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채 줄이기 비상…‘선수 팔아 빚잔치’

빚더미에 앉은 프리미어리그 명문 구단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6억5000만 파운드, 아스널 3억2000만 파운드, 리버풀 3억 파운드.’ 영국 축구 프리미어리그 명문 구단 이름 뒤에 붙어 있는 이 천문학적 금액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 돈 1조 원을 우습게 뛰어넘는 이 숫자들이 의미하는 것은 이들 구단들의 매출도 순이익도 아닌 바로 부채 규모다.지난해 딜로이트가 각 구단들의 회계 자료를 분석해 내놓은 2007~08 시즌 기준 프리미어리그 구단 전체 부채 규모는 이래저래 30억 파운드에 이른다. 우리 돈으로 5조 원을 훌쩍 뛰어넘는 수준. 새해 들어 영국 프리미어리그 명문 구단들이 이렇게 급증하는 부채를 줄이기 위해 발 벗고 나서고 있다.우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하 맨유) 구단이 새해 벽두 5억 파운드 채권을 발행해 채무 상환에 사용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지난해 금융시장 위축으로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올 들어서야 이러한 구상을 현실화하고 나선 것이다. 맨유 구단은 지난해 이자로만 4000만 파운드가 넘는 돈을 지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번 채권 발행 계획 발표에서도 맨유 구단의 정확한 현재 부채 규모는 포함되지 않았다. 지난해 자료를 토대로 추정해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맨유 구단의 채무 상태가 2008~09년 글로벌 금융 위기를 겪으면서 크게 악화됐다는 사실이다.5년 전 미국의 스포츠 재벌인 글레이저 가문은 맨유 인수를 위해 미국의 헤지 펀드로부터 막대한 대출을 끌어들였고 이 인수 대금과 이자를 갚기 위해 다시 보유 중이던 석유 기업의 지분을 다른 헤지 펀드에 매각한 바 있다.미국 풋볼리그(NFL) 탬파베이 뷰캐니어의 구단주이기도 한 맨유의 모기업 레드풋볼조인트벤처의 2008 회계연도 적자는 4320만 파운드. 전년도 적자 규모에 비하면 다소 줄었지만 여전히 갚아야 할 순이자만 6880만 파운드에 육박하는 실정이다.당초 글레이저 가문 측은 맨유 인수로 크게 늘어난 빚을 몇 년 안에 해결하기 위해 14% 이상의 연 이자로 현물 지불 방식의 대출 계약을 했다. 그러나 2008년 불어 닥친 글로벌 금융 위기로 이러한 계획에 차질이 빚어지게 됐다. 이번 채권 발행의 직접적 동기도 바로 이것이다.그러나 맨유의 재정 위기를 걱정하는 분위기가 감지되기 시작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해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레알 마드리드로 팔아넘긴 후 8000만 파운드라는 현금이 구단에 떨어졌다. 그러나 구단 주변에서는 이 돈을 구단의 채무 재조정에 사용할 것이라는 설과 신규 선수 스카우트에 사용할 것이라는 설이 엇갈려 나왔었다.그러나 그 후 이렇다 할 신규 선수 영입은 없었다. 비슷한 시기에 세르비아 출신의 17세 미드필더 아뎀 야이치를 영입하려는 움직임이 난관에 봉착하면서 의구심은 증폭됐다. 야이치의 소속팀 감독이 맨유가 재정 위기를 우려해 야이치의 영입을 포기했다고 공개적으로 밝히고 나선 것이다. 결국 호날두를 팔아 빚잔치를 벌였다는 말이 돌았다.빚에 허덕이기는 맨유뿐만이 아니다. 프리미어리그 1위 팀인 첼시도 맨유보다 훨씬 많은 7억 파운드가 넘는 부채를 짊어지고 있었다. 프리미어리그 구단 중 최고 액수다. 맨유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 부채의 대부분이 러시아의 부동산 재벌 출신인 구단주 로만 아브라모비치가 무이자로 구단 측에 대출해 준 것이라는 사실이다.이에 그치지 않고 구단주인 아브라모비치는 최근 첼시에 제공했던 자신의 무이자 대출을 출자 전환함으로써 사실상 이를 탕감해 주었다. 이 때문에 첼시는 무차입 경영을 선언하고 중·장기적 차원에서 재정 건전성을 확보했다고 발표했다. 또 실질적으로 지난해 6570만 파운드의 적자에 이어 올해 4440만 파운드의 적자를 기록하며 4년 연속 적자 폭을 줄이는데 성공하기도 했다.이렇게 프리미어리그 명문 구단들이 너도나도 채무 조정에 나서는 것은 안팎으로 점증하는 과다 차입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프리미어리그 구단들의 부채 규모가 총 30억 파운드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지자 무엇보다 영국축구협회(FA) 측이 우려를 표명하고 나섰다.로드 트리스만 FA 회장은 특히 첼시·맨유·아스널·리버풀 등 상위 랭킹을 차지하는 명문 구단들의 부채가 리그 팀 전체 부채 규모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점을 지적하고 나섰다. 특히 2008년 미국발 금융 위기가 겹치면서 프리미어리그 구단의 과도한 부채에 대해서도 경고등이 켜지기 시작했다. 제프 블래터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이 직접 우려를 표명하고 나서기도 했다. 실제로 금융 위기로 현금 흐름이 막히면서 리버풀이 스타디움 건립 계획을 유보하는 등 일부 구단들이 사업 계획을 수정하기도 했다.게다가 미셸 플라티니 유럽축구연맹(UEFA) 회장은 지난 2008년 심각한 부채를 지고 있는 구단을 오는 2012년부터 유럽 대항전에서 퇴출시킬 것이라고 발표했다. 프랑스 출신의 플라티니 회장은 과도한 부채 차입을 허용하지 않는 독일 기업의 시스템을 예로 들면서 영국 클럽들의 지나친 부채 경영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도 했다.팬들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영국의 전통적 축구팬들은 최근 프리미어리그 구단들을 짓누르고 있는 과도한 부채가 각 구단들의 발목을 잡아 결국 유명 선수의 영입을 꺼리게 되는 상황을 우려하고 있다.구단 부채와 거물급 선수 영입의 상관관계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스페인의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시키면서 맨유가 챙긴 8000만 파운드라는 액수를 구단의 대차대조표에 대입해 보면 당장 알 수 있다.맨유가 최근 밝힌 지난해 (6월 말 기준) 세전 수입은 4820만 파운드. 결국 호날두 한 선수를 포기함으로써 맨유는 3200만 파운드 적자라는 한 해 실적을 단번에 5000만 파운드 가까운 흑자로 반전시켜 버린 것이다.특히 맨유의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호날두의 이적료 4분의 3을 구단에 유보하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팬들로부터 유명 선수 영입에 미온적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퍼거슨 감독은 이러한 결정을 놓고 논란이 일자 ‘아직 다이아몬드를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라며 구단 측의 입김이 작용하지 않은 독자적 결정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팬들은 호날두 이적 후 추가 선수 영입에 적극 나서지 않는 퍼거슨 감독에 대해 탐탁하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최근 챔피언스 리그 16강 탈락 등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축구 명가’ 리버풀 같은 팀도 빚더미 때문에 추가 선수 영입에 어려움을 겪기는 마찬가지다. 스페인 출신의 리버풀 스트라이커 페르난도 토레스는 공개적으로 ‘선수 영입이 필요하지만 돈이 없다’고 밝히기도 했다.게다가 맨유는 물론 리버풀·첼시 등 부채 순위 상위에 랭크된 주요 구단들이 모두 미국·러시아 등 외국 자본 소유인 것도 영국 축구 팬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맨체스터 시티가 중동 오일 머니를 대표하는 아부다비 자본에 넘어가는 등 프리미어리그 구단들의 외국행 러시가 줄을 잇는 바람에 영국 축구팬들의 자존심은 상할 대로 상한 상황이다.각 구단들의 천문학적 부채 규모에 팬들은 물론 금융권과 정치권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잇따르자 프리미어리그 측도 재정 건전성 강화를 위한 보완 조치를 마련하고 나섰다. 프리미어 리그는 우선 각 구단에 대한 독립적 감사 시스템을 강화하고 소득세 미납이나 국민 연금 미납 여부를 매년 보고하도록 하는 새로운 규제 장치를 발표했다.또한 인기 구단에 대한 투자자 규정을 손질해 범죄나 사기 경력이 있는 투자자들의 참여를 배제하는 윤리 조항을 신설하기도 했다. 단순히 재정 감독만을 강화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신규 투자자 심사 요건도 강화해 영국 팬들의 정서도 어느 정도 감안하겠다는 것이다.그러나 이 정도의 ‘땜질 처방’이 이미 빚더미에 앉은 프리미어리그 구단들의 재정 상태를 호전시킬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또 중동 오일 머니를 비롯해 프리미어리그 구단 사냥에 들어간 거대 자본의 움직임을 늦추게 될 것 같지도 않다. 더 많은 스타플레이어 영입이냐, 재정 건전성을 위한 채무 조정이냐가 올해 프리미어 리그 구단들이 풀어야 할 가장 큰 숙제인 셈이다.성기영 영국 통신원(워릭대 국제정치학 박사과정) sung.kiyou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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