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배신, 아버지의 용서

4남 4녀의 비교적 많은 자식을 두셨던 인자한 성격의 아버지를 우리 형제들은 모두 다르게 기억하고 있다. 4형제 가운데 셋째인 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다른 형제들과 남다르다. 형들에게 있어 아버지는 너무나 엄격했으며 일종의 ‘보고’의 대상이었다. 막내 남동생 역시 아버지를 무서워하긴 했지만 ‘편지’를 통해 참 따뜻하셨던 분이라고 회고한다.내게 있어 아버지는 친구 같은 존재였다고나 할까. 형들은 중학교 때부터 외지에서 학교를 다녔고 서울에서 대학을 다닌, 소위 ‘유학’ 생활을 보냈다. 동생 역시 외지에서 대학 생활을 했다. 그에 비해 난 아버지와 24시간 항상 붙어 있는 자식이었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남다르게 느껴지는지도 모른다.아버지는 참 꼼꼼한 분이셨다. 일례로 막내 동생이 외지에서 대학 생활할 때 편지 교환을 자주 했다. 동생이 1주일 동안 있었던 일과 고민들을 빽빽이 적어 편지를 보내면 아버지는 줄이 반듯하게 쳐진 깨끗한 종이에 깨알 같은 글씨로 답장을 보내주셨다고 한다. 외지에서 아버지의 ‘사랑’이 그리웠던 동생은 이 편지로 삶의 위안을 받았다고 한다. 지금도 동생은 힘들 때마다 빛바래고 먼지가 소복이 내려앉은 200여 통의 편지를 들춰보곤 한다.철도청과 군청 등에서 공무원으로 열심히 일하시다가 뒤늦게 사업을 벌이셨던 아버지는 뜻대로 되지 않자 시골로 내려와 정착하셨다. 다른 자식들은 가르쳐서 객지로 보냈던 반면 왜 유독 나한테 만큼은 “너는 나와 평생 함께 있자”고 하셨는지 한때는 미워도 해보고 원망도 해봤지만 지금은 그 이유를 알 것만 같다.나와 아버지에게는 다른 형제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끈끈한 무언가가 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사업을 시작해 현재 위치까지 올라설 수 있게 한 숨은 공로자는 분명 아버지였다.충남 부여에서 서당을 하셨던 아버지는 내 자식, 다른 자식 구별 없이 모든 것을 공평하게 가르치시고 훈계하셨던 선생님이었다.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에는 서울에서 천자문을 배우러 이곳 시골 마을까지 찾아오기도 했다. 또한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옛날 스승을 찾아오는 발걸음도 이어지곤 했다. 이것은 아마도 배움에 있어서만큼은 엄하게 다스리셨던 아버지의 성품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무궁화 줄기로 만든 낭창한 회초리로 따끔하게 벌을 주시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가끔은 술을 드시고 풍요(風謠)와 시조를 즐기시기도 하셨고 대청마루에서 ‘청산리 벽계수야’ 하시며 동네 어르신들에게도 즐거움을 드리기도 했다.아버지는 형들이 외지에서 성공할 때에도 내게는 시골에 있는 넓은 평야의 반절을 주겠다며 서울에 올라가서 고생할 필요가 없다고 내 마음을 붙잡았다. 어렸을 적에는 ‘왜 나만 도시로 안 보내는 걸까’라고 밤마다 고민하면서 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자식 중 하나는 자신의 뒤를 잇기를 바랐고 그래서 더 미안하고 애틋한 마음을 가졌던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난 20대 초반, 아버지한테 배신자라는 말을 들으면서까지 서울행을 택했다.서울로 올라가기 전날, 아버지가 나를 부르자 나는 비장한 표정과 미안한 마음으로 아버지 앞에 앉았다. 아버지가 남긴 두 마디를 나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 말씀은 “너는 나처럼 살지 마라”는 것과 “올라가서 꼭 성공하라”는 것이었다. 쓰린 마음이었겠지만 아들이 선택한 인생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 부모의 사랑이 아니었을까.그로부터 10년 뒤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다. 그러나 아버지의 기억은 아직도 나의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아버지의 말씀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어떤 일을 하든지 주인으로서 일을 하라’는 것이다. 원칙을 중시하고, 현재에 충실한 삶을 살며,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은 ‘주인’처럼 일하라고 했던 아버지의 성품과 말씀은 지금 회사를 운영하는 데 있어 경영 철학의 밑거름이 되고 있다.1963년생으로 92년 프린터를 포함한 컴퓨터 주변기기 및 서비스를 제공하는 ‘파라시스템’을 설립했고 현재까지 대표를 역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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