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시면 눈떠…20년 할 일거리 찾아야죠’

KT 떠난 6000명, 그들의 선택은

지난 1월 11일 오후 KT 우면동 사옥 2층 대강당은 뜨거운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좌석을 가득 채운 사람들은 설명 자료와 수첩을 꺼내 저마다 열심히 뭔가를 적는다. 강의는 오전 10시부터 계속됐지만 졸거나 지루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작년 말 회사를 떠난 퇴직자들을 대상으로 한 워크숍 첫날 행사다. 세밑을 떠들썩하게 했던 ‘KT 6000명 명예퇴직’의 주인공들이 처음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회사를 나온 지 10일 남짓한 때문인지 아직은 ‘실직’을 실감하지 못하는 표정들이다. 오히려 인생 후반기의 새로운 출발선에 섰다는 설렘과 흥분마저 느껴진다.이날 행사에는 당초 신청자보다 많은 320여 명이 참석했다. 1월 22일까지 워크숍 참석을 신청한 퇴직자 3200명을 대상으로 똑같은 행사가 전국을 돌며 열린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변화 관리와 재무 설계, 창업, 재취업, 4대 보험 등을 교육하는 1일 코스다. 퇴직 인원이 많다보니 부부 동반 1박2일이던 기존 퇴직자 프로그램을 하루짜리로 대폭 압축한 것이다.10분간 휴식 시간이 주어지자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꽃을 피웠다. 대부분은 오랜만에 만난 옛 동료들끼리 반갑게 안부를 묻는다. 워크숍에서 만난 배모(54) 씨는 “교육도 교육이지만 동료들의 소식이 궁금해 나왔다”며 “워낙 인원이 많고 갑작스러운 일이라 그동안 누가 나갔는지도 서로 몰랐다”고 말했다.지난해 12월 초 KT는 노동조합의 요청을 수용하는 형식으로 특별 명예퇴직을 실시하기로 합의하고 퇴직 신청을 받았다. 당초 3000명 수준을 예상했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이보다 훨씬 많은 5992명이 신청서를 냈다. 분기마다 있는 정기 명예퇴직의 ‘근속연수 20년 이상’ 기준을 15년으로 낮추고 명예퇴직금도 후하게 제시하자 좋은 조건으로 회사를 떠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판단한 직원들이 대거 손을 든 것이다. 이들 5992명의 신청자는 지난해 12월 31일자로 모두 퇴직 처리됐다. 국내에서 단일 명예퇴직으로는 사상 최대 기록을 갈아치웠다.5992명은 KT 전체 직원 3만7000명의 17%에 해당하는 엄청난 숫자다. 특별 명퇴 대상자로 범위를 좁히면 4명 가운데 1명꼴로 회사를 떠난 셈이다. 그러다 보니 팀원 10여 명이 한꺼번에 빠진 부서도 상당수다. 연령별로는 50대 65%, 40대 31%, 30대 4%로 50세 이상이 압도적이다.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만 26세에 입사했다면 41세부터 특별 명퇴 대상자가 된다. 30대 퇴직자는 고졸 입사자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작년 6월 합병한 옛 KTF(1997년 설립) 출신은 ‘근속 15년’ 기준에 걸려 이번에는 빠졌다.이번 대규모 명퇴는 2003년과 자주 비교된다. 민영화 이듬해인 그해 9월에도 KT는 근속 연수 기준을 15년으로 낮추고 위로금을 추가 지급하는 특별 명퇴를 노사 합의로 실시했다. 당시 무려 5505명이 명퇴를 선택해 회사를 떠났다.34년 경력으로 서울 시내 전화국 서비스운용팀의 차장급 팀장이던 배모 씨는 특별 명퇴 공고를 보고 2003년을 떠올렸다. “처음에는 제2의 인생을 개척할 준비가 아직 안 된 것 아닌가 고민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준비가 안 돼 있는 건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올해는 어떻게 넘겨도 내년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차라리 2003년 좀 더 젊었을 때 결단을 내렸다면 처음은 고통스럽지만 어쨌든 새로운 길을 열었을 것이라는 후회도 들었어요.”물론 손때 묻은 직장을 떠나는 결정이 쉽지는 않았다. 베이비붐 세대의 정년을 연장해야 한다는 여론도 나오는데, 더 버티자는 갑론을박도 동료들 사이에 벌어졌다. 그때마다 배 씨는 정부 대변인은 아니지만 청년층 실업 해결이 더 먼저 아니냐는 주장을 폈다. 꼭 이런 그럴싸한 명분이 아니더라도 배 씨는 인력 감축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는 쪽이다.“1986~88년 서울 시내 전화국이 두 배로 늘었어요. 그전에는 전화 한 통 신청하려면 줄을 서야 했는데, 그런 적체 현상이 사라졌지요. 1988년 올림픽 무렵에는 전화 가입자가 1000만 명을 돌파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거꾸로 인접 전화국을 통폐합해 3분의 1로 줄이고 있어요. 휴대전화에 인터넷 전화까지 등장해 집 전화를 쓰는 사람이 없어요. ‘신규 가입자가 계속 감소하니 인원 감축은 어쩔 수 없는 문제다, 대비해야 한다’고 조회 때마다 팀원들에게 이야기를 해와서인지 명퇴를 받아들이기 쉬웠어요.”배 씨는 요즘도 아침 6시면 눈이 떠진다. 알람을 꺼 놓았는데도 34년 동안 몸에 밴 습관은 쉽게 바꾸지 않는다. “집사람이 눈치 챌까봐 그대로 누워서 뒤척이다가 7시 30분쯤 일어납니다. 이웃과 마주칠까봐 신문도 조금 늦게 들여오죠.” 배 씨는 잠실 79㎡(구 24평) 아파트에 전세로 살고 있다. 강서구에 따로 사놓은 109㎡(구 33평) 아파트가 있다. 하나뿐인 아들은 대학 2학년을 마치고 군복무 중이다. 아들 제대 후 학자금이 당장 눈앞에 닥친 문제다. 아직 아들에게는 명퇴 사실을 알리지 못했다.배 씨는 재취업을 생각하고 있다. 지인들을 통해 통신 관련 기업으로 알아보고 있지만 아직은 연초라 인사만 하고 다니는 정도다. “이사급요? 요즘은 대기업에 있다가 나와도 그런 건 꿈도 꾸지 못합니다. 계약직이라도 감수해야죠. 집사람에게도 이제는 같이 뛰는 방법밖에 없다, 보험이든 뭐든 생각해 보라고 했어요.”이번 특별 명퇴자들은 평균 1억4000만 원을 명예퇴직금으로 받는다. 정년까지 잔여 연수와 직급에 따라 차이가 나지만 대략 2년치 연봉에 해당하는 액수다. KT 측은 기존 정기 명퇴의 퇴직금보다 3000만~5000만 원 높은 수준이라고 설명한다. 여기에 법정 퇴직금이 추가되지만 2002년 민영화 때 퇴직금 중간 정산을 했기 때문에 실제 받게 되는 퇴직금은 그리 많지 않다.25년 근속하고 부장으로 퇴직한 최모(51) 씨는 특별 명퇴금과 퇴직금을 합쳐 2억3000~4000만 원을 예상한다. 돈을 어떻게 운용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아직 돈을 못 만져봤다. 이번 주에 입금된다고 하더라”며 웃었다. 그는 주저 없이 “안정성이 최우선”이라고 말했다. 최근 금융사들은 KT 명퇴자들을 타깃으로 구애 작전에 열을 올리고 있다. 최 씨는 취재 중 걸려온 휴대전화를 받고 나서 “어떻게 귀신 같이 알고 은행에서 전화했다”며 “요즘 전화에 시달리는 사람이 하나둘이 아니다”고 말했다. 금융사들이 권하는 상품은 개인퇴직계좌(IRA)로 대동소이하다.최 씨는 줄곧 연구소에서만 근무해 왔다. 그러다 작년 법인사업부로 옮겨 1년 동안 영업을 뛰었다. “새로운 분야를 배우는 것이라 영업이 오히려 좋았어요. 사실 몇 년 더 영업을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아요. 그렇다고 집착이 남은 건 아닙니다.” 최 씨는 ‘자의 반 타의 반’ 퇴직을 선택한 경우다. 물론 스스로도 길어야 2~3년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때가 예상보다 빨리 닥친 것뿐이다. 최 씨는 군대를 마치고 대학 2학년에 복학한 아들과 고3짜리 딸이 있다.그는 아직 향후 계획을 세우지 못했다. 만나 본 친구들은 하나같이 ‘무작정 사업에 뛰어들지 말라’고 조언했다. 자신이 특별하게 잘하는 분야가 뭔지 먼저 찬찬히 생각해 보라는 충고도 들었다. “1~2년 할 일이라면 뭘 해도 상관없겠죠. 하지만 앞으로 15~20년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문제니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생각해요. 당장 서두르지는 않을 겁니다.”우선 날이 풀리면 산으로 여행을 다닐 생각이다. 먼저 머리를 비워야 새로운 것을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이날 워크숍을 준비한 곳은 KT 인재개발실의 ‘커리어디자인센터(CDC)’다. 2005년 전직 지원을 위해 탄생한 이 센터는 분기별로 퇴직자를 대상으로 생애 재무 설계 워크숍(1박 2일)과 창업 전문 교육(4박 5일), 재취업 전문 교육(3박 4일)을 실시해 왔다. 이번 특별 명퇴자들의 경우 인원이 많기 때문에 워크숍과 창업 전문 교육만 진행될 예정이다. CDC의 이강준 부장은 “창업 전문 교육 일정은 아직 구체적으로 정해지지 않았다”며 “지원자가 많으면 교육 횟수를 더 늘릴 수도 있다”고 말했다.좌석을 가득 채운 320여 명의 퇴직자들은 대부분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한 참석자의 말처럼 “1시간 지나면 다 도망치던 사내 교육 때와는 딴판”이다. 마지막 강의가 끝나고 밖으로 쏟아져 나온 퇴직자들은 섭씨 영하 4~5도를 오르내리는 추위 속으로 다급하게 뿔뿔이 흩어졌다.장승규 기자 skjang@kbizwee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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