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잇는 기업들의 적자 행진
일본의 최대 광고 회사인 덴쓰는 업계에서 가미사마(神樣: 신 같은 존재)로 불린다. 광고는 물론이고 이벤트 행사 스포츠 중계 등에서 덴쓰를 통하지 않고는 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업계에서의 이처럼 확고한 입지 덕택에 덴쓰는 100년이 넘는 역사 동안 한 번도 적자를 내지 않은 기업으로도 유명하다.그러나 가미사마 덴쓰도 최근의 경기 불황은 피하지 못했다. 덴쓰가 창업 후 106년 만에 처음으로 적자를 기록한 것이다. 덴쓰는 2008 회계연도(2008년 4월~2009년 3월) 결산에서 204억 엔(약 2500억 원)의 당기순손실을 기록했다. 전년에는 362억 엔의 순이익을 냈던 회사다. 덴쓰가 적자를 면치 못했던 건 주력인 광고 사업의 침체 골이 깊었던 데다 보유하고 있는 광고 관련 기업의 주식 등 투자 유가증권 가격이 떨어져 511억 엔의 평가손실을 본 것이 결정적이었다.요즘 일본 업계는 화창한 봄날과 어울리지 않게 우울하기 그지없다. 지난 3월 말 결산 실적이 줄줄이 적자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기업이 당초 예상보다 적자 규모가 커 충격은 더하다. 문제는 지난해뿐만 아니라 올해도 실적 전망이 결코 밝지 않다는 점이다. 상당수 기업들이 2009 회계연도에도 적자를 예상하고 있다. 세계 경기 회복이 그만큼 더딜 것이란 전망 때문이다.= 지난해 결산 실적 발표에서 가장 주목된 회사는 역시 일본의 최대 기업인 도요타자동차였다. 일찌감치 창업 후 첫 영업적자를 낼 것이라고 공표했기 때문에 관심은 적자 규모였다. 최근 발표된 도요타의 2008 회계연도 당기순이익은 4369억 엔(약 5조5000억 원) 적자였다. 당초 예상했던 적자 폭 3500억 엔보다 1000억 엔 가까이 많은 것이다.매출액은 20조5296억 엔으로 전년(26조2892억 엔)보다 21.9% 감소했다. 영업적자는 원래 예상했던 4500억엔 보다 다소 늘어난 4610억 엔에 달했다. 세계 경기 침체로 인한 자동차 판매 감소와 엔고에 따른 채산성 악화가 심각했던 때문이다. 도요타는 2007 회계연도엔 사상 최대인 2조2704억 엔의 영업이익과 1조7179억 엔의 순이익을 기록했지만 경제 위기로 일시에 적자로 반전됐다.도요타는 특히 소형차 수요가 늘어난 중국 시장에서도 부진해 취약성을 보였다. 올 1분기(1~3월) 중국의 전체 소형차 판매는 전년 대비 4% 증가했지만 도요타는 판매가 17% 급감했다. 이 같은 실적은 같은 기간 중국 매출이 17% 늘어난 미국의 제너럴모터스(GM)보다 못한 것이다. 일본의 혼다도 1분기 중국 판매가 29% 늘었다.일본 자동차 업계에선 도요타뿐만 아니라 다른 회사들도 실적이 참담했다. 닛산자동차는 당기순손실이 2337억 엔(약 2조9000억 원)에 달했다. 닛산의 연간 실적이 순손실로 돌아선 것은 카를로스 곤 최고경영자(CEO)가 취임한 지난 1999년 이후 처음이다. 이 회사는 2007 회계연도엔 4822억 엔의 순이익을 기록했었다.2008 회계연도 매출액은 8조4369억 엔으로 전년 대비 22% 줄었다. 영업이익도 1379억 엔의 적자를 나타냈다. 닛산이 영업손실을 기록한 것은 1994 회계연도 이후 14년 만이다. 닛산은 2008 회계연도에 전 세계에서 총 341만1000대의 자동차를 팔았지만, 이는 전년에 비해 9.5% 감소한 것이다.일본의 10대 자동차 제조업체 중 흑자를 낸 곳은 스즈키와 혼다 다이하쓰 등 3개사 뿐이다. 스즈키는 2008 회계연도 결산에서 274억 엔의 당기순이익을 냈다. 그러나 이것도 전년에 비해선 66%나 감소한 것이다. 스즈키의 매출액은 전년보다 14% 감소한 3조48억 엔, 영업이익은 49% 줄어든 769억 엔이다.2009 회계연도에도 일본 자동차 회사들의 전망은 어둡다. 도요타는 올해도 각각 8500억 엔의 영업적자와 당기순손실을 낼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매출도 16조5000억 엔에 그쳐 전년 대비 19.6% 줄어들 것으로 내다봤다. 이에 따라 도요타는 고정비를 삭감하고 경영 합리화를 추진해 2010 회계연도에는 영업적자에서 탈피한다는 전략이다. 올해 설비 투자액도 9000억 엔 정도로 전년보다 5000억 엔이나 줄일 계획이다.= 전기·전자업계도 사정은 자동차 업계와 마찬가지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히타치제작소가 일본 제조업계 사상 최대의 적자를 낸 사실이다. 히타치는 2008 회계연도 결산 결과 7880억 엔(약 10조 원)의 당기순손실을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당초 예상인 7000억 엔에서 크게 늘어난 것이다. 일본 제조업체 사상 가장 큰 적자 규모이기도 하다. 금융회사 중에선 일본 최대 증권사인 노무라홀딩스가 지난 회계연도에 7094억 엔의 적자를 냈다.히타치는 지난 회계연도에 매출은 전년보다 11% 감소한 10조 엔, 영업이익은 전년 대비 63% 줄어든 1270억 엔을 기록했다. 영업이익을 냈는데도 불구하고 큰 폭의 당기순손실을 본 것은 급격한 엔고로 인한 환차손과 구조조정에 따른 특별손실이 많았던 때문이다. 또 당분간 흑자 전환이 어렵다고 보고, 최종 이익에 반영되는 이연 법인세 자산(향후 흑자 때 감면받는 법인세액)을 포기한 것도 원인이다.히타치는 이에 따라 해외 TV 시장에서 철수하는 등 대대적인 사업구조 개편을 단행하기로 했다. 가와무라 다카시 히타치 회장 겸 사장은 최근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앞으로 우리만의 강점을 부각시킬 수 있는 사업을 중심으로 ‘선택과 집중’ 전략을 추진할 것”이라며 “가격경쟁 심화로 채산성이 나쁜 액정표시장치(LCD) TV 수출 사업은 더 이상 핵심 사업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일본 내 LCD TV 시장점유율 1위인 샤프도 52년 만에 적자를 냈다. 샤프는 2008 회계연도에 1258억 엔(약 1조6000억 원)의 순손실을 봤다. 이 회사는 전년도엔 1019억 엔의 흑자를 기록했었다. 샤프가 연간 결산에서 최종 적자를 내기는 1956년 도쿄증시에 상장한 이후 처음이다.세계 경기 침체로 주력 제품인 LCD TV의 판매가 줄어든 데다 LCD 패널 가격이 하락한 게 결정적 요인이다. 매출은 2조8472억 엔으로 전년 대비 17% 감소했다. 영업손익은 554억 엔의 적자를 나타냈다. 여기에 공장 재편 등과 관련된 구조조정 비용 584억 엔을 반영했다.= 전대미문의 적자 경영에 빠진 일본 기업들은 직원들의 상여금은 물론 주주들에 대한 배당마저 줄이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이 자체 조사한 결과 일본 상장기업들은 올해 여름 보너스를 평균 15.2% 줄일 예정이다. 이는 비교가 가능한 1977년 이후 첫 두 자릿수 감소다. 특히 전년도 대비 감소 폭은 아시아 외환위기가 닥쳤던 1999년의 5.9%를 크게 웃도는 사상 최대 규모다.이에 따라 봉급생활자들의 소득이 줄면서 국내 소비 위축마저 우려되고 있다. 제조업에서는 모든 업종에서 보너스 지급액이 줄고, 특히 자동차와 기계 등 수출형 산업에서는 감소율이 20%를 넘었다.또 일본 상장사의 절반 가까이는 올해 주주들에 대한 배당을 크게 줄일 계획이다. 상장사 397개사의 배당 계획을 보면 무배당을 포함해 전년보다 배당을 줄이기로 한 기업은 41%에 달했다. 배당을 늘리는 기업은 9%에 그쳤다. 나머지 50%는 전년과 똑같은 수준으로 배당(무배당 포함)하기로 했다.차병석·한국경제 도쿄 특파원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