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부처 24시
한국은행은 정책 목표를 ‘물가 안정’으로 못 박고 있다. 금융시장 안정은 금융감독원의 몫이다.한은의 역할이 지금과 같이 정립된 것은 지난 1997년 한은법 개정 때였다. 당시 국제통화기금(IMF)이 우리나라에 돈을 빌려주는 대신 요구했던 사안 중 하나가 한은의 독립성 보장이었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돈의 가치 안정을 누구보다 바라기 때문이다. 정부가 다른 정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인플레이션을 방치하면 돈의 가치가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염려한 것이다. 이 때문에 한은의 역할을 물가 안정에 묶은 것은 동시에 한은의 독립성을 보장하는 것과 같은 뜻이었다.외환위기 당시 한은의 위상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취약했다. 1997년만 하더라도 금융통화위원회 의장을 재무부 장관이 겸하고 1998년 한은법이 개정된 뒤에야 한은 총재로 바뀌었다. 그리고 한은은 법 개정과 동시에 금융감독원에 금융회사에 대한 직접 조사권도 같이 넘겨줬다.이렇게 11년 세월이 흐른 지난해 말, 한국은행의 설립 목적에 물가 안정뿐만 아니라 ‘금융시장 안정’ 역할을 명시하고 ‘금융회사에 대한 조사권’을 부여하는 내용의 한국은행법 개정 논의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미국발 글로벌 금융 위기가 세계를 덮치면서 미국 일본 등 주요국 중앙은행이 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는 가운데 한은 역시 권한과 책임을 강화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 것.이에 대해 감독 당국과 정부는 반대 입장을 보였다. 감독 당국은 사실상 중복 감독으로, 통합금융감독 기구가 있는 현행 감독 체계에 근본적으로 어긋난다며 강력히 반발했고, 한은이 직접 검사권을 갖게 되면 피감 기관인 금융회사의 부담만 가중될 것이라는 우려도 강하게 제기됐다.한은의 역할을 ‘물가 안정’에 ‘금융시장 안정’을 더하게 되면 한은법 전체를 뜯어고쳐야 하는 부담도 있다. 한은법 제1조 목적조항은 국내 물가가 외부의 다른 목적으로 활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한은의 독립성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금융시장 안정’을 덧붙이면 금융 안정이라는 목적이 물가 안정을 해치게 될 가능성도 존재한다.게다가 한은이 감독권을 갖게 된다면 정부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행정부서처럼 재정부의 구체적인 예산 통제를 받고 정부의 인사 지휘를 받아야 할 수도 있다. ‘독립성’을 외치던 한은 입장에서도 이런 부분은 정작 자신들의 요구 사항과 배치된다.법 개정에 대한 논란이 들끓자 나온 중재안이 ‘한은법 태스크포스(TF)’를 만드는 것이었다. 정부는 한은법 개정을 위해 청와대 국민경제자문회의 산하에 ‘한은법 TF’를 만들었고 국회에 제출할 법 개정안의 초안 작성을 8월 중순께까지 마칠 예정이었다. 하지만 9월 들어서도 법 개정안 초안이 나오지 않는 것은 이미 기획재정위에 또 다른 한은법 개정안을 상정해 놓은 국회의 반발 때문이다.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경제소위는 지난 4월 국회에서 △한은 설립 목적조항에 금융 안정을 명시하고 △한은에 금융회사 서면·실지 조사권을 부여하는 등 금융 안정 기능 부여에 따른 권한을 강화하는 내용의 한은법 개정안을 의결한 바 있다.반면 한은법 TF의 개정안은 한은의 설립 목적에 ‘금융 안정을 도모한다’는 내용을 추가하는 것 외에는 의원입법안과 모두 다른 결론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은행들을 대상으로 한 단독 조사권도 주지 않도록 했다. 한은의 금융 정보 수집은 현재 추진 중인 정보 공유 양해각서(MOU)를 활용하자는 입장이다(금감원과 한은은 이달 말 금융 정보 공유 확대에 관한 MOU를 맺을 예정이다).이 같은 TF 측의 논의 방향에 대해 금융위와 금감원은 대부분 자신들의 의견이 반영됐다며 환영한 반면 한은 측은 국회에서 재논의해야 한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당사자인 금감원과 한은은 직접적인 언급을 삼가고 있는 상태다.한 재정부 관계자는 “사실상 정부 입법을 주도하고 있는 재정부로서는 TF에서 이미 결론난 내용을 틀 수도 없고, 그렇다고 국회의원들의 몽니를 보고만 있을 수도 없는 갑갑한 상황”이라고 말했다.박신영·한국경제 기자 nyus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