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적자 ‘눈덩이’…국방·외교 예산 ‘뚝’

흔들리는 대영제국의 ‘소프트 파워’

‘해가 지지 않았던 나라 영국은 결국 서산으로 저물고 말 것인가.’지난해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영국 경제 위기론이 끊임없이 대두되고 있다. 한때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신청설이 나돌기도 했고 ‘영국발 금융 위기가 현실화할 경우 한국이 가장 큰 타격을 입을 것’이라는 시나리오를 담은 보고서가 나오기도 했다.특히 미국 쪽 언론들은 영국 경제 위기설을 증폭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시사주간지 타임은 “1970년대 ‘유럽의 병자’로 불렸던 영국이 ‘세계의 병자’가 돼가고 있다’고 지적했고 뉴스위크는 “대영제국(Great Britain)에서 ‘대 (Great)’ 자를 떼어버릴 때가 됐다”고 꼬집었다.영국이 글로벌 금융 위기에 봉착한 다른 선진국에 비해 후폭풍이 거센 이유는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 번째 이유는 두말할 것도 없이 18세기 이후 ‘금융 강국’ 영국을 지탱해 온 축인 런던 금융시장이 글로벌 금융 위기의 직격탄을 맞았기 때문이다.영국의 제조업 비중은 전체 산업의 20%를 채 넘지 못한다. 반면 외환시장은 일평균 거래량으로 따져볼 때 세계 전체 시장의 30%를 웃돈다. 외국 주식 거래와 파생상품 거래 역시 40% 이상을 점유하고 있다.헤지 펀드와 파생상품 등을 적극적으로 유치하기 위한 과감한 탈규제 정책으로 월스트리트에 맞먹는 금융 중심지로 떠올랐던 런던 금융시장이 이제는 반대로 새로운 금융 감독 시스템의 출현과 함께 위축될 운명에 처한 것이다.유럽연합(EU)은 최근 금융 위기 재발 방지를 위한 리스크 관리 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합의한 바 있다. 이 위원회는 런던 금융시장을 포함한 유럽 내 금융시장의 건전성 감독을 맡게 된다.파운드화를 사용하는 영국은 유로존(euro zone)에 소속돼 있지 않고 이 위원회의 구성 책임을 진 유럽중앙은행 참가국도 아니다. 이런 이유로 과거에는 EU 차원의 규제 강화 움직임에서 한발 물러나 있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사정이 달라 보인다. 최근 글로벌 금융 규제 흐름을 주도해 온 프랑스와 독일의 입장이 그 어느 때보다 강경하기 때문이다. 최악의 시나리오 중 하나는 런던 금융시장의 탈규제 정책이 이번 금융 위기의 여파로 뒷걸음질하면서 각급 금융회사들이 홍콩과 싱가포르 같은 시장으로 탈출을 모색하는 상황이다. 물론 이런 움직임이 현실화할 가능성이 아직 높지는 않지만 최근 일련의 규제 강화 움직임이 영국 경제의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요인 중의 하나인 것만은 분명하다.또 다른 이유는 복지 시스템의 문제다. 영국은 여전히 보건 의료, 교육, 고용 등 분야에서 공공 부문의 비중이 대단히 높다. 전 국민 무료 건강보험 시스템의 골격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고 국가 재정 부담에 의한 의무교육은 만 4세부터 시작된다. 이러한 영국 사회 경제 시스템의 구조상 경기 침체를 이유로 공공 서비스를 줄일 수는 없다.반면 경기 침체로 이러한 복지 시스템의 근간을 이루는 세수 비중이 걷잡을 수 없이 줄어들고 있다. 이미 법인세 세수는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40% 가까이 곤두박질쳤고 개인 소비세와 부가가치세도 각각 13%와 18%씩 줄어들었다.반면 실업수당 지출은 10% 이상 늘었다. 영국의 실업자 숫자는 현재 240만 명에 이르고 있으며 올 연말까지는 300만 명에 이를 것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공식 실업률로도 이미 7%를 넘어섰다. 1997년 7월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게다가 부실은행 국유화와 부실채권 정리에 쏟아 부은 천문학적 규모의 공적 자금 역시 재정 악화를 부추기고 있다. 줄어드는 세금으로 늘어나는 공공 지출을 부담하기 위해서는 출혈을 감수하고라도 적자재정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이런 이유로 영국의 공공 부채가 경제의 미래를 짓누르는 폭탄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영국 정부의 부채 총규모는 이미 8000억 파운드(약 1600조 원)로 국내총생산(GDP)의 56%를 넘어섰다. 웬만한 고속성장 개도국보다도 높은 수준을 부채를 걸머지고 있는 셈이다.감당하기 어려운 재정적자 누적으로 인한 여파는 경제 분야에만 그치지 않는다. 18세기 이후 영국이라는 국가 브랜드를 지탱해 온 힘은 경제뿐만 아니라 외교와 국방 분야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영국은 여전히 전 세계적으로 국방비를 가장 많이 지출하는 나라 중 하나다. 영연방 국가들과의 유대는 물론 과거 식민지 국가들에 대한 개발 원조 등을 포함해 외교 분야 예산 지출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그런데 재정적자로 인해 외교와 국방 예산의 대폭 삭감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아직 정부가 이를 공식화한 것은 아니지만 민간 싱크탱크에서는 벌써부터 국방비 삭감 시나리오들이 등장하고 있다. 특히 2024년까지 유지하기로 한 핵잠수함의 무기 체계를 개선하는 데 수십억 파운드가 들어갈 예정이어서 이 차세대 핵잠수함 사업의 지속 여부를 놓고도 논란을 거듭하고 있다.외교 분야 역시 마찬가지다. 영연방 관련 업무를 외교부가 통합 운용하면서 방대한 해외 공관과 외교 인력을 운용해 오던 영국이 지난 2004년부터 일부 국가에서 외교 공관을 축소하거나 주재 외교관 숫자를 줄이는 ‘살빼기’ 작업에 들어갔다. 내년도 외교 예산이 올해 대비 20% 이상 축소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이러한 관측이 현실화할 경우 영국의 ‘하드 파워’뿐만 아니라 ‘소프트 파워’마저도 위협받는 상황이 머지않아 도래할 수도 있다. 뉴스위크의 지적처럼 ‘대영제국의 종말’을 예측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소프트 파워’의 몰락 조짐에 더욱 주목하고 있다.그러나 ‘영국 경제 위기론’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우선 영국 경제의 실물 지표들이 3분기부터는 상승 국면으로 전환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영국 회계연구원은 2분기에 0.8% 축소를 기록한 영국 경제가 3분기부터는 0.5% 정도 성장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기업인들을 상대로 한 조사에서도 영국 경기 침체가 끝나가고 있다는 응답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정부는 올해 초 내수 경기 진작을 위해 부가가치세를 인하했고 최근에는 영국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위원회가 무려 50억 파운드에 달하는 자금을 시장에 투입하기로 한 바 있다. 중앙은행의 개입 규모는 당초 시장에서 예측했던 금액의 두 배에 이르는 규모다. 최근 경기 회복 신호는 이런 시도들이 일단 시장에서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영국 재무부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이 경기 반등 시점을 올해 말로 예상했던 것을 감안하면 예상보다 빠른 회복 신호를 보이고 있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최근 경기 회복 조짐은 글로벌 경제의 상승 반전 움직임에 힘입은 바 크지만 영국으로서는 그동안 빠르게 확산되던 영국 경제 위기론을 일단 잠재울 수 있는 호재인 것만큼은 분명하다.버블 논란에 휩싸였던 부동산 시장도 올해 상반기부터 완만한 회복세로 돌아서고 모기지 승인율이 상승한 것도 긍정적 요인 중 하나다. 무엇보다 부동산 시장에서 숨죽였던 거래가 활성화됨으로써 세수 진작에 기여하는 바도 적지 않을 것으로 기대된다.그러나 이런 단기적 회복 기조에도 불구하고 장기적 전망은 여전히 불투명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 국립경제사회연구소는 영국 경제가 금융 위기 이전인 2008년 초 수준으로 1인당 GDP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6년이 더 걸릴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게다가 7월 한 달 내내 영국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개전 이후 최고의 사상자를 내면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렇지 않아도 심각한 재정적자라는 핵폭탄을 끌어안고 있는 영국 정부로서는 아프간 전쟁 승리를 위해 더 큰 재정적 출혈을 감수해야 할 것인지를 놓고 깊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글로벌 금융 위기 발발 이후 영국을 괴롭혀 왔던 경제 위기설은 수그러들었다기보다는 잠시 잠복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듯하다.성기영·영국 통신원(워릭대 국제정치학 박사과정) sung.kiyou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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