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에 대한 열정만큼은 늙지 않죠’

구자승·장지원 부부 화가

30여 년간 함께 한길을 걸어오고 있는 부부, 구자승 장지원 화가는 미술계에서 가장 대표적인 부부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서로의 예술을 지지하며 동시에 각자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흔들림 없이 키워 온 두 화가의 지치지 않는 예술혼을 들여다보자.40여 년 전, 군대에 다녀와서 대학에 복학한 젊은 청년의 눈에 띈 후배 여학생이 있었다. 언제나 가장 열심히 그림을 그리던 그녀가 늘 눈에 밟혔다.“같은 과 학생들과 함께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다 보면 언제나 가장 마지막에 남는 건 그 여학생과 저, 둘 뿐이었죠.”(구자승) 그림에 열심인 그녀가 너무나 예뻐 보였고 그림을 그리는 그녀에게 사랑을 느꼈다. 여학생도 마찬가지였다. 젊은 나이에도 뚜렷한 자기만의 예술 세계가 있는, 열정적으로 그림에 푹 빠져 있는 청년이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사실 주변에 그림 그리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림 그리는 사람과는 절대 결혼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었죠.(웃음) 어찌하다 보니 조건이나 환경과 상관없이 그저 저 못지않게 그림을 사랑하는 저 사람이랑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에 결혼하게 된 거죠.”(장지원)주변의 우려를 무릅쓰고 결혼했고 아이들을 낳았고 아이들까지 데리고 함께 유학 생활도 했다. “어디 유학생활만인가요? 결혼한 후 내내 함께 공부하고 함께 작업하는 일상의 연속이었죠. 물론 그런 만큼 서로가 많이 힘들었던 것도 사실이죠. 부부가 같은 길을 걷는다고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많지만, 사실은 서로 고생길이거든요.(웃음) 하지만 같은 길을 가기 때문에 같이 고민하고 같이 울면서도 곁에 있어 주는 서로가 있었기에 지금까지 오랜 시간 동안 함께 예술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구자승) 구자승 작가의 말처럼 두 사람은 서로를 비평하고 또한 격려하며 30년이 넘게 한길을 걸어왔다.지난 5월 14일부터 분당 앤갤러리(N gallery)에서 이들 부부의 8번째 부부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부부 전시회는 개인전과 다르고 보통의 2인 전시회와도 다르죠. 동반자로서, 비평가로서, 또 부부로서 서로의 작품 세계를 결산한다고 볼 수 있죠.”(구자승) ‘사랑합니다’라는 타이틀로 오는 6월 7일까지 계속되는 이 전시회는 그동안 이들 부부의 작품을 사랑해 왔던 이들을 위한 보답이자 예술에 대한 각자의 열정, 서로에 대한 사랑을 담고 있는 감미로운 연서(戀書)다. 구자승 작가의 유화 작품 20여 점과 드로잉 50점, 장지원 작가의 작품 20여 점 등 총 100점에 가까운 작품이 전시되는 대규모 전시회다. 특히 구자승 작가의 드로잉 북과 장지원 작가의 화집 출판을 기념하고 있어 이들 부부에게는 한결 더 각별한 의미를 지니는 전시회라고 할 수 있다.“특히 남편과 달리 이번 화집은 제 생애 첫 번째 화집이거든요. 30년 동안의 작품 세계를 정리한 듯한 화집이라 더 감격이 크죠.”(장지원)누구보다 가까이서 서로의 작품 활동을 지켜봐 온 이들이기에 서로에 대한 평을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장지원 작가는 구자승 작가의 작품들 중에서도 특히 정물화들을 좋아한다고 한다. “동료 예술가로서 봐도 딱히 꼬집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하죠. 가짜 골동품을 그리면 영락없이 가짜 골동품 같고, 진짜 골동품을 그리면 진짜 골동품의 느낌이 그림에서 그대로 느껴질 정도니까요. 천부적인 재능이란 이런 게 아닐까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장지원)굳이 아내인 장지원 작가의 평이 아니더라도 구자승 작가의 극사실 정물화들은 세밀하면서도 사실적인 묘사와 깊이감이 느껴지는 색채, 응집력 있는 구성 등으로 정평이 나 있다. 실제로 한국 구상미술계의 대표 작가로 인정받는 구자승 작가의 작품들은 미술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는 문외한이 봐도, 마치 눈앞에 그대로 놓인 정물을 보는 듯한 사실감과 그 깊은 색감에 감탄을 금할 수 없을 정도다.“인물 풍경 정물 등 골고루 작업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중에서도 정물이야말로 ‘나’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분야인 것 같아요. 내 마음과 내 사상, 내가 추구하는 예술 세계가 가장 잘 나타난다고 할까요? 오랜 시간 동안 정물화에 매달려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라고 할 수 있죠.”(구자승)그렇다면 남편인 구자승 작가가 보는 화가로서의 아내는 어떤 모습일까. “지독한 노력파죠. 작품을 대하는 진지함과 그 철저하고 투철한 작가 정신에는 같은 화가로서 존경심을 느낄 정도예요. 이미 벽에 걸린 작품조차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떼어내고 작업할 정도니까요.”(구자승)남편인 구자승 작가의 말에 따르면 장지원 작가는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질릴 정도로 치열한 자기와의 싸움을 거쳐 작품을 탄생시키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장지원 작가의 작품들은 너무나 화사하고 심지어 몽환적인 느낌을 자아내기 때문에 언뜻 보면 작가의 그 지독한 노력이 잘 나타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작품에 한발 더 다가서서 가만히 그 작품을 들여다보면 색 하나하나, 이미지 하나하나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작가의 흔적과 함께 그 치열한 예술혼의 무게감이 느껴진다.“화사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그림들이지만 사실 밑 작업이 많아 탄생하기까지의 그 과정은 정말 많이 힘들어요. ‘숨겨진 차원’ 시리즈로 다양한 꽃그림을 그려오고 있지만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의 꽃을 그린 것이 아니라 보고 나서 느끼고, 그 느낌을 다시 대상에 투영해 표현해 내는 것이기 때문에 그만큼 작업 시간도 길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죠.” 하지만 고통스러운 만큼 완성해 내고 나서의 보람이나 성취감이 크기 때문에 장지원 작가는 결코 그림을 포기할 수 없었다고 덧붙인다.“아마 남편도 마찬가지겠지만 저 역시도 캔버스 앞에 앉아 있을 때에야 비로소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기뻐도 앉고, 슬퍼도 앉았죠. 그래서 남편이나 저나 서로에게 가장 소중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가족을 제외한다면 아마 작품일 거예요.”(장지원)몇 년 전 대학교수에서 퇴직한 구자승 작가에 이어 올해 초에는 장지원 작가가 대학에서 명예퇴직했다. 그래서 부부는 전시회 직전까지 충주의 공동 작업실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냈다. 작업실이 양쪽으로 구분돼 있기 때문에 서로 작업실에 들어가고 나면 8시간 넘도록 얼굴 한 번 못 볼 때도 많았다. 그만큼 서로 작품에 집중하는 시간이 많다는 이야기다. “시간에 쫓겨 살아온 지금까지와 달리 이제는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쫓기지 않는 상태에서 작업할 수 있게 돼 좋아요. 앞으로는 작품에만 전념해 더 성숙한, 더 좋은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장지원)“저는 이제 몇 년 뒤면 일흔이에요. 그야말로 황혼기에 접어든 셈이죠. 이제는 정리하는 마음 자세로 그림을 그리려고 해요. 하지만 아직 더 해 보고 싶은 작업이 많아요. 정물에서 벗어나 드로잉을 접합한 회화 작업, 즉 유화로 드로잉 작업을 해 보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스스로를 황혼기라고 말하는 부부, 하지만 이들 부부의 예술혼은 아직 늙지 않았다. 아직도 서로가 가장 멋져 보이고, 가장 예뻐 보일 정도로 사랑도 늙지 않았다. 그러기에 이들 부부 화가가 그려낼 다음 작품들을, 다음의 부부 전시회를 기대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김성주·객원기자 helieta@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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