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같은 존재, 큰형

아버지에 대한 필자의 기억은 그리 많지 않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는 아버지를 일찍 여읜 것이 창피한 적도 있었다. 가정환경 조사 때 아버지의 작고를 숨긴 적도 있었다. 필자가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는 것은 오랜 세월 불문율이었다. 이후 50대가 된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한 기억이 없다.막상 원고 청탁을 받았을 때 무척이나 망설였다. 거절하려는 마음이 굴뚝같았다. 아버지에 대해 할 얘기가 달리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난 세월 내 인생의 버팀목이며 아버지 역할을 한 큰형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보기로 했다.필자는 초등학생 시절에 아버지가 작고하면 큰형이 아버지 위치를 승계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지금처럼 영악한 아이들이 들으면 비웃을 일이다. 그 시절에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단순하고 순진했다. 초등학교 때는 먹을 것이 충분하지 않아 미국이 제공하는 옥수수 빵을 무상으로 배급받던 시절이었으니.큰형은 1943년생이다. 아버지가 작고하시자 밑의 네 동생을 부양하겠다고 대학을 자퇴했다. 그나마 아버지께서 물려준 부동산을 처분해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젊은 청년에게 사업은 그리 녹록한 도전이 아니었다. 3년도 채 되지 않아 공장의 기계 값만 건지고 문을 닫았다. 필자가 초등학교 다닐 때의 일이었다.이후 필자의 청소년 시절은 가정 형편상 암울하기만 했다. 중학교 때는 학업 성적이 상위권이었지만 마음은 항상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삐뚤어질 수 있는 모든 환경이 갖춰져 있는 셈이었다. 그럴 때마다 방향을 잡아 준 것이 큰형이었다. 항상 필자의 선택을 존중했다. 필자가 잘하지 못하는 것도 너무 많았지만 무조건 잘했다고 칭찬해 주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던가. 필자가 아무리 잘못해도 절대 혼내거나 매를 든 적이 없었다. 아버지를 잘 모르고 자란 불쌍한 막내라 어떤 경우에도 혼을 내지 않았다는 것을 안 것은 필자가 성인이 된 후였다.필자에 대한 큰형의 교육은 자유방임에 가까웠다. 무슨 일이든 스스로 알아서 하도록 했다. 중·고등학생 시절 어쩌다 학업 성적이 떨어져도 잘했다고 격려해 줬다. 그리고 앞으로 더 잘할 것이라는 믿음을 주었다. 어려서 필자의 눈에 비친 큰형은 누구에게나 배려하고 베풀기를 좋아해 항상 손해만 보고 사는 분이었다. 이러한 큰형의 성격과 행동이 너무나 답답하고 우둔해 보였다. 여러 번 대들기도 했었다. 그때마다 필자를 조용히 타일렀다. 그때 철없는 막내 동생을 보며 큰형은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필자가 오늘날 대학 교수가 되고 한 분야의 전문가로서 위상을 얻은 것은 아마 청소년기 큰형의 교육 방법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우선 가정 형편이 되지 않으니 과외나 학원에 다닌 적이 없었다. 모든 공부는 스스로 해야만 했다. 기계적 주입식 교육을 받아 본 적이 없어 공부에 지친 적도 없다. 아마 이런 관성력으로 내 일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결혼하고 자식을 키우면서 필자의 자식도 스스로 알아서 공부하게 하도록 하겠다고 마음을 다졌다. 하지만 큰형처럼 되지는 않았다. 자식의 모든 일에 간섭하고 성적이 떨어지면 혼도 낸다. 이제는 저세상 사람이 되신 큰형을 생각하며 따라 해 보려고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이것도 필자의 이기심과 욕심 때문이 아닌가 한다.지금 생각해 보면 욕심이 없고 배려심이 많은 큰형은 남에게 베푼 것이 많지만 자신에게는 엄하게 대하신 듯하다. 그래서 미국 이민까지 가서 많은 고생을 했다. 필자에게는 손에 잡히지 않는 많은 선물을 남기고 떠나셨다. 요사이 자주 큰형 생각이 난다. 노래방에 가면 큰형이 즐겨 부르던 흘러간 애창곡도 불러 본다. 필자가 아무리 많이 배우고 나름대로 그 분야에서 역할을 한다고 한들 큰형의 가치관과 교육 방법을 흉내 낼 수 없음을 슬퍼한다.1957년생. 미국 버지니아공대에서 석사를 마치고 테네시대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2년부터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책임연구원을 지냈고 2000년 한국항공대 교수로 부임했다. 2007년부터 3년간 한국과학재단 우주단장으로 활약했으면 현재 국방부 정책자문위원, 방위사업청 사업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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