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성 정책은 최고의 아시아 수출품’

변도윤 여성부 장관

지난 6월 23일 청계광장이 내려다보이는 여성부 집무실에서 만난 변도윤(62) 장관은 전혀 뜻밖의 단어들을 던졌다. 바로 ‘수출’과 ‘한류’다. 어찌 보면 여성부와 아무런 인연이 없을 것 같은 이 말을 변 장관은 인터뷰 내내 강조했다. 세계적으로 앞서 있는 한국의 여성 정책을 아시아 지역 나라들에 ‘수출’해 또 다른 ‘한류’를 일으키겠다는 것이 그의 구상이다. 이를테면 2010년 전면 도입되는 ‘성인지(性認知) 예산(성별 차이를 고려해 그 영향이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재정 사업에 대해 남녀 특성과 차이를 반영해 그 효과가 평등하게 이뤄지도록 예산을 편성·집행하는 제도)’이 좋은 사례다. 변 장관은 “정부 예산을 여성과 남성이 평등하게 활용할 수 있게 하는 앞선 제도”라며 “아시아 여성의 열악한 현실을 개선하는데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여성 정책 수출로 큰돈을 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이 추진하는 ‘아시아 신외교 정책’을 이끄는 한 축이 될 수 있다는 판단이다. 지난 6월 24~26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동아시아 양성평등 각료회의’도 이런 인식의 연장선에 있다.아시아 지역 여성부 장관들은 부처 명칭은 조금씩 다르지만 ‘양성평등’이라는 동일한 목표를 추구합니다. 각 나라가 추진하는 사업의 경험을 공유하고 좋은 정책은 서로 배우기 위해 2년에 한 번씩 양성평등 각료 회의를 열고 있어요. 일본과 인도에 이어 이번이 3회째지요. 특히 올해는 세계적으로 앞서 있는 한국의 여성 정책을 아시아 지역에 알리고 전파한다는 데 큰 의미가 있어요. 한국의 양성평등 관련법과 제도는 세계 톱 수준이지요. 미국보다 훨씬 앞서 있는 것도 있어요. 여성 정책의 수출과 한류화가 충분히 가능하다고 봐요.지난 5월 인도네시아를 방문했는데 ‘대장금’을 모르는 사람이 없더군요. 공식 만찬에서 선보인 김치를 마치 샐러드를 먹듯이 잘 먹어 기분이 좋았어요. 드라마가 몰고 온 한류가 정말 대단하다는 걸 새삼 느꼈지요. 한국의 여성 정책도 드라마는 아니지만 아시아 지역에서 충분히 닮고 싶은 모델이 될 수 있어요.중요한 한류 수출품 중 하나로 생각하는 것은 ‘성인지 예산’입니다. 인도네시아 재무장관은 여성인데, 지난번 방문 때 직접 만나 이 제도를 소개하려고 했어요. 정말 아시아에 꼭 필요한 좋은 정책이에요. 유럽이나 미국 등 선진국에 비해 아시아 여성의 현실은 굉장히 열악하지요. 성인지 예산부터 시작해 이런 현실을 바꿀 수 있어요. 정부 예산에서부터 양성평등 개념을 반영하기 시작하면 다른 많은 것들이 바뀌게 됩니다. 유선 인프라가 취약한 아시아 지역에 무선전화부터 수출하는 것과 같아요. 성인지 예산부터 팔아야 해요.정부 예산을 짜고 집행할 때 그것이 여성과 남성의 차이와 특성을 제대로 반영했는지 검토하고 관리하는 것입니다. 화장실의 경우를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쉬워요. 여성은 화장실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고 아이들과 함께 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남녀 화장실을 같은 수로 만드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어요. 그런데 그동안 어딜 가나 화장실 숫자가 똑같아요. 공공 화장실 예산을 짤 때 남녀의 차이가 전혀 고려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여성 화장실을 더 짓게 되면 그 혜택은 여성뿐만 아니라 결국은 남성에게도 갑니다. 많은 남성들이 화장실에 간 아내를 기다리다 짜증을 내지 않습니까. 이 이야기를 듣고 이슬람 국가인 인도네시아 여성부 장관은 기도실부터 바꿔야겠다고 하더군요.지난 6월 1일 제주도에서 열린 한·아세안 정상회의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신아시아 외교’를 말씀하셨습니다. 우선 이와 연관된 나라들을 중심으로 공적개발원조(ODA) 사업인 정보기술(IT) 교육과 양성평등 교육, 여성 관련 유학생 지원 등을 서로 연계해 사업을 확대할 계획이에요. 인도네시아의 경우 여성부 공무원 30명을 한국으로 초청해 양성평등교육원에서 2주간 교육을 했고 또 이들에게 ODA 사업으로 IT 교육을 해줬어요. 거기에 더해 해외 유학생을 받을 때 여성 관련 유학생을 일정 비율 선발해 주려고 합니다.지난해부터 시작된 세계경제 위기의 가장 큰 피해자는 바로 여성이에요. 올 2월 통계로 우리나라 실직자 98.2%를 여성이 차지합니다. 실직자 100명 중 98명이 여성이라는 뜻이죠. 지금 표출되고 있는 비정규직 문제에서도 가장 큰 어려움을 겪는 것은 여성이에요.다행히 작년 5월 ‘경력단절여성등의경제활동촉진법’이 국회에서 통과돼 발효됐어요. 이를 근거로 몇 가지 경제 위기 긴급 대책을 추진하고 있어요. 72개 ‘여성 새로 일하기 센터’를 지정해 원스톱으로 취업을 지원해 주고 있고 ‘여성 경제위기대책 추진단’도 꾸려 가동하고 있어요. 또 경제가 어려워지면 여성들은 가정 폭력에 더 쉽게 노출됩니다. 살림이 쪼들리면 부부 싸움이 많아지고 여성들이 피해자가 되지요. 검찰을 주축으로 여성폭력점검단을 발족해 하반기부터 활동에 들어갑니다.기본적으로 행정 인턴이나 청년 인턴과 유사해요. 주부 인턴을 채용하면 해당 기업에 월 50만 원을 정부가 지원해 줍니다. 이번에 처음 시작했는데, 월 100만 원을 주는 청년 인턴에 비해 절반 수준이지만 나름대로 큰 의미가 있어요. 남편이 실직하고 아이들과 먹고살려면 어떻게라도 돈을 벌어야겠다는 절박함이 있는 여성들을 기업과 연결해 정부가 인건비를 줄 테니 써달라는 겁니다. 주부 인턴을 뽑을 때 학력이나 경력은 전혀 안 봐요. 애초 주부 인턴 1000명을 지원할 예정이었는데 추경예산을 더 받아 3880명이 혜택을 볼 수 있게 됐어요.여성의 취업과 보육은 아주 밀접하게 연결돼 있어요. 현실적으로 엄마가 아이를 데리고 나가 일할 수 있는 곳은 없어요. 일할 기회를 줘도 아이 때문에 나오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아요. 성공한 여사장에서부터 어려운 가정까지 모두 아이 때문에 족쇄가 채워져 있는 거죠. 따라서 여성 취업 문제에 접근할 때는 반드시 보육 문제를 함께 고려해야 해요. ‘여성새로일하기센터’를 통해 올해 4만 명을 취업 훈련을 통해 취업시킬 계획이에요. 아이 때문에 취업 훈련을 받지 못하는 경우 하루 5시간, 시간당 5000원 범위 내에서 최대 4개월까지 양육비를 무료로 지원해 줍니다.흔히 이제 여성들이 오히려 우위에 있지 않느냐는 말씀을 많이 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물론 사법시험이나 행정고시에서 여성 합격자 비율이 40~50%대에 육박할 만큼 공식적 루트를 통한 진출은 획기적으로 개선된 것은 분명해요. 하지만 비정규직 문제, 고위직 여성 비율, 남녀 임금 격차 등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에 훨씬 못 미칩니다. 유엔개발계획(UNDP)이 발표하는 여성 권한 척도는 108개 나라 중 68위에 머무르고 있어요. 한국은 아직도 여성이 대기업 임원에 오른 게 언론에 크게 보도되는 나라입니다. 해외는 그런 게 일상적인 일이고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신문에 날 일이 없어요. 법과 제도 등 여성 정책 측면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내부적으로는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어요.여성 친화 기업은 일과 가정의 양립을 위한 제도적·문화적 환경을 갖추고 여성 인재 육성에 힘쓰는 기업을 말해요. 여성부는 대기업을 중심으로 하고 각 지역 ‘여성새로일하기센터’는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협약을 체결하고 있어요. 현재 대기업 가운데 대한항공 현대중공업 SK텔레콤 STX조선 CJ제일제당 국민은행 등 6곳이 동참했지요. CJ제일제당은 현재 8%인 여성 임원 비율을 내년까지 20%대로 끌어올리겠다고 약속했어요. 현대중공업은 여성새로일하기센터에서 컴퓨터 응용 설계(CAD) 교육을 받은 훈련생을 100% 채용하기로 했습니다. STX조선도 올해 안에 여성 정규직 272명을 뽑고 여성 휴게실과 탁아 시설을 늘리기로 했고 국민은행은 산전·후 휴가를 현재 110일에서 6개월로 대폭 늘리기로 약속했지요.1947년 황해도 출생. 69년 중앙대 사회사업학과 졸업. 77년 중앙대 사회개발대학원 노동정책 석사. 92년 서울YWCA 사무총장. 97년 전국여성인력개발센터 중앙협의회 회장. 2002년 서울여성 상임이사, 서울여성플라자 대표. 2003년 국무총리실 시민사회발전위원회 위원. 2008년 여성부 장관(현).대담= 김상헌 취재편집부장정리=장승규 기자 skjang@kbizwee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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