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장사와 샅바 싸움 나선 한·미의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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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니 뭐니 해도 돈놀이가 가장 돈 되는 장사.” 중견 시중은행에서 20년 넘게 일해 온 한 친구는 곧잘 이렇게 말했다. 여기에 단서를 단 것은 내 쪽이다. “단, 떼이지만 않는다면…”이라고. 부실만 발생하지 않는다면, 발생하더라도 관리 범위 내에서라면 금융업이라는 근사한 이름의 돈놀이가 가장 안정적인 사업인 것 같다. 물론 돈놀이보다 더 돈 되는 사업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가령 술(때로는 여성까지 포함되는 것 같다)장사도 그렇고, 국제 간이나 위험 분쟁 지역의 무기 거래업도 그럴 것 같고, 불법과 위험까지 무릅쓰는 희귀 야생 생물 매매 사업도 그럴 것으로 보인다.돈놀이가 폼이 나 보이지만 돈놀이에도 여러 갈래가 있다. 은행처럼 국가에서 면허증을 얻어야 가능한 사업도 있고, 비공식의 고금리 사금융도 있다. 정부가 완전히 지급보증을 해주면서 사업상 위험까지 실제로 떠안은 채 보증해 주는 영역이 있는가 하면 고리대금업은 불법과 편법 사이를 오간다. 은행만 하더라도 비교적 우수 고객을 대상으로 좋은 금융 상품을 거래한다. 신용도가 되는 우량 소비자에게 낮은 금리의 우수 상품을 대출해 주는 식이다. 이보다 못한 고객들은 저축은행과 같은 제2금융권을 찾는 게 현실이다.무리한 내용이 없지 않지만, 당사자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고금리 대부업자들은 나름대로 틈새 금융 사업자의 특성을 보인다. 법적으로 보장해 주는 금리가 연 50%에 달하는데, 높은 조달 금리에다 높은 연체율과 부실률, 떼인 돈 회수 비용을 감안하면 이렇듯 고금리로도 남는 게 없다며 볼멘소리를 한다. 돈놀이라는 논리, 대출과 예금 등 자금 중개시장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돈시장도 이렇게 도매·소매, 공식·비공식, 제도권과 틈새시장 등 복층적인 시장이 형성되고 수요·공급층도 참으로 다양하게 형성돼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물론 불법 사금융은 물론이고 고금리 대부업도 정상화로 유도해 나가야 한다는 정책적 목표와 별개의 얘기다. 이렇게 본다면 정부가 면허증을 내주고 자금 조달과 부실 청산에까지 책임져 주다시피 하는 은행에 감독 규제가 강화되는 건 당연하다.이런 돈시장에 최근 두 가지 의미 있는 뉴스가 전해졌다. 한 가지는 국내 은행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서 전해진 것이다. 국내에서는 금융권의 관심사였던 은행 사외이사에 대한 모범 규준을 전국은행연합회가 새로 제시한 것이 주목된다. 은행과 은행지주회사는 이사회 의장을 매년 새로 뽑아야 하고, 사외이사의 임기와 총 재임 기간도 제한 받게 된다. 사외이사들에게 스톡옵션이 금지되며 보수 내역도 공시돼야 한다. 전체적으로 사외이사의 선임과 활동, 보수에 한층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면서 독립성과 전문성도 높이도록 제도를 개선하려고 애쓴 흔적이 엿보인다. 은행 경영진에 견제 기능도 강화됐다.새 모범 규준은 즉각 시행에 들어가는 것이어서 2월 말~3월 초의 은행 주총 시즌에 적용 여부가 주목된다. 최근 KB국민은행과 금융 감독 당국 사이에 감정싸움처럼 비쳐진 갈등이 있었던 뒤라 은행들이 새 제도를 잘 수용할지부터가 관심거리다. 다만 국민은행의 일부 사외이사 활동에 상당한 문제점이 드러났던 터여서 모범 규준을 무시할 은행이 쉽사리 나올 것 같지는 않다.최근 은행 사외이사의 운용 방식에 문제가 드러났지만 획일적 강요 규정으로 과도하게 몰아붙인다면 감독 당국은 자칫 관치라는 비판에 직면할 가능성이 있다. 외환위기 이후 사외이사 중심의 이사회제도가 은행에 도입된 지 10년이다. 그 사이 변한 환경에 맞춰 제도를 보완할 수도 있지만 문제점이 불거진 게 단순히 제도 탓만은 아니다. 은행 경영진과 사외이사의 결탁에 원인이 있다고 본다면 운영의 묘를 살리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다. 다른 한 가지는 미국 백악관과 월가의 일전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단임에 그쳐도 좋다”며 월가 대형 은행들의 행태를 맹공격해 왔다.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업무 분리 방침이 대표적인데, 규제 법안은 만만찮아 보인다. 발 빠른 은행들은 정부에 고개를 숙이지만 간단히 끝날 싸움은 아닌 것 같다. 국가 면허 사업인 돈놀이에 천문학적 공적자금으로 쏟아 넣은 것이 미국 정부고, 가장 돈 되는 장사에서 쉽게 물러설 수 없는 게 월가의 최첨단 금융 업계인데 이들이 맞붙은 것이다.허원순 한국경제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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