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신과 도전의 의미 일깨워 주시다

어머니의 사랑이 끝이 없는 것 같다면, 아버지의 사랑은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 보인다. 어려운 일을 맡기고도 아버지는 늘 “일이 되는 방향으로 힘써 보라”고 짤막한 엄명을 내리시곤 한다.“네 모험심은 아버지한테서 왔구나.”미국 연수 시절, 연방법원 판사와 점심을 들면서 아버지가 로스앤젤레스(LA)로 연수를 오셨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그분이 이렇게 말했다. 미국 연수를 마친 후, 나는 졸업식 참석차 오신 부모님과 짧은 여행을 했다. 여행 책에 나오는 대로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더니 아버지는 “영어를 잘하면 여행이 잘 되는구나”라면서 돌연 LA에 있는 대학으로 어학연수를 떠나셨다. 그게 예순여덟 되신 해였다. 아침 밥상에 국이 없으면 보리차라도 데워서 드셔야 했던 아버지는 그로부터 두 달 간 아침에는 시리얼, 점심에는 햄버거, 저녁에는 민박집 주인이 만들어 주는 파스타를 드시며 버티셨다. 다음해에는 호주로 연수를 떠나셨는데, 어쩔 수 없이 그동안 혼자 집을 지켜야 하는 어머니는 내게, “느이 아버지 이제 영어 못하기만 해봐라”라고 으름장을 놓으셨다.요새는 딸을 뒷바라지하는 아버지들이 많다지만 나 역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아버지의 지원을 받으며 자랐다. 대학 2학년인 1985년에 같은 과 친구 둘과 두 달 동안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할 기회가 생겼다. 한 달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여름 학기를 듣고 나머지는 유럽을 여행한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아버지는 흔쾌히 승낙하셨다. 대학 때 전국을 무전여행하신 얘기를 늘 하시면서 사람은 젊을 땐 꼭 여행을 해야 한다는 게 지론이셨다. 그 여행을 다니면서 가슴 벅찬 장면을 대할 때마다 내가 만 스무 살도 안 된 나이에 이런 걸 볼 수 있게 해준 아버지께 깊이 감사했다.지리산 종주도 마찬가지였다. 대학 4학년 여름방학 때 같은 과 친구들과 지리산 종주를 하게 됐다. 아버지는 “평생 지리산을 종주할 수 있는 기회가 누구에게나 오는 건 아니다”면서 반드시 가라고 하셨다. 결국 아버지 말씀대로 내게 그 후 이십년이 지나도록 지리산 종주를 다시 할 수 있는 기회는 오지 않았다.평생 한 직장에서 전문 경영인으로 정년퇴임하신 아버지는 농약 분야에 있어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당대 최고의 전문가셨다. 은퇴 후 친구 회사를 봐주면 어떻겠느냐는 주변의 권유를 모두 뿌리치고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잔디 관리 회사를 차리셨다. 말이 잔디 관리 회사이지 처음에는 시행착오를 거듭한, 거의 막노동에 가까운 고된 일이었다. 아버지는 본가, 처가를 불문하고 주변에 원하는 직장을 잡지 못한 조카들을 모두 회사에 불러들여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한 사촌 오빠는 회사의 부사장까지 지내셨던 아버지가 그 힘든 육체노동도 마다하지 않으시는 모습을 보고 정말 아버지를 존경하게 되었다고 토로했다.전형적인 경상도 분으로 평소 말이 없으신 아버지였지만, 나는 어릴 때 아버지와 얘기하면서 밤을 꼴딱 새운 적이 많았다. 대학생이 되자 술 한잔 놓고 얘기하는 일도 잦았다. 우리 수다의 주제는 참 다양했지만, 그중에서 가장 가슴 찡했던 얘깃거리는, 6·25전쟁 때 불과 열대여섯의 나이로 어린 여동생들을 모두 데리고 부산으로 피란을 떠났던 일이었다. 나보다 어린 나이에 어린 동생들의 인생을 책임져야 했다니, 전쟁이란 참으로 사람을 잔인할 만큼 일찍 어른이 되게 하는구나 싶었다.평생 모시고 살았던 장인 어른을 참 좋아하고 존경했었다는 얘기도 자주하셨다. 아버지는 친할아버지 얘기를 하실 때는 웃으셨는데, 외할아버지 얘기를 하실 때는 눈물을 보였다.어머니의 사랑이 끝이 없는 것 같다면, 아버지의 사랑은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 보인다. 어려운 일을 맡기고도 아버지는 늘 “일이 되는 방향으로 힘써 보라”고 짤막한 엄명을 내리시곤 한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의 사랑 역시 끝이 없음을 느낀 때가 있다. 아버지는 어느 설날 고향 분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딸을 낳아 이렇게 재미있는 줄 알았으면 딸을 하나 더 낳을 걸 그랬다.” 아버지, 늘 그런 딸로 머무를 수 있도록 열심히 살겠습니다.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한 뒤 사법시험(33회)에 합격해 1994년 김&장 법률사무소에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2001년 컬럼비아 법과대학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뉴욕 로펌과 연방항소법원에서 일했으며, 2007년부터는 한국씨티은행 법무본부장 겸 부행장으로 근무했다. 18대 국회의원으로 현재 한나라당 대변인을 맡고 있다. 2007년 ‘미술관에서 오페라를 만나다’라는 저서를 냈다.조윤선·국회의원
상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