석 못지않게 화려한 아름다움을 뽐내면서도 훨씬 경제적인 가격이었던 덕분에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칠보를 찾는 이들이 많았다. 이 때문에 1980년대 초반 무렵에는 여러 백화점에 입점하기도 했을 정도다.그러나 칠보는 나이든 어른들이나 좋아하는 공예품이라는 인식이 높아졌고 형형색색의 칠보보다 심플한 골드나 실버 액세서리를 선호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게다가 칠보공예는 대부분 100% 수작업으로 이뤄지는 만큼 인건비가 상승함에 따라 채산성을 맞추기도 힘들어졌다. 결국 1990년대에 이르러서는 대부분의 매장과 공장까지 모두 폐쇄하기에 이르렀다.“그 당시는 정말 힘들었죠. 그때 남편의 도움이 컸어요. ‘처갓집이 망했다는 소리는 듣기 싫으니까 힘들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열심히 하라’고 응원해 주더군요. 칠보 완제품 판매만이 아니라 칠보 재료를 팔았던 것과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칠보공예 교육을 병행한 것이 다시금 회사를 일으키는데 큰 힘이 되어 주었다.“어렸을 때는 어머니가 굉장히 원망스러웠죠. 학교에서 돌아오면 캄캄한 아파트에 혼자 들어가 어머니를 기다리는 일이 계속되다 보니까 난 커서 엄마 같은 사람이 되지 말아야지 생각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고요.”(박수경)하지만 결국은 그녀도 어머니처럼 칠보에 매료되고 금하칠보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갖게 됐다. 특히 2002년 한·일 월드컵을 통해 세계화에 대한 갈망을 느끼게 됐다. “어릴 때부터 보고 자라온 칠보공예 아이템을 세계화해 보고 싶다는 꿈이 생긴 거죠. 사실은 2000년 초부터 칠보공예의 재료 판매를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해 보는 것이 어떠냐고 어머니에게 제안하기도 했는데 안 됐거든요.”(박수경)결국 그녀는 2002년 칠보공예가 발달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칠보를 공부하는 한편 귀국한 후에는 외삼촌인 김선봉 장인에게서 칠보 유약 제조 등을 배워 나갔다. 그 후 2004년 인터넷 쇼핑몰을 오픈하고 여성창업보육센터의 지원으로 홀로서기를 시작한다. “남들은 제가 어머니 딸이니까 순조롭게 일을 시작한 것으로 알지만 사실 그렇지도 않아요. 재정적인 지원은커녕 인터넷에 올리는 재료들도 사진 자료를 위한 샘플만 제공해 주셨을 정도라니까요.”“저라고 왜 딸을 돕고 싶지 않았겠어요. 하지만 이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니까 혼자서 고생을 좀 하더라도 얼마나 헤쳐 나갈 수 있는지 지켜보려고 했죠.”(김선경) 박 사장은 이후 당차게 홀로서기에 성공했다. 어머니의 도움 없이 창업보육센터를 통해 창업의 꿈을 이루는가 하면 각종 공모전을 통해 상을 받으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수상자에게 주는 무료 부스를 통해 바이어를 만날 유통 채널을 마련했다. 좀 더 많은 이들에게 칠보공예를 알리기 위해 홍보 영상과 카탈로그를 만드는 한편 공예계 최초로 ISO-9001을 획득했다.“어머니와 각각 따로 회사를 경영하다 합친 것은 2008년부터예요.”(박수경) “한 3~4년 혼자 사업을 경영하는 모습을 보고 합쳐도 되겠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곁에서 지켜보고 있자니 내 딸이지만 새삼 놀라게 되더라고요. 아이디어도 확실히 젊은 아이답게 남다른 것 같고 일의 추진력도 대단하더라고요.”(김선경)결국 두 사람은 2008년 사업을 합치고 (주)금하칠보의 법인을 설립했다. 두 사람이 힘을 합친 것은 모녀 모두가 좀 더 크게 날기 위한 꿈 때문이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칠보의 존재를 모른다는 것이 속상했다는 그녀들이다.칠보는 은이나 동과 같은 금속 위에 갖가지 색을 표현할 수 있는 유약을 발라 뜨거운 불에 구워냄으로써 보석과 같은 아름다운 광택을 지닌 장신구로 태어나게 된다. 옛날에는 흔히 노리개나 비녀 등 상류층의 장신구로 활용됐지만 최근에는 각종 액세서리는 물론 명함첩·거울·화병·그릇·시계 등 온갖 생활용품에도 다양한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있다.“칠보로 만들지 못하는 것들이 없죠. 게다가 액세서리나 작은 소품뿐만 아니라 인테리어 산업적인 측면에서도 활용 가능성이 큰 게 바로 칠보예요. 거의 반영구적이기 때문에 경제적인 이점도 있고요. 모두 수작업으로 만들다 보니 하나하나의 오리지널리티가 있는 것도 큰 장점이죠.”(박선경)세계화의 물꼬를 트기 위해 박수경 사장은 진작부터 일본과 중국의 칠보를 많이 보고 공부하며 이들 나라의 칠보 작가들과 유대 관계를 만들어 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국·캐나다·독일·사우디아라비아 등 전 세계 칠보 작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정보를 교환하려는 노력도 계속하고 있다.함께 회사를 경영하다 보니 의견이 다를 때도 많다. 하지만 그때마다 두 사람은 서로의 경험과 도전 정신을 조화해 가며 환상의 호흡을 맞춰 나간다.“그래서 우리의 꿈은 우리 회사의 목표와 같아요. ‘Creating Future Traditions!’, ‘미래의 전통을 창조하자’는 것이죠. 칠보로 현대인들의 생활에 적합한 문화를 만드는 것이 꿈이에요. 칠보 박물관이나 칠보로 만들어진 집을 지어 많은 이들에게 칠보에 대해 알리는 한편 세계적인 브랜드로 성장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꿈이죠.”(김선경 박수경)김성주 객원기자 helieta@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