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되돌아볼수록 더 먼 미래 보인다

‘꼴찌’ 처칠을 키운 역사적 상상력 ‘로마’

인도에서 장교 복무를 시작한 윈스턴 처칠은 만년 꼴찌를 일삼던 10대 시절의 그가 아니었다. 그는 의욕적으로 인생을 새롭게 계획하기 시작했다. 군인으로서의 길은 간이역이었고 궁극적으로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 할아버지는 아일랜드 총독을 지냈고 아버지는 재무장관을 지냈다. 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길을 뛰어넘어 정치가로 성공하고 싶었던 것이다.그에게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늘 꼴찌였지만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하는 게 있었다. 다름 아닌 독서였다. 독서를 하면서 그는 정치가로서의 대변신을 준비해 왔던 것이다. 역사와 문학을 특히 좋아한 그는 먼저 에드워드 기번으로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그는 아버지가 기번의 역사 책 ‘로마제국쇠망사’를 애독하고 있었다는 것을 수없이 들었다.처칠은 아버지가 어느 페이지에 어떤 문장이 있는지조차 암기하고 있었으며 연설을 하거나 글을 쓸 때 큰 영향을 주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들은 아버지의 흉내를 내며 성장하고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노력한다”는 옛말은 처칠에게 그대로 적용된다. 처칠은 군복무 중임에도 불구하고 하루에 5시간을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를 탐독하는데 할애했다. 당시 그가 얼마나 기번에 빠져 있었는지는 그가 쓴 ‘나의 청춘기’에 나온다.“나는 당장에 그 이야기와 문장의 포로가 되었다. 나는 인도의 햇볕이 내리쬐는 긴 대낮에서 저녁 무렵까지 열심히 읽었다. 나는 자랑스러운 듯 끝에서 끝까지 탐독하고 완전히 만족감에 젖었다. 책 페이지의 여백에는 내 의견을 적어 넣었다.”‘로마제국쇠망사’는 처칠뿐만 아니라 인도 초대 총리 자와할랄 네루,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 등 세계의 리더들이 손에 꼽는 애독서다. 기번의 책은 장구한 세월에 걸친 로마제국의 역사를 죽어버린 과거로서가 아니라 여전히 살아 숨 쉬는 과거로 접할 수 있다.더욱이 이 책은 문학작품과 다름없는 유려한 문장과 인물의 성격묘사 등이 뛰어나다. 첫머리에 나오는 이 문장을 접하면 금세 가슴이 뭉클해져 온다.“지성에서는 그리스인보다 못하고, 체력에서는 켈트인이나 게르만인보다 못하고, 기술에서는 에트루리아인보다 못하고, 경제력에서는 카르타고보다 뒤떨어졌던 로마제국. 그런데도 세계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번영을 누린 이 고대국가가 오늘날까지 그 위대함이 바래지 않는 것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또 수십 페이지를 넘기면 이런 분석도 나오는데 위대한 리더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탄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로마의 쇠퇴는 제국의 거대함에서 비롯된 자연스럽고도 불가피한 일이었다. 번영이 쇠퇴의 원리를 무르익게 한 것이다. 정복 지역이 확대되면서 파멸의 원인도 증가했다. 그때 우연인지 필연인지, 인위적인 기둥이 제거되자마자 이 거대한 건축물은 자체의 무게 때문에 무너졌다.”에드워드 기번은 처칠과 닮은꼴 독서광이기도 하다. 기번은 아버지를 따라 책들이 가득한 도서관을 즐겨 드나들었다. 기번 역시 처칠의 경우처럼 역사에서 길을 찾았다. 기번은 역사를 자신에게 ‘꼭 맞는 음식’을 발견한 것에 비유했다. 그는 호라티우스·베르길리우스·테렌티우스·오비디우스 등을 탐독했고 동양사를 모두 섭렵했다. 스물일곱 살 때의 로마 여행은 기번의 인생을 뒤흔들었다. 로마의 건국신화가 숨 쉬는 카피톨리누스 언덕의 폐허에서 로마의 쇠퇴와 멸망에 관한 글을 써야겠다는 영감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다.기번은 무려 12년에 걸쳐 ‘로마제국쇠망사’ 6권을 1787년 탈고했다. 기번이 의욕적으로 로마사를 책으로 펴낸데 자극받아서인지 처칠도 ‘제2차 세계대전’을 썼고 그 책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처칠은 위대한 리더였을 뿐만 아니라 위대한 문필가이기도 하다. 역사가이자 문필가인 기번은 처칠의 역할모델이었던 셈인데 그 출발이 바로 ‘로마제국쇠망사’였던 것이다. 처칠의 독서는 기번에 이어 역사와 철학을 섭렵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토마스 매콜리의 ‘고대 로마의 노래’를 암기하고 ‘영국사’ 4권을 통독했다. 이어 플라톤의 ‘국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다윈의 ‘종의 기원’ 등 역사·철학·과학·경제서 등을 폭넓게 읽었다. 또한 처칠은 19세기 영국 의회에 발생한 논쟁과 정당 간의 갈등에 대한 역사를 정리한 ‘영국 연감(27권)’을 탐독하고 책에 이런 메모를 남겼다. “영국 연감은 사실을 나열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다면 날카로운 검으로 무장할 수 있을 것이다. 매콜리·기번·플라톤 등은 이 검을 가장 효과적으로 휘두를 수 있도록 근육을 단련시킨다.”독서를 통해 자신만의 ‘검’을 갖게 된 처칠은 ‘나의 청춘기’나 ‘말버러’ 등 자신과 선조의 전기를 썼을 뿐만 아니라 ‘세계의 위기(6권)’와 같이 시야를 확대해 1차 세계대전에 대한 폭넓은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 처칠은 책 집필을 통해 역사적인 사건을 돌아보며 역사 감각을 키울 수 있었다.풍부한 독서는 처칠을 행정의 달인으로 만들었다. 그는 서른한 살에 차관이 된 후 서른네 살부터 상무부 장관을 시작으로 내무부·해군부·군수부·육군부·식민부·재무부 등 7개 부처의 장관을 거쳐 총리를 두 번이나 지냈다. 또 아버지 랜돌프에 이어 재무장관을 5년 동안 역임했는데 영국 역사상 가장 수명이 긴 재무장관으로 기록된다. 늘 꼴찌여서 아버지로부터 구박을 듣던 그가 비로소 아버지를 뛰어넘은 것이다.“멀리 되돌아볼수록 더 먼 미래를 볼 수 있다.” 윈스턴 처칠이 남긴 명언 중의 하나로 그의 좌우명이기도 하다. 역사와 전기 책을 읽기 좋아했던 처칠은 수많은 역사적 사례들을 접하면서 누구보다 역사적 상상력이 풍부했고 글쓰기로 이어져 ‘세계의 위기’와 ‘제2차 세계대전’을 탄생시킨 것이다.처칠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리더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단점보다 강점을 더욱 계발한 데 있다. 그가 부모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하기 싫어한 라틴어나 수학 공부를 하기 위해 시간을 보내느라 좋아하는 영어와 독서에 열중하지 않았더라면 청사(靑史)에 이름을 남길 만큼의 위대한 리더가 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처칠의 강점을 강화해 준 사람은 바로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아들이 변호사가 되기를 원했지만 꼴찌를 일삼자 궁여지책으로 군인의 길로 이끈다. 윈스턴에게는 사관학교가 적성에 맞았다. 입학 후에는 중·고교 시절에 그를 괴롭혔던 라틴어나 프랑스어·수학 때문에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사관학교에서 배우는 과목은 전술·축성·지형학·군법·군정·교련·체조·승마 등이었는데, 특히 전술과 축성에 큰 흥미를 느꼈다. 윈스턴은 사관학교 입학 후에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난생처음 그는 남보다 뛰어나기 위해 노력했다. 샌드허스트 사관학교를 졸업할 때에는 150명 중 8위였다. 그야말로 대변신이었다.꼴찌 처칠의 대변신은 그가 좋아한 책을 통한 역사와의 대화에서 시작되었고, 그의 부친이 늘 암송한 ‘로마제국쇠망사’를 출발점으로 삼았다. 아버지와 역사와 독서가 그를 키운 자양분이었다. 처칠의 변신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그림을 500점이나 남기는 등 그림 그리기에도 일가를 이뤘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 것은 그 시간만큼은 ‘침묵’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즐길 수 있는 취미가 두 개 정도는 있어야 교양인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꼴찌에서 대변신한 처칠의 길에는 인간적이면서 위대한 리더의 길이 보인다.최효찬 자녀경영연구소장 / 문학박사 romai@naver.com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비교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향신문 기자를 거쳐 현재는 연세대 미디어아트연구소 전임연구원으로 강의를 하는 한편 자녀경영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5백년 명문가의 자녀교육’ ‘세계 명문가의 자녀교육’ ‘5백년 명문가, 지속경영의 비밀’ ‘아빠가 들려주는 경제 이야기 49가지’ ‘메모의 기술 2’ ‘한국의 1인 주식회사’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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