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마다 추모행사 ‘풍성’ 조국은 ‘잠잠’

톨스토이에 무관심한 러시아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1828∼1910)가 사망 100주기를 맞았지만 정작 고국에서는 ‘잊혀진 영웅’이 되고 있다. 영국의 일간 가디언은 최근 “세계 각국에서 톨스토이의 100주기 기념행사가 열리고 있지만 정작 러시아에선 이 문학 천재에 대해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보도했다.가디언에 따르면 올해는 톨스토이 팬들에겐 멋진 한 해가 될 전망이다. 영국에선 톨스토이의 100주기를 기념해 톨스토이의 말년을 다룬 영화 ‘종착역’을 오는 2월 개봉할 예정이다. 헬렌 미렌, 크리스토퍼 플러머 등 영국의 실력파 명배우들이 대거 참여하는 ‘종착역’은 톨스토이가 모스크바에 있던 그의 대저택을 빠져나와 작은 시골 마을의 기차역장 관사에서 임종을 맞기까지의 상황을 극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미국과 독일에서도 ‘안나 카레니나’를 비롯한 그의 주요 작품이 새롭게 번역되고 있다. 쿠바와 멕시코에선 톨스토이를 주제로 한 북 페어가 추진되고 있다. 세계 각국에서 러시아 문서 보관서 속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보관 중이던 옛 필름을 복원, 톨스토이의 일대기를 재조명한 다큐멘터리를 제작 중이다. 그러나 정작 톨스토이의 모국인 러시아만은 아직 별다른 행사 계획을 내놓고 있지 않은 상황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가 변장한 채 몰래 옛 톨스토이의 농장을 잠행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을 뿐 크렘린의 공식 행사는 잡힌 게 없는 상황이다.가디언은 이 같은 톨스토이 무시 현상에 대해 “러시아 권력층이 톨스토이에 대해 불편한 시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입장에선 언제나 권위에 저항했던 톨스토이를 위험인물로 여기고 꺼린다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사랑이나 우정, 가족간 유대 관계 등 보편적이면서도 따뜻한 긍정적인 가치를 작품 속에서 강조해 왔다.푸틴 총리는 과거 대통령 시절을 포함해 각종 크고 작은 연설에서 톨스토이를 언급하거나 인용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톨스토이가 러시아와 적대 관계인 체첸에 대해 온정적 시각에서 보듬은 점도 러시아로선 껄끄러운 점이다. 작품 속에서 러시아의 압제 속에 고통받는 체첸인들을 변호하고 두둔했던 톨스토이는 체첸인들로부터 존경받는 드문 러시아인이다.이에 따라 체첸에는 톨스토이의 이름을 딴 ‘톨스토이유르트’라는 마을이 있을 정도다. 톨스토이가 러시아 정교회와 불편한 관계를 가졌던 점도 톨스토이 대축제를 가로막고 있다. 톨스토이는 대중의 고통을 외면하는 교회를 비판했는데 러시아 정교회 종무원은 1901년 ‘부활’의 일부 내용을 문제 삼아 톨스토이를 파문했고 2001년에는 파문을 재확인하는 등 양자 간 역사적 화해는 아직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보수적인 러시아 정교회 관계자 사이에서 톨스토이의 작품들은 여전히 ‘금서 목록’에 포함돼 있다. 여기에 러시아 국민들이 점차 책에서 멀어지고 있는 점도 톨스토이의 저평가에 한몫하고 있다. 과거 러시아인들은 온 국민이 푸슈킨의 시를 암송할 정도로 책을 많이 읽었지만 사회주의 붕괴 이후 사람들이 책보다 화려한 방송과 인터넷 등 시각 정보에 의존하는 경향이 높아진 것이다.일각에선 역설적으로 러시아 교육과정에서 어린 학생들에게 톨스토이를 의무적으로 읽게 하는 것이 사람들과 톨스토이의 간격을 넓히고 있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과거 사회주의 시절, 톨스토이는 로마노프 왕조의 부패와 필멸을 내다본 예언자로 도식적으로 해석됐고 그에 따라 학생들은 의무적으로 편향된 방향으로 톨스토이를 읽도록 강요받았다. 사회주의 붕괴 후에도 소녀들은 각종 하이틴 러브스토리에, 소년들은 전쟁놀이에 더 관심이 많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15세 청소년들에게 ‘전쟁과 평화’같은 어려운 작품들을 필수 교과목으로 강요하고 있는 형국이다. 100주기를 맞은 러시아 대문호가 이처럼 고향에서 푸대접을 받는 처지에 대해 19세기 러시아 문학 전문가인 루드밀라 사라스키나는 “톨스토이는 보호받을 필요가 있다”며 “톨스토이는 자신이 살아있을 동안 비판해 마지않았던 러시아 내 반동적 세력들로부터 죽은 뒤에도 끊임없이 공격받았는데 이제 러시아인들은 도덕적·지적으로 톨스토이를 떠받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김동욱 한국경제 기자 kimd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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