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와 잡스의 실패
미국의 노동절 휴일(9월 7일)이었던 9월 두 번째 주. 미국에서는 두 명의 유명 인사 연설이 정·재계의 관심을 끌었다.한 명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었고, 다른 한 명은 미국의 컴퓨터 업체인 애플의 스티브 잡스 최고경영자(CEO)였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관심의 대상인 이 두 사람은 이번엔 엉뚱하게도 각자 행사에 ‘실패’(?)한 인물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명연설가로 미국 어린이들의 발표력 연습(speech exercise) 롤모델이 되고 있는 오바마 대통령은 연설을 잘하고서도 연설 내용을 국민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데는 실패한 케이스.연설 도중 엉뚱한 사고가 나면서 국민들의 관심이 분산됐기 때문이다. 사고는 잘 알려진 대로 지난 9월 9일 오바마 대통령의 의료 개혁 관련 상·하원 합동 연설 때, 공화당의 조 윌슨(사우스 캐롤라이나 주) 하원의원이 오바마 대통령을 향해 “당신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You lie!)”고 고함을 친 일이다.윌슨 의원은 오바마 대통령이 “건강보험 개혁으로 보험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각지대가 해소되더라도 불법 이민자에게는 혜택이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대목에서 발끈하면서 고함을 쳤다.발언의 파장은 예상외로 컸다. 대통령의 상하원 합동 연설에서 참석 의원이 이처럼 대통령을 대놓고 비난하는 것은 좀처럼 드문 일. 이 때문에 오바마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연설을 듣고 있던 공화·민주당 의원들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고 뉴욕타임스 인터넷판은 전했다.백악관은 연설 직후 공화당 지도부에 항의했고 인터넷에서 비난 여론이 비등해지자 윌슨 의원은 성명을 내고 “내 발언은 부적절하고 유감스러운 것이었다”며 즉각 사과했다. 오바마 대통령도 “누구나 실수하게 마련”이라며 사과를 받아들였다.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은 “윌슨 의원 문제가 아니라 이제 건강보험 개혁 문제에 집중할 때”라며 대통령의 판단에 지지를 표시했다. 이에 따라 윌슨 사태는 일단락되는 듯했다.그러나 민주당 지도부가 9월 10일 하원 본회의장에서 윌슨 의원에게 동료 의원들에게 공식 사과할 것을 요구하면서 상황이 꼬이기 시작했다. 민주당 지도부는 윌슨이 이를 거부할 경우 윌슨에 대한 비난 결의안을 채택하겠다고 경고했다. 이에 대해 윌슨은 “사과는 한 번으로 족하다. 나는 사과만 하는 사람이 아니다”고 거부했다. 그의 부적절한 언행이 다시 정치 쟁점화하는 순간이다.확실히 미국인들은 오바마 연설 이후 케케묵은(?) 건강보험 개혁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기보다 윌슨이 앞으로 어떻게 처신하는 게 현명한지를 놓고 얘기하기를 더 좋아하는 것처럼 보인다.의료 개혁의 당위성이나 재정 부담 등 본질적인 문제는 쟁점화하지 못한 채 연설 과정에서 벌어진 가십성 발언이 더 관심을 끌고 있는 상황이다. 결국 건강보험 개혁 이슈를 상·하원 합동 연설을 통해 본격적으로 제기해 건강보험 개혁의 모멘텀을 찾으려고 했던 오바마로서는 큰 타격을 입게 된 셈이다.공화당은 “윌슨 의원의 고함은 잘못된 시기와 장소”에서 나왔다면서도 “그가 우려한 것은 정당한 것”이라는 입장이다. 이에 따라 민주당의 비난 결의안 채택 과정에서 격론이 예상된다.논쟁의 한복판에 서 있는 윌슨은 ‘스타’가 될 조짐이 엿보인다. 9월 12일 워싱턴에서 열린 대규모 건강보험 개혁 반대 시위 때 윌슨 의원이 외쳤던 고함 “거짓말”이 시위 구호로 등장했고 건강보험 개혁 반대자들이 그에게 낸 기부금도 100만 달러를 넘어섰다고 CNN 방송이 보도했다.같은 날 미국 서부 샌프란시스코 마스코니 컨벤션 센터에서도 또 하나의 실패(?)한 행사가 치러지고 있었다. 이날 행사는 애플의 연례 신제품 출시 이벤트였다.그러나 이날 행사장엔 ‘신제품’이 없었고 오직 잡스만 있었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언론의 관심은 11개월이라는 오랜 기간의 공백기를 마치고 공식 석상에 처음 모습을 보인 스티브 잡스 CEO의 건강 상태에 온통 쏠려 있었다. 신제품은 처음부터 관심거리가 아니었다.쉽게 말해 애플을 현재 위치에 끌어올린 잡스가 어떤 건강 상태에 있고, 얼마나 오랫동안 일할 수 있을지가 중요할 뿐 제품 자체는 부수적인 사항이라는 것이다.블룸버그통신을 비롯한 주요 신문·방송과 블로거들은 잡스가 등장한 ‘애플 이벤트’를 실시간 생중계하면서 큰 관심을 보였다.잡스가 이날 모습을 나타낸 시간은 불과 수분에 불과했다. ‘그’가 무대에 올라서자 청중은 모두 일어나 우레와 같은 함성과 박수를 보내며 뜨겁게 환영했다. 이날 잡스는 트레이드마크인 청바지와 검은색 터틀넥 셔츠를 입고 시종 밝은 표정이었다. 그는 그의 건강과 관련된 우려를 의식한 듯 대부분의 시간을 그의 건강 상태를 설명하는데 할애했다.그는 “나는 지금 꼿꼿이 서 있다. 나는 다시 애플로 돌아왔고 일상의 모든 순간을 사랑한다(I’m vertical, I’m back at Apple, loving every day of it)”고 강조했다.하지만 뼈마디 하나하나 셀 수 있을 정도로 깡말라버린 손가락과 약간 갈라진 목소리는 그가 완전히 병에서 회복되지 못했다는 판단을 내리기에 충분했다.이날 애플 주가는 잡스 소식으로 천장과 바닥을 왔다 갔다 했다. 연중 최고치를 경신했다가 전날보다 1%로 떨어진 가격에 장을 마감했다. 업계 전문가들은 주가가 연중 최고치까지 오른 이유를 잡스가 돌아왔다는 팩트 자체로 설명했다. 그러나 그가 예상보다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확인되자 다시 곤두박질쳤다.그는 소문으로 돌던 자신의 간이식 수술에 대해 입을 열었다. 그는 “간이식 수술을 받았고 의사가 살을 30파운드 정도 좀 찌워야 한다고 해서 아이스크림을 미친 듯이 먹고 있다”고 말했다.수술 관련 잡음에 대해서도 해명했다. 그는 “교통 사고로 숨진 20대 중반의 기증자로부터 간을 받아 수술받았다”며 “장기 기증자의 관대함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모두 장기 기증자가 돼 달라”고 행사 참석자들의 감성에 호소하기도 했다.그러나 이날 행사장에는 ‘창조와 혁신 경영의 전도사’로 불리는 잡스의 귀환에 어울릴만한 신제품은 찾아볼 수 없었다. 신제품이라고 할 만한 것은 비디오카메라 기능이 첨가된 MP3 플레이어 ‘아이팟 나노’가 전부.또 굳이 들자면 애플 온라인 음악 상점을 이용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 ‘아이튠즈’의 업그레이드 버전 정도랄까? 과거엔 컴퓨터로 온라인 음악 상점에 들러 파일을 다운받아 듣기만 했다면 새로운 소프트웨어를 이용하면 음반의 표지 디자인이나 가사의 의미, 곡의 배열 등에 대한 설명도 들을 수 있다. 소비자에게 디지털 ‘청취’만이 아닌, 아날로그적 ‘경험’을 하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정보기술(IT) 업계 전문가들은 잡스의 경우 이번 행사의 의미나 비중을 잘 알기 때문에 고의적으로 신제품 발표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정도 내놓고 있다. 어차피 이번 행사는 자신에게 포커스가 맞춰질 것이므로 신제품 본격 출시는 다음 행사로 순연하는 전략이 옳다고 판단했다는 추정이다.오바마의 경우도 윌슨의 해프닝이나 반대파의 공세가 걸림돌이 되고 있지만, 그의 말처럼 ‘건강보험 개혁에 나서는 마지막 대통령’이 될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공화·민주 양당 간에 극적인 합의 도출이 가능하다는 얘기다.잡스와 오바마는 같은 시대에 이미 ‘전설’이 된 인물들이다. 잡스는 1976년 스물한 살의 나이에 애플을 창업해 세계 첫 개인용 컴퓨터를 비롯해 아이팟, 아이폰, 아이맥 등 메가 히트 제품들을 선보이면서 자신의 회사를 세계 최고의 IT 업체로 확고하게 자리 매김했다. 오바마는 미 역사상 첫 흑인 대통령으로 국민들에게 ‘담대한 희망’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그는 미국 역사상 가장 어려운 정책이라는 평가를 듣고 있는 건강보험 개혁의 성공이라는 또 다른 도전에 나서고 있다.두 사람은 모두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치밀하고 집요하다는 점이 닮았다. 두 사람이 각자의 걸림돌을 극복하고 어떤 성과를 보여주게 될지 주목된다. 박수진·한국경제 기자 notwom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