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종 사모펀드’ 이유 있는 반란

지난 5월 하이트맥주와 함께 국내 맥주 시장의 양강 체제를 이뤘던 오비맥주가 미국계 사모 펀드인 콜버그 크래비스 로버츠(KKR)의 손으로 넘어갔다. 국내에는 덜 알려져 있지만 KKR는 운용 자산만 485억 달러에 이르는 거대 사모 펀드다.KKR 입장에서 보면 이번 거래 과정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유는 국내 인수·합병(M&A) 시장에서의 쓰라린 상처 때문. 지난해 1월 만도 인수전에서 KKR는 국내 토종 사모 펀드(PEF) 운용사인 H&Q AP 코리아, 한라건설, 산업은행의 연합작전에 완패했다.물론 이번 오비맥주 인수전도 만만치 않은 도전이었다. 당초 오비맥주 인수의 최대 경쟁자는 국내 주류 시장 석권을 꿈꾸는 롯데그룹이었지만 인수전이 개시되자 막판까지 KKR를 힘들게 만들었던 것은 국내 최대 사모 펀드인 MBK파트너스였다. MBK는 LG카드 대우일렉트로닉스 대우정밀 삼보컴퓨터 등 웬만한 대기업 인수전에 모두 뛰어든 국내 사모 펀드의 대표 주자로 펀드 운용액 면에서 국내 최대를 자랑한다.또 한 번 한국계 사모 펀드에 패배를 당할 수 없다고 생각한 KKR는 결국 당초 업계 예상치를 훌쩍 뛰어넘은 18억 달러에 오비맥주를 인수하기로 결정했다. 인수 금액에 대해 KKR 측은 5년 이상 장기 투자를 염두에 두고 책정한 것이기 때문에 고가 매입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강조하고 있지만 업계에서는 KKR의 이번 거래에 MBK 등 토종 사모 펀드들의 도전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한다.한동안 잠잠하던 사모 펀드 시장이 꿈틀거리고 있다. 사모 펀드란 소수의 투자자로부터 자금을 받아 주식 채권 등 상품에 투자하는 펀드를 의미한다. 투자자가 소수로 꾸려지다 보니 상당히 폐쇄적이고 투자자별 투자 금액도 공모에 비해 많다.국내 사모 펀드 시장이 태동하기 시작한 것은 1998년 간접투자자산운용법이 제정되면서부터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로 유동성을 겪던 알짜 기업들의 경영권이 론스타, 칼라일 등 글로벌 사모 펀드들로 넘어가자 부랴부랴 법령을 제정한 것이 시발점이 됐다.1998년부터 2000년까지 국내 우량 기업 매물들은 외국계들이 사실상 독차지했다. 칼라일과 JP모건 파트너스가 한미은행을, 뉴브릿지캐피탈이 제일은행, 하나로통신을 인수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또 외환은행을 인수한 뒤 재매각을 추진해 ‘먹튀’ 논란을 일으켰던 론스타도 대표적인 글로벌 사모 펀드다. 그러나 외국계가 휘젓고 다니던 M&A 시장에 토종 사모 펀드들이 하나 둘씩 생겨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국부 유출 논란을 일으키며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경영권을 넘겨줘야 했던 것이 10년 지난 지금,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글로벌 사모 펀드들과 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2009년 5월 말 현재 금융감독원에 등록된 사모 펀드 수는 84개, 운용사(GP)는 40여 곳이다. 토종 사모 펀드들의 능력은 이미 시장에서 어느 정도 검증을 받았다는 평가다. MBK만 하더라도 2006년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던 HK저축은행을 인수해 경영을 정상화시킨 바 있다. 지난해 하반기 결산 결과를 살펴보면 HK저축은행은 총자산이 전년도 말에 비해 2618억 원 증가한 2조6372억 원, 당기순이익은 흑자로 전환해 135억 원을 기록했다.올 하반기는 토종과 글로벌 사모 펀드들의 ‘진검 승부’가 예고돼 있는 때다. 기업 구조조정에 정부가 적극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 한층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최근 보고인베스트먼트가 운용하는 보고펀드가 BC카드 인수 우선협상자로 선정된 것은 그 시발점이다. 지난 몇 년간 무리한 외형 확장으로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는 4~5개 대기업 계열사가 벌써부터 물망에 오르고 있다. 물론 업계에선 검토하고 있는 것조차 극비다. 일단 검토 소식이 전해지면 사실상 인수전에서 한 발짝 뒤처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더군다나 칼라일, 론스타 등 글로벌 사모 펀드 1세대들이 주춤하고 있는 사이 KKR와 블랙스톤 등 규모 면에서 세계 최고 수준인 사모 펀드들이 국내 시장을 예의 주시하고 있는 것은 토종 사모 펀드로도 여간 신경 쓰이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KTB투자증권 구본용 전무는 외국계 사모 펀드들의 도전에 대해 “정부 주도하에 기업 구조조정이 이뤄지고 있으며 환차익을 거둘 수 있고 경제 펀더멘털이 튼튼해 주가 상승이라는 보너스까지 얻을 수 있다는 점을 매력적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미국 유럽 등이 금융 위기로 어려움을 겪고 있어 투자 관심이 자연스럽게 아시아로 옮겨진 것과 1998년 외환 위기를 통해 한국 시장을 어느 정도 파악한 것도 한국 진출을 적극 검토하고 있는 이유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문제는 돈이다. “운용사 수가 늘어나고 기업 매물들이 쏟아지고 있지만 실탄 확보는 예전보다 훨씬 어려워졌습니다.”사모 펀드를 운용하는 한 기업체 최고경영자(CEO)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지금 국내 사모 펀드들의 지상 과제는 자금 확보다. 신한, 우리, 기업, 산은 등 시중은행들이 자체적으로 사모 펀드 운용사를 설립하면서 전문 운용사들의 자금 조달 부담은 한층 가중되고 있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 해외 거대 사모 펀드들이 M&A 매물을 싹쓸이해 외환위기 당시가 재연되는 것은 기정사실로 봐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한 업계 관계자는 “또다시 국부 유출, 먹튀 논란이 발생하기 전에 토종 사모 펀드 육성을 위한 지원책을 마련해야 한다”며 정부의 역할을 주문했다.송창섭 기자 realsong@kbizwee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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