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퉁 라세티’ 충격…전 분야 확산

위험 수위 다다른 산업스파이 실태

산업스파이 문제는 이제 국내에서도 액션 영화의 단골 소재로 등장할 만큼 일반적이다. 지난 4월 개봉한 영화 ‘7급 공무원’은 국내 잠입한 산업스파이와 이를 막으려는 국가정보원 직원들의 활약상이 큰 줄거리를 이룬다. 한강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쫓고 쫓기는 총격전은 손에 땀을 쥐게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런 일은 불가능하다. 국정원의 수사권은 대공 분야에만 한정돼 있기 때문이다.그렇다고 이 영화가 완전한 허구인 것만은 아니다. 외부에 노출되지는 않지만 국정원은 산업 기술 보호의 최전선에 서있다. 국내에서 터진 해외 기술 유출 사건은 대부분 초기에 국정원의 레이더망에 걸린 것들이다. 국정원이 광범위한 자료 수집과 제보, 모니터링을 통해 첩보를 생산해 넘기면 검찰이 이를 토대로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하는 것이 일반적인 패턴이다.최근 업계를 벌컥 뒤집어 놓은 GM대우 라세티 기술 유출 사건도 지난 1월 국정원이 넘긴 첩보로 수사가 시작됐다. 이 사건은 전직 GM대우 연구원들이 준중형 승용차 라세티의 설계 기술을 ‘통째’로 빼냈고 이를 활용해 러시아 자동차 회사가 현지에서 ‘짝퉁’ 모델을 버젓이 출시해 큰 충격을 줬다. 국정원은 3년 전인 2007년부터 이번에 문제가 된 타가즈코리아를 주시해 왔다. 그해 5월 터진 현대·기아차 조립 기술 중국 유출 사건을 계기로 자동차 분야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국정원의 정보망에 이 업체가 떠오른 것이다.지난 2006년 설립된 타가즈코리아는 GM대우 연구원들을 대거 영입해 신차 개발에 뛰어들었다. 모회사인 타가즈(TagAZ)는 러시아 서남부 타간로그에 본사를 둔 러시아 4위 자동차 기업으로 현대차 조립 생산을 주력으로 해 온 곳이다. 그러다 자국 시장의 70%를 외국 자동차 회사들이 장악하고 있는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러시아 정부가 자체 모델 개발을 독려하면서 이 업체도 신차 개발에 나선 것이다. 사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다지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러나 국정원은 막 설립된 이 업체의 신차 개발 속도가 상식을 훨씬 뛰어넘는다는 데 주목했다. 타가즈코리아는 설립 두 달 만인 그해 7월 엔진 개발에 들어갔고, 2007년 1월에는 차체와 섀시 개발을 시작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개발 착수 2년여 만인 지난 3월 러시아 현지에서 독자 개발 첫 모델 C-100을 공개했다.이런 초스피드 신차 개발의 비밀은 이 회사로 옮긴 전직 GM대우 연구원들이 빼낸 기술 자료에 있었다. 검찰 수사 결과 고위급 연구원 두 명이 수천 장의 설계 도면과 기술 표준 문서를 외장형 하드디스크에 담아 들고 나왔다. 검찰은 러시아에서 출시된 C-100을 훔친 기술로 만든 ‘짝퉁 라세티’로 단정하고 있다.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보통 신차 개발비용을 2000억~5000억 원으로 잡는다”며 “하지만 이는 직전 단계의 기술을 갖추고 있는 기업의 경우”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수출시장 잠식 효과까지 감안하면 이번 사건의 실제 피해 액수는 수조 원대에 달할 것으로 추산한다.라세티는 GM대우를 위기에서 구해낸 주력 수출 모델이다. 한국자동차공업협회가 지난 2005년부터 올 7월까지 수출 실적으로 집계한 결과 라세티보다 수출 대수가 많은 모델은 현대차의 투싼 하나뿐이었다. 지난해 라세티 프리미어가 나오면서 국내에서는 단종됐지만 GM 시보레 브랜드를 달고 여전히 동유럽과 인도 등지로 활발하게 수출되고 있다.2000년 이후 급증한 기술 유출 사건은 한동안 반도체, 휴대전화, 디스플레이 등 첨단 정보기술(IT) 분야에 한정된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제는 자동차에서 조선·철강까지 분야를 가리지 않고 확산되고 있다. 지난 2003년 6건에 불과했던 해외 기술 유출 사건은 지난해 42건으로 7개 증가했다. 같은 기간 피해액도 13조9000억 원에서 79조8000억 원으로 5.7배 늘어났다. 하지만 이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뿐이다. 이 통계는 국정원 산업기밀보호센터가 집계한 해외 유출 사례에만 한정돼 있기 때문이다. 한국산업기술보호협회 권태종 기술보호팀장은 “국내 기업들 간에 벌어지는 산업스파이 사건은 통계조차 없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더구나 상당수 기업이 회사 이미지 때문에 기술 유출 사건이 공개되는 것을 꺼린다.라세티 사건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최근 산업스파이 사건은 조직화·대형화 추세를 보인다. 자동차 같은 대형 장치산업의 경우 단독으로 1~2개 기술을 빼내서는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기술 유출 사건이 빈발하면서 대기업들은 과거 단일 조직이던 연구소를 여러 개의 팀으로 쪼개 운영하고 있다. 권 팀장은 “대기업 기술 유출 사건은 한 번 터지면 수많은 전·현직 연구원이 줄줄이 연루된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수개월에서 수년에 걸쳐 순차적으로 기술을 빼돌리는 수법이 일반적이다.올 들어서도 거의 매달 언론을 장식할 만큼 산업스파이 사건이 급증했지만 가담자에 대한 처벌은 여전히 관대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피해 기업과 관련자의 합의로 흐지부지되는 경우가 적지 않고 막상 재판에 가도 집행유예로 그치는 경우가 상당수다. 기술 개발에 사활을 건 기업이 입는 막대한 피해나 국가 경쟁력에 미치는 악영향을 고려하면 중범죄라고 할 수 있지만 대개 석·박사 이상의 엘리트인데다 초범이고 미수로 그친 경우가 많다 보니 이런 일이 벌어진다.남상봉(46) 서울북부지검 형사2부장검사는 검찰 내에서 ‘산업 스파이 전문가’로 손꼽힌다. 일선 검사 시절 맥슨텔레콤 GSM 휴대전화 제조 기술 중국 유출 사건, 삼성SDI 다면취 공법 대만 유출 사건 등 굵직한 산업스파이 사건을 도맡아 수사하며 이름을 날렸다. 그 후 정통부 정보통신법률자문관을 거쳐 작년까지 대검찰청 디지털 수사담당관을 지냈다.2000년대 초반부터 해외 기술 유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본격적인 수사에 나서 큰 성과를 거뒀다. 주로 IT 분야였는데 이미 그때 기술 유출이 전 산업 부문으로 확산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돈이 되는 곳에 산업스파이가 몰리게 마련이다.중국이나 러시아 후발 기업이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2004년 주성엔지니어링 사건은 미국 기업이 국내 업체에 특허침해소송을 내기 위해 자료를 빼낸 경우다. 선진 기업도 국내 기업을 견제하기 위해 기술 유출을 시도한다.첨단 분야가 많아 기술 자체를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다. 영업 비밀성에 대한 법률적 판단을 해야 하는데, 이 부분에 객관적 진술을 해 줄 참고인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결국 사람에 의해 벌어지는 문제다. 투명한 인사 제도, 철저한 핵심 인력 관리, 지속적인 윤리 교육 등 삼박자가 갖춰져야 한다. 기술 유출 사건은 한 번 빠져나가면 대책이 없다.장승규 기자 skjang@kbizwee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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