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비 절감 방안에 명문 팀들 ‘화들짝’

경제 위기로 F1 대회 ‘흔들’

흔히 포뮬러 원(F1)으로 불리는 국제 자동차 경주대회는 모든 스포츠가 공통적으로 요구하는 체력이나 기술보다 첨단 테크놀로지를 더욱 요구하는 종목이다. 엔진의 출력을 강화하고 차량의 순간 가속도를 높이기 위해 공기역학과 열역학 등 온갖 물리학 지식과 자동차 공학 기술이 총동원되고 기술 투자의 양과 질에 따라 승부가 결정되는 게임이다.그래서 F1을 단순히 스포츠 영역에만 가두어 놓고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페라리나 도요타 등 F1을 주도하는 명문 팀들은 연간 운영 예산만으로 4억 달러 이상을 쏟아 붓는다. 이 중 절반가량이 엔진 개발에 드는 비용이다. 한 팀이 고용하고 있는 기술 및 행정 인력만 해도 700~800명에 이른다. 이쯤 되면 F1은 이미 거대한 비즈니스의 영역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단일 종목으로는 돈 씀씀이가 가장 큰 F1 비즈니스가 지금 글로벌 경기 침체의 직격탄을 맞고 휘청거리고 있다. 직접적 원인을 제공한 것은 F1의 인기를 좌우하는 명문 팀들이다. F1 소속 8개 팀 대표들이 2009 F1 월드 챔피언십이 열리는 영국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내년부터 F1을 떠나 별도의 챔피언십을 창설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F1을 떠나 딴살림을 차리겠다고 선언한 8개 팀에는 페라리, 매클라렌, 르노 등 F1에 대한 폭발적 관심을 이끌어 온 명문 팀들과 여기에 소속된 스타급 레이서들이 모두 포함돼 있다. 말이 8개 팀이지 이들이 떠나게 되면 F1은 껍데기만 남게 되는 셈이다.F1을 붕괴 직전까지 몰고 온 최근 사태의 원인은 다름 아닌 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기 침체다. 무엇보다 F1을 주관해 온 국제자동차연맹(FIA) 측이 내놓은 대회 예산 절감 방안이 발단이 됐다.FIA는 내년 대회부터 각 참가 팀의 연간 예산을 4000만 파운드(약 830억 원) 이하로 줄이는 규정을 신설하겠다고 밝혔다. 자발적이라는 전제를 달았지만 사실상 2010년 대회 참가 팀들은 이 조항을 준수해야만 참가 신청을 받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자동차 업계 불황을 감안하고 재정 여건이 취약한 신생 팀들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각 팀의 예산 총액을 규제하겠다는 것이 예산 개편안의 핵심이었다.FIA의 방침에 반기를 든 주요 참가 팀들은 이런 예산 규제 방안이 ‘최고 기술로 최고 스피드를 낸다’는 F1의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 방안이 실행될 경우 결국 차량 성능이 떨어지고 엄청난 자본을 들여 개발한 신기술은 활용하기 어려워 궁극적으로 F1의 인기가 떨어질 것이라는 것이 이들 주장의 핵심이다.양측의 입장이 좁혀지지 않자 FIA 측은 예산 규제 방안의 시행 방침을 1년 미뤄 단계적으로 실시하겠다는 방침과 함께 독립적 감사위원회를 설치해 예산 심사 업무를 맡기기로 하는 등 타협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역시 일방적 예산 규제 방안에 반발해 온 팀들의 입장을 되돌려 놓지는 못했다.경기 침체의 직격탄을 맞은 자동차 업체들의 사정을 감안해 총액 예산 규제라는 보완책을 내놓은 FIA 측의 주장은 어느 정도 타당성을 갖고 있다. 이미 지난해 말 일본의 혼다가 일부 사업부를 정리하기 위한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F1팀을 매각한다고 발표한 바 있다.F1 시장에 충격을 던졌던 혼다의 매각 선언 이후 르노는 천정부지로 치솟던 스타급 드라이버들의 임금을 규제하겠다는 방안을 내놓기도 했다. 일련의 상황 전개에 따라 경기 침체의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한 자구책이 FIA 차원에서 논의되기 시작했고 이번 예산 규제 방안 역시 그 결과물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그러나 여기까지는 일단 표면에 나타난 사태의 전후 사정을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다. FIA 내부 사정에 밝은 관계자들은 한결같이 이번 사태의 직접적 원인을 제공한 것은 FIA와 참가 팀들 간의 해묵은 감정싸움이라고 지적하고 있다.현재 F1 운영과 관련해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사하고 있는 사람은 두 명의 영국인이다. 모터스포츠의 발상지이자 종주국인 영국뿐만 아니라 F1에 열광하는 전 세계 각국에서 이들 두 사람은 F1의 대부이자 마피아로 통한다. 바로 막스 모슬리 FIA 회장과 ‘F1 최고사령관’으로 불리며 F1 운영권을 장악하고 있는 버니 에클스톤 ‘F1 매니지먼트(FOM)’ 회장이 그들이다.이 두 사람은 그동안 모터 레이싱을 상업적 스포츠로 급성장 시키는 데 뛰어난 수완을 발휘해 왔다. 스폰서와 TV 중계권료로만 엄청난 돈을 긁어모았고 전 세계를 상대로 F1 그랑프리 경기장 건립을 허용해 주는 대가로도 어마어마한 이득을 챙겨 왔다.두 사람 덕에 모터스포츠 산업이 오늘날처럼 급성장했다는 데에 이의를 다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결국 F1 주관 단체인 FIA와 FOM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이들이 보여준 독단적이고 폐쇄적 의사결정 방식이 참가 팀들과 마찰을 빚으면서 이번 사태에 원인을 제공했다는 것이다.특히 F1 프로모터라고 할 수 있는 에클스톤에 비난이 집중됐다. 그는 FOM을 통해 경기 수익의 대부분을 독점해 오면서 실제 경기에 출전한 팀들에 대한 이익 배분에는 지나치게 인색하다는 불만을 사 왔다. 또 FOM 측은 심지어 지난해 세계적 스타 카레이서를 상대로 F1에 출전하는 대가로 수억 원이 넘는 라이선스 발급비용을 부과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카레이서와 해당 팀들은 ‘호나우두가 맨유 유니폼을 입고 프리미어 리그 경기에 나서면서 출전료를 내고 뛰는 격’이라며 강력하게 반발하기도 했다.모터스포츠 산업이 급성장하면서 파이가 점점 커지는 반면 해당 팀들에 돌아가는 몫은 만족스럽지 못한 수준에 그치자 자연스레 경기 운영과 수익 배분 방식에 대한 협회와 팀들의 이견이 노출되기 시작했다. 세계적 자동차 메이커들과 엔지니어들이 참여하고 있는 F1팀들은 별도의 협회를 결성해 FIA와 FOM 등 F1 주관 단체에 민주적이고 투명한 협회 운영과 보다 투명한 이익 배분을 요구하고 나섰다.이들 팀들이 실제로 노리고 있는 것은 모슬리와 에클스톤의 퇴진이라는 분석도 있다. 칠팔십 세의 노인들이 천문학적인 돈이 오가는 황금알 스포츠 산업을 자신들의 전리품인양 챙기고 이익을 독점해 온 데 따른 반발이 극에 달했다는 것이다.지난해 모슬리와 관련한 성추문이 터져 나왔던 것도 이런 추측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영국의 한 일간신문이 입수해 공개한 모슬리 회장의 ‘섹스 비디오’에는 그가 나치 복장을 하고 매춘부들과 집단 섹스를 즐기는 변태적 행각이 소름 끼칠 정도로 자세히 담겨 있었다.이 테이프가 공개되자 F1팀들과 유명 카레이서들이 그의 도덕적 자질을 문제 삼으며 사퇴를 요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모슬리 회장은 이는 어디까지나 ‘사생활 영역’이라며 사퇴를 거부한 채 오히려 이 테이프를 공개한 언론사를 상대로 소송을 벌여 승소 평결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그 후 모슬리 회장은 예산과 기술 규제 등을 내세워 반FIA 움직임을 보여 온 팀들을 압박하며 개혁 드라이브를 내세워 반전을 시도해 왔다.게다가 페라리, 도요타 등 주요 팀들이 F1을 떠나겠다는 폭탄선언을 내놓은 뒤에도 FIA 측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을 기세다. 모슬리 회장은 이들 팀들의 집단행동은 대회 운영의 법적 권한을 갖고 있는 FIA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므로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이들의 집단행동에 대해 ‘법적 대응’을 선언한 것은 물론 사태가 장기화할 경우 오는 10월까지만 임기를 채우겠다는 당초 약속을 재고할 수도 있다며 ‘불명예 퇴진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모슬리 회장이 올가을 또다시 FIA 회장에 출마할 경우 다섯 번째 임기에 도전하는 셈이다.FIA와 팀들 간의 관계가 이렇게 한 지붕 아래서 살 수 없다는 극단적 대결로 치닫자 주변에서도 이제 화해는 물 건너갔다는 의견들이 잇따라 나오고 있다. 자동차 산업의 역사와 영광을 함께해 온 F1이 자동차 산업의 침체와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은 아닌지 전 세계 모터스포츠 팬들은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다.성기영·영국 통신원(워릭대 국제정치학 박사과정) sung.kiyou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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