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끼리 비법 전수…‘최고 맛’ 유지

칠형제우리감자탕 이정만 대표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덕이동의 ‘칠형제우리감자탕’ 이정만 대표(사장) 형제 스토리는 사실 모든 ‘가족형 창업’을 꿈꾸는 이들에게는 완벽한 성공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 칠형제우리감자탕 브랜드로 개업한 형제자매 친척들 모두 지금은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장은 “쉽게 이뤄진 것이 아니다”며 성공의 어려움을 강조하고 있다.칠형제우리감자탕은 미식가들 사이에서는 손꼽히는 맛집으로 통한다. 독특한 창업 스토리도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창업자이자 맏형인 이정만 사장은 스물한 살 때 무작정 상경해 음식점 주방을 전전했다. 1975년 중식 조리사 자격증을 딴 뒤 중식 한식 양식을 가리지 않고 음식을 연구하며 자신만의 음식점을 차릴 꿈을 키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종로구 이화동에 소문난 맛집이 있다고 찾아간 것이 인연이 됐다. 16㎡ 남짓한 공간에 테이블 6개가 전부인 식당이었지만 감자탕 맛이 기가 막혔던 것. 점심때마다 식당 앞에는 줄이 이어졌다.식당 주인은 박완소라는 65세가량의 노인. 이 사장은 무작정 박 노인에게 ‘비법을 전수해 달라’며 졸랐지만 “조상 때부터 이어진 맛이지 뭐”라는 대답만 들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사장은 포기하지 않고 매일 식당을 찾아 감자탕을 주문하며 눈도장을 찍기 시작했다. 그의 정성이 하늘에 닿았던 듯 어느 날 박 노인은 “가게를 인수하면 비법을 알려주겠다”고 말했다. 누구나 창업을 처음 시작할 때 설렘과 두려움을 느끼듯 이 사장도 엄청난 제안에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가게 인수를 결심했다.그러나 기쁨도 잠시, 건강이 좋지 않았던 박 노인은 가게를 넘긴 지 2주 만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이미 자신의 죽음을 예견했던 박 노인은 자신이 죽은 뒤에 가게를 접을 생각이었지만 ‘운명적’으로 이 사장과의 만남이 이뤄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 사장은 비법을 완전히 전수받지 못한 상태. 맛이 예전 같지 않다며 줄 서던 고객들이 뚝 끊겼다. 이 사장이 그동안 배운 것이라곤 검정 토종 돼지의 뼈와 강원도 감자를 사용한다는 것뿐이었다. 박 노인은 비법을 전수해 주지 못했지만 그 실마리와 숙제를 안겨준 것이다.이후 6개월간 비법을 찾기 위한 이 사장의 시행착오가 계속됐다. 마침내 박 노인의 맛을 재현하는데 성공했다. “박 노인이 살아 돌아왔나 보다”며 고객들의 줄이 다시 이어지기 시작했다. 가게 사정으로 명륜동 낙원동 관철동 등으로 옮겨 다니며 ‘이정만 전성시대’가 활짝 열리기 시작했다.막내 동생 이대복 씨가 합류하면서 이정만 사장의 비법은 형제들에게 전수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비법 전수는 쉽게 되지 않았다. 10년 넘게 주방에서 잔뼈가 굵은 이 사장과 달리 ‘초짜’였던 동생의 수업은 청소와 설거지 등 허드렛일로부터 시작됐다. 매일 40kg이 넘는 솥을 옮기고 영업이 끝나면 수업이 시작됐다. 작은 실수로 국물 맛이 조금이라도 이상해지면 팔뚝만한 돼지 뼈가 날아왔다. 마치 영화 ‘취권’의 무술 수련을 연상시킬 정도로 고달픈 수련이었다. 1982년 미스터 코리아 전국대회 준우승을 차지할 정도로 우람한 이 사장의 몸집을 생각할 때 분위기가 어땠는지 상상에 맡길 일이다.혹독한 수련 끝에 이대복 씨는 9년 만에 군포에 자신의 가게를 차릴 수 있었다. 이때 처음으로 ‘칠형제우리감자탕’이라는 상호가 생겼다. 알려진 것과 달리 처음부터 일곱 명이 창업한 것은 아니었다. 이정만 사장은 삼남일녀로 칠남매도 아니다. 그런데 왜 ‘칠형제’가 됐을까. “우리 가게의 맛은 100년 넘게 이어 온 전통의 맛입니다. 가족을 통해 전수됐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형제’라는 말을 생각했는데, 실제 형제처럼 ‘사형제’는 이상해서 삼형제를 생각해 보기도 했는데, 한국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7을 붙인 ‘칠형제’가 가장 좋았습니다. ‘칠공주’라는 말도 있듯이 가장 기억하기 쉽고 와 닿는 이름이었습니다.” 이 사장의 말이다.이어 외사촌 동생 배성규 씨가 합류했다. 역시나 혹독한 수련을 통해 배 씨가 정착한 곳은 미국 뉴욕. 원래 뉴욕에서 다른 음식점을 하던 배 씨는 사촌 형들의 감자탕 맛을 보더니 “이거다”라고 무릎을 쳤었다고 한다.형제들의 잇따른 창업이 이어지면서 이정만 사장의 둘째 동생 이수만 씨도 동참했다. 밤무대 악사였던 이 씨는 분위기를 의식한 듯 “나는 감자탕은 절대 안 할 것”이라고 했지만 형제들의 성공을 보면서 마음을 바꾸게 됐다. 수만 씨는 막내 동생 대복 씨에게서 배워 수모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다시 밤무대로 돌아가 버릴까’라고 생각도 많이 했지만 오기로 버틴 끝에 시간을 앞당겨 ‘조기 졸업’할 수 있었다.창업 대열에는 이어 누나인 이복순 씨와 사촌 형인 이태웅 씨가 가세하면서 결국 ‘칠형제’가 됐다. 이 사장은 이미 이런 상황을 예견하고 있었을까. “이 사장님이 동생들에게 먼저 권유한 것인가요, 아니면 동생들이 먼저 하겠다고 찾아왔나요?”라는 물음에 이 사장은 “내가 먼저 구상한 것”이라고 대답했다. 사촌 형 이태웅 씨가 작고한 뒤 태웅 씨의 동생 이기만 씨가 가게를 이어받았다 지금은 정리한 상태다. 지금은 막내 이대복 씨가 전수자로 자신의 친구를 통해 인천에 3개의 점포를 운영하고 있다.지금은 수도권에 7개의 점포가 있지만, 이정만 사장은 브랜드 확장에는 적극적이지 않은 편이다. 지금도 그는 운전 중 신호 대기 동안 내비게이션에서 ‘칠형제우리감자탕’을 검색하곤 한다. 브랜드를 도용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다.언뜻 생각하기에 이 정도의 명성을 얻었다면 프랜차이즈를 통해 ‘떼돈’을 벌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 사장의 생각은 다르다. “맛을 유지하려면 혹독해야 합니다. 한 곳에서만 맛없다고 소문나면 모든 ‘칠형제우리감자탕’ 가게에도 피해가 오기 때문이죠. 맛 유지가 안 되는 곳은 오히려 간판을 내리게 한 곳도 있어요.” 실제로 그는 형제들이 하는 가게 두 곳을 없애기도 했다. 지금도 ‘품질’ 면에서 조금만 소홀해도 가차 없이 매를 드는 것이다. 전국에서 ‘브랜드를 빌려 달라’ ‘비법을 전수받고 싶다’고 하루가 멀다고 찾아오곤 하지만 “우리는 프랜차이즈 안 한다”며 딱 잘라 거절하고 있다.그는 가족 창업에서도 지킬 것은 철저하게 지켜야 장기간 유지된다는 철칙을 지키고 있다. “창업하는 10곳 중에서 8곳이 망하는 이유는 게을러서입니다. 처음에는 모두 장사가 잘돼요. 그런데 조금만 잘되기 시작하면 가게는 뒷전이고 폼을 잡기 시작합니다. 비싼 차를 뽑기 시작하고 골프를 하러 다녀요. 돈이 들어오면 사람이 달라집니다. 거기서 관리가 되지 않으면 결국은 쓰러져요. 내실이 없는 사람은 결국 망하게 됩니다.”이런 이유에서 그는 형제들에게 따끔한 충고를 아끼지 않는다. “폼 잡지 마라. 돈 벌었다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마라”는 것이 그것. 돈 있는 곳에 분란이 생긴다는 말이 있지만 이 사장의 형제들 사이에는 분란이 없다. 이 사장이 군기를 확실하게 잡아 놓았기 때문이라고.그는 형제들에게 혹독하게 수련을 시킨 것처럼 자기 관리도 철저하다. 30년 넘게 사업을 해 오면서 모은 재원으로 개발 사업을 구상하고 있는 그지만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아침 10시면 가게에 나온다. 오후 2시면 어김없이 헬스클럽에서 운동을 한다. 그의 부인도 빠지지 않고 가게를 지키고 있다.인터뷰를 마치고 이 사장은 자신이 만든 작은 발명품을 보여주었다. 가로 세로 30cm 크기의 패널을 보여주며 “직접 만든 스피커”라고 설명했다. 파이프 안에 선을 숨긴 것이 핵심이다. 또 높은 천장의 램프를 갈아 끼울 수 있는 막대도 보여주었다. “음식을 만드는 것도 같은 이치”라며 “끊임없이 아이디어를 생각하고 만들어 보는 것이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돈을 벌기 위한 브랜드가 아니라 실력으로 쌓아올린 브랜드의 차이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짐작이 가는 말이었다.우종국 기자 xyz@kbizwee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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