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경제연구소 ‘화려한 변신’

지난 6월 3일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사옥에서 열린 삼성사장단협의회. 정기영 삼성경제연구소 소장은 삼성 계열사 최고경영자(CEO)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경제 전망을 브리핑했다.“경기가 2분기에 저점을 통과하더라도 저성장 궤도를 벗어나기는 힘들다. 기업들은 장기전을 염두에 두고 위기관리에 주력해야 한다.” 삼성경제연구소의 경제 전망은 삼성 계열사들이 사업 계획을 짜는데 반드시 참고해야 하는 기초 자료다. 지난해 이건희 회장 퇴진과 함께 삼성사장단협의회 중심 체제로 전환하면서 그룹 ‘싱크탱크’로서 삼성경제연구소의 역할은 더 한층 강화됐다.이 연구소는 지난해 족집게 유가 예측으로 또 한 번 주목을 받았다. 작년 7월 국제 유가가 배럴당 130달러대로 올라서고 세계적인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2년 내 200달러까지 간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삼성경제연구소는 거꾸로 ‘유가 반 토막’ 의견을 내놓았다. 연구소는 “조만간 유가가 급락해 배럴당 60~70달러대까지 떨어질 것”이라며 투기 자금 이탈과 중국 성장률 둔화를 근거로 들었다. 이때만 하더라도 ‘유가 반 토막’이라는 황당한 주장에 대부분 코웃음을 쳤지만 예측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김경원 글로벌연구실장은 이 족집게 예측의 주인공이다.CJ그룹은 지난 2월 말 김 실장을 스카우트 해 CJ경영연구소장에 앉혔다. 당초 1200원대 환율에 맞춰 사업 계획을 짰던 CJ그룹은 올 초 환율이 1600원대로 뛰자 패닉 상태에 빠졌다. 주력 계열사인 CJ제일제당의 올해 곡물 수입 예상 금액만 하더라도 6억8000만 달러(약 8500억 원)에 달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경비를 쥐어짜도 수천억 원대 환 리스크에 속수무책이다. 이재현 회장은 전략 기획 기능 강화와 함께 2015~20년 그룹 포트폴리오 연구를 주문했다.지난해 글로벌 금융시장이 요동치면서 그룹별 희비가 엇갈렸다. 국제 금융시장의 흐름을 정확하게 읽고 선제적으로 대응한 곳은 비교적 큰 타격을 받지 않았다. 반면 막연한 낙관론에 휘둘린 그룹은 생존의 위기에 내몰리기도 했다. SK그룹은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대출) 부실 사태의 후폭풍을 미리 예견한 경우에 속한다.지난 2007년 11월 최태원 회장은 미국에서 터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보고 SK경영경제연구소에 심층 분석을 주문했다. 이에 따라 연구소는 11월 한 달 동안 ‘부채담보부채권(CDO) 현황과 글로벌 금융 리스크’ ‘미국발 금융 위기 가능성 점검’ ‘미국발 금융 위기 가능성 점검 및 시사점’ 등 3건의 보고서를 만들었다. 심각한 금융 위기를 예고하는 내용이었다. SK그룹은 즉각 계열사마다 각 시나리오별로 리스크 대책 마련에 돌입했다.SK에너지는 장기 차입금에 대한 환 헤지에 나서 환율 변동에 따른 환차손을 크게 줄이는 데 성공했다. 원화 가치 상승이 예상되는 시점에는 결제 기준일을 선적 기준에서 하역 기준으로 늦추기도 했다. SK그룹은 이러한 적극적인 리스크 관리를 통해 무려 1조 원대가량의 손실을 막은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 경영에서 경제연구소가 왜 필요한지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국내에 기업 경제연구소 시대가 열린 것은 지난 1986년이다. 그해 삼성경제연구소 LG경제연구원 현대경제연구원 등 ‘빅3’가 불과 몇 달 차이로 문을 열었다. 기업의 규모가 커지면서 경제 환경 변화 예측과 중·장기 비전 수립을 위한 연구, 조사 기능의 필요성이 커졌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장은 삼성경제연구소의 모델로 일본의 대표적 싱크탱크인 노무라종합연구소(NRI)를 제시했다.1997년 외환위기와 구조조정 시기를 거치면서 기업 경제연구소는 한때 위기를 겪기도 했다. 적지 않은 경제연구소들이 이 무렵 문을 닫아야 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새로운 전성기를 맞고 있다. 기업 경제연구소는 시대별로 뚜렷한 특징을 나타낸다. 1980년대 설립된 연구소들은 거시경제, 산업 분석, 경영 컨설팅을 모두 아우르는 매머드급 대형 연구소가 대부분이다.삼성경제연구소 LG경제연구원 현대경제연구원이 여기에 속한다. 반면 1990년대는 업종별 특화 연구소의 시대다. 현대차그룹 한국자동차산업연구소(자동차), 포스코경영연구소(철강), KT경제경영연구소(통신) 등이 이 시기에 탄생했다. 1990년대 후반 혹독한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기업 연구소의 흐름은 내실에 충실한 ‘강소형’ 연구소 중심으로 바뀐다. 연구 영역도 그룹의 전략적 요구에 좀 더 밀착하는 방향으로 짜여졌다.기업 연구소는 2000년대 들어 양적으로도 크게 증가했다. 박태일 현대경제연구원 본부장은 “이는 종합기획실 등이 사라지면서 그룹 구심적 역할을 할 싱크탱크의 필요성이 커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또한 경제 상황이 급변하면서 밀착 모니터링과 신속한 대응의 필요성이 커졌다는 것도 한몫했다는 설명이다.김정호 CJ경영연구소 상무는 “요즘 기업의 가장 큰 고민은 신사업 발굴과 중·장기 비전”이라며 “모두 내부 역량과 특성에 맞춘 섬세한 접근과 꾸준한 연구가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이를테면 신규 사업의 경우 다른 기업에는 좋지만 해당 기업에는 맞지 않을 수도 있는데 외부 연구소는 이런 고려를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본시장통합법 시행으로 ‘금융시장의 대변혁’을 앞둔 금융권도 경제연구소 강화에 경쟁적으로 나서고 있다.장승규 기자 skjang@kbizwee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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