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부처 24시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5월 20일 취임 100일째를 맞았다. 전날인 19일 저녁에는 윤 장관이 그동안의 성과와 앞으로의 방향성을 소개하는 기자간담회가 과천 청사 기자실에서 열렸다.‘100일 기자간담회’라는 말이 붙긴 했지만 실상 이날 나온 질문과 답변들은 새로운 것이 없었다. 가장 큰 이슈인 환율 하락, 과잉 유동성, 부동산 과열, 실물경기지표 등에 관해 장관의 의견을 묻는 질문들이 쏟아졌고 윤 장관은 이에 대해 평소처럼 원론적인 대답만 할 뿐이었다. 그러면서 언론사들의 협조를 간곡히 부탁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너무 성급하게 기사를 쓰지 말고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는 정부의 입장도 이해해 달라는 얘기도 덧붙였다.사실 윤 장관은 이렇듯 원칙적인 수준에서 벗어나지 않는 애매한 화법으로 그동안 대처해 왔다. 4월 임시국회에서도 그랬고 각종 강연과 기자간담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그의 태도로 경제에 관한 정부의 확실한 기조가 뭔지 모르겠다는 불만도 많았지만 오히려 이런 모습이 2기 경제팀이 시장의 신뢰를 얻는데 성공한 요인이 됐다. 솔직하면서도 신중한 그의 화법이 시장 안정에 기여했다는 얘기다.윤 장관의 화법이 돋보이는 것은 전임 강만수 전 장관과 확연히 다른 어법으로 시장에 접근했기 때문이기도 하다.강 전 장관은 “10년 동안 야인으로 있으면서 소득이 없었는데 종부세만 냈다(2008년 2월 국회 인사 청문회)”를 시작으로 달러화가 급등세를 보이던 지난해 4월 16일에는 한 세미나에 참석해 “투기 세력보다 더 나쁜 세력은 지식을 악용해서 선량한 시장 참가자를 오도하고 그걸 통해 돈을 버는 ‘사기꾼’”이라는 등 직설적인 발언을 이어나갔다.이로 인해 기자들 사이에 의도하지 않은 ‘기사 풍년’이 들기도 했다. 장관이 솔직하고 과감하게 발언해 주니 언론사들이 앞 다퉈 보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강 전 장관은 신중하지 못한 발언으로 불안한 시장을 더욱 교란시킨다는 비판을 받았다. 결국 시장의 불신이 쌓이면서 그도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다.이런 연유로 재정부 안팎에서는 윤 장관과 강 전 장관을 비교하는 말들이 많이 나왔다. 특히 두 사람은 행시 합격 시기는 다르지만 서울대 법대 65학번 동기인데다 재무부와 재정경제원 시절 함께 근무한 사이인지라 서로의 장단점을 대비시켜 보는 사람이 꽤 있는 것이다.게다가 재정부 공무원들, 그리고 기자단과 함께 100일 기념 저녁식사 자리가 있었던 19일은 공교롭게도 강 전 장관이 함께 일했던 재정부 국장들과 만나기로 미리 약속한 날짜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공무원들이 더 많이 가는 자리가 ‘실세’라고 수군거리기도 했다.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승자’와 ‘패자’가 확연하게 엇갈릴 것이라는 전망은 빗나갔다. 윤 장관이 실국장들에게 “초대받은 사람은 무조건 강 전 장관에게 가라”고 명령을 내린 것.사실 두 사람은 서로 ‘단짝’이라고 부를 정도로 가까운 사이다. 대학 시절 학생회 활동도 함께했으며 행시에 합격한 뒤에도 경쟁심을 키우기보다 항상 서로를 격려하며 소주잔을 기울이는 관계였다.전해지는 바로는 강 전 장관은 그날 후배 공무원들에게 감사패를 받았다고 한다. 물론 시장의 인심을 얻지 못하고 밀려난 그에게 경제를 회복시켜 줘서 고맙다는 뜻으로 준 것은 아닐 게다. 결과야 어떻든 간에 재정부 안에서 만큼은 후배들의 마음을 얻었던 인물인 만큼 장관 재임 시절의 노고에 대한 감사는 있어야 한다는 취지일 것이다.이날 저녁 자리에 참석한 한 재정부 관계자는 “마음이 여리고 섬세한 편인 강 전 장관이 감사패를 받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며 “위기 대응 방식에 대한 국민들의 평가는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지만 후배 공무원들의 애정만큼은 제대로 표현해 드리고 싶었고, 윤 장관도 이심전심으로 공감했던 것”이라고 말했다.박신영·한국경제 기자 nyus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