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지개 켜는 ‘국산 와인’
‘와인 열풍’ 속에서도 숨죽이고 있던 ‘국산 와인’이 기지개를 켜고 있다.그동안 ‘국내에서는 어렵다’고 평가되던 포도주는 생산자들의 끝없는 기술 개발과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서서히 마니아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또 복분자 머루 사과 들을 활용한 과실 와인들은 세계적으로도 그 품질을 인정받으며 또 다른 ‘효자 수출 상품’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조용하게 바람 몰이를 하고 있는 국산 와인의 현황을 점검해 봤다.난해 11월 서울 광진구 워커힐호텔 애스톤 하우스에서 열린 전경련 회의에서 호스트로 나선 최태원 회장이 순수 국산 와인인 ‘마주앙’을 건배주로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그간 전경련 회의의 건배주로는 ‘코스테스 투르넬(레드 와인)’과 ‘샤브리 1등급(화이트 와인)’ 등 소비자가격이 20만 원을 넘나드는 고급주들이 사용됐지만 경제 여건을 감안해 값싸고 품질 좋은 국산 와인을 마시자는 최 회장의 건의에 따라 이 제품이 선택된 것이다.난 5월 24일 국순당 고창명주는 2만 달러 상당의 ‘명작 복분자’를 인도로 수출했다. 특히 농림수산식품부와 농수산물유통공사는 지난 2월 와인 붐이 일고 있는 인도 시장을 뚫기 위해 뉴델리 현지에서 한국산 와인류 시음회 및 수출 상담회를 열고 32만 달러어치의 과실주 수출 계약을 체결했다.이처럼 국산 와인이 대기업 총수들의 만찬장에 건배주로 등장하거나 해외시장에 수출되는 등 조용한 인기 몰이를 하고 있다. 특히 와인 맛을 감별하는 소믈리에(sommelier)나 와인 마니아층에게도 좋은 평가를 받으며 급성장해 가는 와인 시장 속에서 시장점유율을 조금씩 높여가며 부활의 날갯짓을 하고 있다.국내 와인 시장의 규모는 매년 큰 폭으로 성장하고 있다. 국내 와인 시장은 최근 5년간 비약적으로 성장해 연간 5000억 원 규모에 이르고 향후 1조 원까지 불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물론 올해에는 경기 불황의 여파로 국내 와인 시장이 주춤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유통 공룡’인 신세계와 롯데가 와인 시장에 뛰어들고, LG SK 등 대기업과 디아지오코리아 등 외국의 대형 주류 업체까지 국내 와인 시장에 진출하면서 국내 와인 시장의 성장세는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이처럼 2000년대 이후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는 국내 와인 시장의 성장세에도 불구하고 한때 시장점유율 70%에 달했던 국산 와인은 오히려 맥을 못 추고 있는 게 사실이다. 1967년 사과를 원료로 한 ‘파라다이스’가 생산되면서 첫 등장한 국산 와인은 74년 최초의 양조 포도주인 ‘노블포도주’로 그 명맥을 이어갔다. 가장 많은 인기를 끈 것은 1977년 두산주류(현 롯데주류)가 생산한 ‘마주앙’이다. 마주앙은 시판 당시부터 천주교 미사 봉헌주로 채택됐고 오늘날까지 생산되면서 국산 와인의 대명사가 됐다.국산 와인 위주로 승승장구하던 국내 와인 시장은 1980년대 말 주류 수입자유화로 와인이 수입되면서 상황이 역전됐다. 국산 와인의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자 국내 와인 업체들은 외국의 벌크 와인을 수입해 제품을 만들거나 외국의 와인을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Original Equipment Manufacturer) 방식으로 수입하게 됐다.포도 농가들의 생산성이 떨어지자 정부는 농장을 폐쇄하도록 보조금을 내줬다. 그 결과 국산 와인 생산이 정체된 가운데 대부분의 포도 농가들은 캠벨얼리, MBA(Muscat Baily A) 등 식용 포도만을 생산했다.하지만 1990년대 후반 들어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등으로 생식용 과일의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자 정부 및 지자체가 농민주 생산을 장려하면서 명맥이 끊기다시피 했던 국산 와인 부활의 불씨가 됐다.이들의 노력은 10년이 지난 2000년 후반 들어 하나둘씩 결실을 보기 시작했다. 여기에 재배 기술의 발전, 주류 규제 완화 등의 환경 변화는 자연스럽게 국산 와인 산업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국내 농어촌에서 생산되는 특산물들을 가공해 부가가치를 높이자는 농어민들의 열망이 부단한 연구를 통해 현실화하기 시작한 것이다.특히 정부가 와인 패키지와 발효 과학 기술 등을 지원하고 와이너리(winery:양조장) 견학 등을 장려하면서 영농조합 등 생산자 단체와 지자체를 중심으로 한 국내 와인 산업은 농가 소득 증대뿐만 아니라 지역 관광, 홍보 자원으로도 활용되고 있다.현재 40여 개까지 늘어난 국내 와인 생산 업체 중 가장 성공한 곳으로는 ‘샤토마니’를 생산하는 충북 영동의 와인코리아가 꼽힌다. 와인코리아는 국내 유명 포도 산지인 충북 영동에서 1996년 영농조합법인 형태로 처음 설립돼 현재 국산 포도주 시장의 80%를 점유하는 업체가 됐다. 캠벨얼리 종을 토굴 저장소 속 오크통에서 발효한 유럽식 국산 와인을 생산하는 이 업체의 연간 생산 능력은 750톤에 달한다. 1996년 1억여 원에 불과했던 매출액도 작년 46억 원으로 급신장했다. 최근에는 최대 인터넷 쇼핑몰 G마켓에 입점해 2007년 약 2억 원의 수익을 올리는 등 전용 포장재를 이용한 인터넷 매출액만 올해 초까지 약 4억2000만 원에 달한다.특히 지난 2000년에는 한국철도공사와 업무 협약을 체결하면서 이곳을 방문하는 서울~영동 간 4량의 와인 트레인을 매주 2회 운행해 테마 관광 상품지로도 인기를 끌고 있다. 2008년 12월 기준 와인 트레인은 1만5780명이 이용해 12억6200만 원의 매출을 올렸다.전국 최대 포도 생산지인 경북 영천에서 국산 와인 육성에 나서고 있는 (주)한국와인도 ‘한국형 와인’으로 와인 시장에 도전장을 낸 기업이다. ‘마주앙’에서 20년간 근무한 하형태 사장이 2006년 설립한 이 회사는 이듬해인 2007년 벵꼬레 와인 4종류를 잇따라 출시해 수준 높은 기술력을 선보였다. 와인 브랜드 벵꼬레(Vin Coree)는 와인의 프랑스어 ‘벵’과 한국을 뜻하는 ‘꼬레’를 합성한 것. 이 밖에 충남 보령 사현마을의 영농조합이 2005년부터 생산해 연 6억 원 규모의 매출을 올리고 있는 ‘샌드힐’, 포도 산지로 이름이 높은 대부도 포도 농가들로 구성된 그린영농조합이 2001년부터 생산하는 ‘그랑꼬또’ 등도 대표적인 국산 와인이다.충남 천안의 ‘두레앙’도 눈여겨볼만 하다. 입장의 거봉포도를 활용해 와인을 만드는 두레앙은 그간 한정 생산해 오다 작년 말부터 일반 소비자에게도 판매를 시작했다.국내 와인 업체들은 원재료 역시 포도에 그치지 않고 복분자 감 머루 다래 배 사과 등 다양한 작물을 이용하고 있다. 사실 국내에서 재배되는 포도 품종은 대부분이 식용 품종으로 와인 생산용으로는 아직 기술적 한계가 있다는 평가다. 국내의 양조용 포도는 경북 지방에서 독일계 화이트 와인용인 리슬링(Riesling)이 소량 생산되고 있을 뿐이다. 이 리슬링으로 마주앙이 생산되는 것.이 때문에 각 업체들은 지역의 특산물을 활용한 과실주 와인을 주로 생산하고 있다. 박교선 원예연구소 과수유전육종연구실장은 “다양한 포도 품종으로 생산되는 수입 와인에 맞서려면 국내 생산되는 양조용 과실의 종류도 다양해져야 하는데 국산 와인이 복분자 머루 등 국내 자생 과일을 이용해 만든다는 점에서 충분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특히 복분자주는 국산 와인 생산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한국 대표 와인이다. 일례로 ‘보해 복분자주’는 지난 3월 열린 ‘샌디에이고 국제 와인 경연대회’ 금메달 등 세계적인 와인 대회에서 잇달아 수상하면서 세계 유명 와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미국에서 ‘럭비공 와인’이라는 별칭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보해 복분자주의 지난해 수출 실적은 140만 달러였다. 또 국순당 고창명주가 생산한 ‘명작 복분자주’ 역시 샌디에이고 국제 와인 대회에서 은메달을 수상한데 이어 4월 댈러스에서 열린 와인 대회에서 동메달을 받기도 했다.머루 와인, 사과 와인, 감 와인 등도 인기가 좋다. 복분자에 이어 가장 큰 시장 규모를 차지하고 있는 머루 와인 시장은 약 200억 규모로 포도 와인 시장보다 두 배나 큰 규모다. 대표적으로는 함양군의 머루 와인이 가장 유명세가 있으며 미국에만 30만 달러어치의 수출 실적을 올리기도 했다. 또 삼척의 ‘끌로너와 머루와인’은 최근 강원도에서 개최된 와인 품질 대회에서 금상을 수상하며 품질을 인정받고 있다. 또한 무주산 와인의 공동 브랜드인 ‘로제스위트’는 상쾌한 풍미와 부드러운 달콤함을 지닌 것이 특징이다.또 최근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 때 건배주로 사용된 ‘청도감와인’은 국내 최초의 와인 드라마에서 소개되면서 다시 화제가 됐다. 이 와인은 와인을 보관하는 터널이 관광사업과 연결돼 큰 인기를 끌고 있으며 2006년부터 미국과 5년간 100억 원어치의 수출 계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사과 와인을 전문 생산하고 있는 한국애플리즈와 충남 예산의 은성농원은 사과 따기와 와인 만들기 등 ‘체험 프로그램’을 통해 사과 와인을 대중화하는데 주력하고 있다.전 세계 명품 와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캘리포니아 나파밸리 와인은 생산 초기 미국인들에게조차 관심을 얻지 못했다. 이 같은 상황을 역전시킨 인물이 바로 ‘와인의 달인’ 로버트 몬다비다. 로버트 몬다비는 유럽 와인에 품질로 정면 승부를 걸었다. 나파밸리 와인을 들고 프랑스로 가 블라인드 테스팅(blind tasting)을 했고 명품으로 꼽히던 프랑스 와인을 제치고 승리한 것이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미국인들은 자국 와인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미국 와인 산업도 번창할 수 있었다.또 토양이나 기후가 포도 생산에 적합하지 않더라도 명품 와인을 생산해 전 세계적으로 사랑 받은 사례도 무수히 많다. 프랑스 샹파뉴 지역은 포도주 생산에는 적합하지 않은 지역으로 평가 받았었다. 하지만 이 지역의 동 페리뇽(Don Perignon) 수사는 탄산가스를 병 속에 붙잡아둘 수 있는 마개를 개발해 명품 술인 ‘샴페인’을 개발했다. 샴페인 외에 독일과 캐나다의 아이스 와인 등은 악조건 속에서도 그 지역 특유의 맛을 내는 명품 와인으로 발전된 예다.안용갑 주류저널 편집국장은 “모든 와인을 저마다 생산지의 양분과 기후 조건, 품종에서 고유의 맛을 낸다”며 “우리 포도주를 가지고 수입 와인에 비해 질이 떨어진다고 평가하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또 “고유의 특징에 관심을 가지고 이해하려는 마인드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우리의 맛을 가지고 세계가 주목하는 와인을 만드는 한국의 로버트 몬다비, 동 페리뇽은 과연 누가 될 것인지 궁금하다.‘시장성은 충분…보다 많은 연구 이뤄져야’박원목 고려대 명예교수는 국내 최고의 토종 와인 연구가 중 한 사람이다. 미국 아이오와대에서 식물병리학을 전공한 그는 발효주 연구에 평생을 바쳐왔으며 정년퇴임 후에도 경기도 이천에 있는 자신만의 와이너리에서 연구를 거듭하고 있다.국산 와인이 그동안 인기를 끌지 못했던 이유는.사실 예전의 국산 포도주는 포도에 소주와 설탕을 넣어 만든 술이었다. 이렇게 만들다 보니 맛은 지나치게 달고 도수도 높아 부담스러운 술이었다. 이후 1990년대 후반에 유럽 와인이 수입되기 시작하자 깔끔하고 긴 잔향(殘香)의 고급스러운 맛에 소비자들이 열광하면서 ‘한국 와인은 질이 낮다’는 인식이 굳어졌다.국산 와인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있어야 하나.우리나라에서 주로 재배되는 포도는 캠벨얼리라는 품종으로 와인으로 만들기보다 바로 먹는 것에 맞는 품종이다. 포도로 만든 정통 와인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포도의 품종을 개량하는 게 가장 중요할 것이다.또한 와인을 만드는 사람들이 더 많이 공부해야 한다. 일례로 몇 해 전 알고 지내던 외국 바이어가 잘 만든 복분자주를 마셔 보고 한 업체와 1000만 달러어치 규모의 가계약을 했다. 하지만 이 바이어는 그 회사가 시중에서 판매하는 복분자주를 다시 마셔본 뒤 계약을 취소했다. 너무 달고 소주 맛이 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일본은 끝없는 연구를 통해 캠벨얼리와 유사한 콩코드 품종을 이용해 수준 높은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세계무대에서 인정받을 만한 가능성이 있는 와인은.사과 복분자 머루 등 우리 농산물로 만든 와인이다. 이들 농산물의 맛과 효능은 세계 그 어떤 지역 것보다 뛰어나다. 일례로 일부러 독일의 연구소에 우리 복분자로 만든 와인의 성분 분석을 부탁한 적이 있다. 국내 연구소에 의뢰하면 객관성을 의심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 결과 복분자주의 항산화물 함량이 보르도 와인에 비해 무려 5배 이상이나 높게 나왔다. 결국 우리 농산물로 만든 와인의 맛을 어떻게 글로벌 기준에 맞추느냐만 해결되면 상품성은 충분하다.이홍표 기자 hawlling@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