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국극의 화려한 부활, 평생의 꿈이죠’

한국여성국극예술협회 홍성덕 이사장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잊혀진 것만 같은 여성국극의 화려한 비상을 꿈꾸는 이가 있다. 지난 추억 속의 문화가 아니라 다시 도약하는 대중문화로서 여성국극의 건재함을 알리려고 노력하는 한 예인(藝人)이 있다. 그녀가 바로 한국여성국극예술협회 홍성덕 이사장이다.TV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이전, 여성국극은 영화와 함께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던 대중문화 예술이었다. 여성국극이 펼쳐지는 극장에는 관중이 구름같이 몰려들었고 여성국극인들은 지금의 아이돌 스타들 못지않은 열성적인 팬들을 거느린 국민적인 스타이기도 했다. 특히 남자 주인공 역을 맡았던 여성국극 배우들의 인기는 상상 그 이상이었다. 분명 여자인 줄 알면서도 그들의 움직임에, 그들의 소리에, 그들의 능란한 춤사위에 소녀들은 남루한 현실을 잊고 아련한 환상에 빠지곤 했다.“한번 무대를 본 이들이라면 여성국극이 보여주는 그 묘한 매력에서 벗어나지 못했어요. 임춘앵 김경수 박미숙 씨 등은 정말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죠.” 판소리 김옥진 명창의 딸로 태어나 일찍부터 판소리에 그 재능을 인정받았던 소녀 홍성덕도 그랬다.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화려한 공연에 금세 넋을 잃고 말았다. “판소리만 하다가 20대에 갑자기 여성국극을 하게 된 것도 바로 여성국극을 처음 봤을 때의 그 매력이 잊혀지지 않아서였죠.”1967년에 여성국극 ‘선화공주’에서 선화공주 역을 맡았던 그녀다. 하지만 여성국극 활동도 잠시, 그녀는 다시 판소리의 길로 돌아가고 만다. “여성국극은 소리와 춤, 연기가 모두 어우러진 종합예술이죠. 어느 하나만 뛰어나다고 해서 잘한다고 할 수 없어요. 제가 다시 소리 공부에 매진하게 된 것은 하나라도 우선 제대로 해내고 싶어서였어요.” 그녀가 한창 소리 공부에 빠져 있을 때 여성국극은 점점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다. TV와 라디오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고 사람들은 TV 드라마나 라디오 드라마를 통해 웃고 울었다.그대로 사라지기에는 너무 아까운 거예요.” 그때부터 그녀는 직접 발로 뛰며 예전의 명창들과 여성국극인들을 찾아 나섰다. 사라진 것에 안타까워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다시금 부활할 수 있도록 자신의 모든 노력을 바쳤다.그 노력이 하나의 결실을 보기까지에는 10여 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예전의 여성국극인들을 모으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신진 인재들을 발굴하고 가르치고 또 공연을 준비하기까지에 걸린 시간이었다. 그 사이 1981년에 남원 전국국악명창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는 등 명창으로서도 이름을 날렸다. “1987년 국립극장 대극장에 직접 제작한 ‘선인 이차돈’이라는 작품을 올렸어요. 그때의 감격이야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죠.”그 후로도 공연은 계속되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축하 공연을 비롯해 매년 한 편 이상의 정기 공연은 물론 수십 회의 공연을 펼쳐나갔다. 1990년의 일본 오사카 초청 공연을 비롯해 해외 공연도 수없이 많이 다녔다. “1년에 한두 번씩 해외 공연을 나가는데 한 번 해외 공연을 나가면 30~40개 도시를 순회공연하곤 했죠.”특히 1996년에 호주 시드니 오페라 대극장에서 공연한 일은 평생을 두고 잊을 수 없는 감동을 주었다. “국내에서 시드니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한 팀은 많지만 거의 대부분 소극장 공연이죠. 대극장에서 공연한 건 우리밖에 없을 걸요?” 단순히 규모의 문제가 아니다. 시드니 오페라 대극장에서 공연하기 위해 준비하던 그 과정 하나하나가 소중한 기억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그 외에 2000년에 있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식 때 축하 공연을 한 일이나 평양에 가서 공연한 일도 잊지 못하는 공연 중 하나라고 한다.“공연 한 편을 올리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준비와 노력들이 필요해요. 그렇기 때문에 오랜 준비 끝에 마침내 공연을 올리고 나면 정말 행복하기 그지없죠.” 보통 한 편의 공연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몇 달에서 길게는 1년에 걸쳐 연습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2001년부터는 정식으로 한국여성국극예술협회의 이사장직을 맡아 더욱 바빠진 그녀이지만 여전히 현역으로 무대에 오르는 그녀인 만큼 노력을 게을리 할 수 없다.“여성국극 후진 양성도 해야 하니까요. 다행스럽게도 우리의 공연을 보고 난 다음 여성국극을 하고 싶다며 찾아오는 젊은 사람들이 많아요. 그중에서 싹수가 보인다(웃음) 싶으면 직접 가르치곤 하죠. 아무래도 일대일로 직접 붙잡고 춤이며 소리며 연기며 하나하나 다 가르쳐야 하다 보니 품이 많이 들긴 하지만 그만큼 보람도 크죠.” 그런 노력들 덕분에 예전과 달리 20대의 젊은 인재들도 많이 모았다. 공연 또한 그저 지나간 레퍼토리가 아닌 새로운 분위기의, 젊은 사람들도 충분히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공연들로 나아가고 있다. 여성국극이 나이 지긋한 어른들만의 공연이 아니라 젊은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그들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한 셈이다.“여성국극이 가진 매력을 좀 더 많은 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일본의 여성국극이라고 할 수 있는 ‘다카라즈카’는 젊은 세대들에게도 폭넓은 인기를 끌고 있잖아요? 우리 여성국극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요.” 물론 다카라즈카에 비하면 한없이 부족한 여건이다. 그네들이 전용 학교에 전용 극장까지 갖추고 있다는 점을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그래서 아쉬운 점이 많죠. 다른 건 다 무리라고 하더라도 전용 극장만이라도 있다면 훨씬 더 많은 대중에게 공연을 보여줄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는 셈인데, 지금은 무대에 올린다고 해도 일반 대중이 쉬이 접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기 때문에 많이 아쉽죠.”지난해에는 여성국극 탄생 60주년을 맞아 다양한 기념행사를 열었다. 60주년을 기념하는 공연들은 물론이요, 여성국극의 자료들을 모은 전시회도 열었다. 여성국극 60주년을 맞이한 홍 이사장의 감격이 남달랐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하지만 홍 이사장은 그 감격으로부터 다시 스스로의 각오를 불태웠다고 한다. “인생은 60부터라고 하잖아요? 올해가 61년째인 만큼 여성국극도 올해부터 다시 시작하는 셈이죠.”과거의 영광에 대한 추억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과거에 못지않은 빛나는 미래를 구상하는 그녀는 항상 이전의 무대보다 더 나은 무대, 볼거리와 이야깃거리가 넘치는 무대를 지향한다. 전성기 못지않은 여성국극의 화려한 부활을 꿈꾼다. 숨 막힐 듯한 무더위 속에서도 나이를 잊은 채 연습실에서 다음 공연 준비에 여념이 없는 것도 그 지치지 않는 열정 때문이다. “8월 21일부터 올해의 정기 공연 작품인 ‘풍류하객 신윤복’을 공연합니다. 화가 신윤복을 통해 여성국극 세계화의 꽃이 그려졌으면 하는 소망을 품고 공연을 준비했습니다. 남녀노소가 함께 즐길 수 있는 볼거리들이 풍성하니 많이들 보러 오세요.” 1945년생. 고 오정숙 선생에게 심청가, 춘향가 사사. 고 김소희 선생에게 남도민요 사사. 1993년 한국국악협회 ‘국악대상’ 수상. 1996년 ‘문화의 날’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대통령상’ 수상. 한국여성국극예술협회 이사장(현). 대한민국 여성전통예술경연대회 집행위원장(현).김성주·객원기자 helieta@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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