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사람들의 은행’ 마이크로크레디트
경기도 안산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고선기(가명) 씨는 지난해만 생각하면 지금도 꿈만 같다. 상반기만 하더라도 그는 식당을 운영하다 사기를 당해 아무 희망도 없이 주차 관리와 음식 배달로 하루하루를 이어가야 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TV에서 마이크로크레디트 사업을 하는 ‘신나는 조합’의 소식을 접했다. 담보 없이도 창업 자금을 대출해 준다는 말에 가슴이 설레었다.고 씨의 기대는 헛되지 않았다. 재기하겠다는 의지가 넘치고 식당도 경영해 본 그에게 신나는 조합은 선뜻 대출을 해 줬다. 마침내 지난해 11월, 그는 꿈에 그리던 식당을 다시 열 수 있었다. 다행히 장사도 잘되고 있다. 가게가 잘돼 돈을 벌면 떨어져 살고 있는 아내와 살림을 합치고 어려운 이웃을 돕는 데도 앞장설 생각이다. 신나는 조합이 내민 손길이 그의 삶을 지옥에서 천당으로 끌어올린 셈이었다.마이크로크레디트는 제도권 금융회사에서 대출을 받을 수 없는 빈곤층에게 무담보로 소액의 자금을 낮은 금리로 대출해 주는 사업이다. 이를 통해 금융 소외 계층에게 삶에 대한 희망을 주고 사회의 빈곤 문제 해소에도 일익을 담당한다는 취지다. 1976년 방글라데시의 무하마드 유누스 박사가 창안해 만든 그라민은행이 효시이며 현재는 한국은 물론 전 세계 곳곳에서 빈곤 퇴치를 위한 대안으로 자리 잡고 있다.사실 은행이나 보험 등 제도권에서 보면 말도 안 되는 방식이다. 담보도 없고 일정한 수입도 없는 사람에게 신용 대출을 한다는 것은 리스크가 너무 커서 제도권 금융의 논리로 보면 ‘망하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유누스 박사가 처음 마이크로크레디트를 시작할 때도 걱정하는 시각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아무런 담보도 받지 않았지만 대출자 대부분이 꼬박꼬박 원금과 이자를 상환했다. 그라민은행의 상환율은 무려 99%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우리나라에도 여러 곳의 마이크로크레디트 은행들이 활동하고 있다. 사단법인 한국 마이크로크레디트의 ‘신나는 조합’이 1999년 그라민은행을 모델로 처음으로 마이크로크레디트를 도입한 후 2003년 사단법인 함께 만드는 세상이 ‘사회연대은행’의 문을 열었다. 그 후 아름다운재단이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사장의 후원으로 ‘아름다운세상기금’을 만들었으며 지난해에는 하나금융그룹이 마이크로크레디트를 위해 ‘하나희망재단’을 세우며 빈곤 탈출에 일조하고 있다.마이크로크레디트의 핵심은 역시 ‘가난한 사람들의 은행’이라는 점에 있다. 아무리 가난해도 무담보로 대출을 받을 수 있다. 오히려 가난한 동시에 돈이 절실할수록 대출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가난하다고 아무에게나 대출해 주지는 않는다. 자활 의지가 높고 성공 가능성이 높아야 한다는 조건을 통과해야 한다.재기에 대한 열정이 부족한 사람에게 돈을 빌려줘 봐야 소용이 없기 때문에 대출 심사는 까다롭게 이뤄진다. 사업계획서도 제출해야 하고 현장 조사를 벌이기도 한다. 준비가 부족한 대출자에겐 좀 더 준비를 갖춰 다시 신청하라고 조언한다.박상금 사회연대은행 사업개발본부장은 “사업 성공의 열쇠는 결국 사업주에게 있기 때문에 열정과 의지가 매우 중요하다”며 “결국 살아남아야 자활도 되는 거고 마이크로크레디트 기관도 지속 가능하기 때문에 준비가 덜 된 신청자는 대출을 거부하고 있다”고 전했다.저금리 대출이라는 점도 공통적이다. 대개 연 2~4%의 대출 금리를 적용하고 있다. 고금리를 적용할 경우 상환율이 떨어질 우려가 있는 데다 마이크로크레디트가 돈을 벌기 위해 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저금리를 유지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원금 상환 기간은 4~5년 정도이고 대출 금액은 최대 2000만 원 정도다.대출 후에도 관심을 끊지 않는다. 사업이 성공할 수 있도록 각종 사후 지원을 한다. 재무회계 교육도 하고 기술이 필요한 경우 보수교육도 실시한다. 또 대출을 받아 창업한 경우 매출이 기대에 미치는 않으면 목표 수익 달성을 위한 계획을 설계해 주기도 한다. 대출에서 컨설팅까지 자활의 처음과 끝을 원스톱으로 관리해 줘 한 사람의 어엿한 기업인으로 자리를 잡게 해 주는 셈이다.그라민은행처럼 한국의 마이크로크레디트도 높은 성공률을 보이고 있다. 신나는 조합의 경우 지난 10년간 159개 공동체에 500명가량을 지원했는데 이 중 93%가 사업을 유지하고 있다. 사회연대은행의 상환율도 90%대에 육박하고 아름다운재단의 대출 상환율은 80%에 이른다.경제가 어려워지면서 마이크로크레디트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금융 소외 계층이 800만 명을 훌쩍 넘어버렸을 정도로 취약 계층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신나는 조합의 경우 올 초 문의가 폭주하는 바람에 홈페이지가 다운될 정도였다. 하지만 이들에게 대출해 줄 수 있는 재원은 제한적이기 때문에 대부분 신청자들이 발걸음을 돌려야 하는 상황이다.신나는 조합의 조한 사무국장은 “올 초 1차 사업의 경우 대출해 줄 수 있는 기금은 3억 원이었는데 신청 금액은 50억 원에 달했다”며 “마이크로크레디트의 역사가 10년에 이르지만 기금 규모나 인프라 측면에서 부족한 면이 많아 제한된 환경에서 마이크로크레디트의 취지를 최대한 살리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전했다.마이크로크레디트의 자산은 대개 정부나 기업 등의 기금으로 이뤄져 있다. 개인 후원자들의 관심도 꾸준히 늘고 있지만 액수는 아직 많지 않은 상황이다. 사회공헌 활동을 활발하게 하는 기업들이라도 마이크로크레디트를 적극적으로 후원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재난 지역에 대한 성금이나 소아암 환자 돕기 등에 비해 홍보 효과가 크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경기가 어려워지면서 기업의 후원도 줄어들 수 있다고 관계자들은 우려하고 있다.반면 정부 쪽에서 나오는 기금은 확대되고 있다. 사회복지 차원에서 정부가 예년에 비해 많은 예산을 집행할 예정이다. 보건복지가족부는 2005년부터 실시해 온 마이크로크레디트 사업인 ‘희망키움뱅크’의 올해 예산을 지난해 20억 원에서 130억 원으로 6.5배 늘렸다. 자활공동체에 한정돼 있던 지원 대상도 개인으로까지 넓혔다. 최대 2000만 원을 연리 2%에 대출해 주며 6개월 거치 54개월 분할 상환하는 조건이다.기금이 적어 밀려오는 수요를 감당할 수 없는 것도 문제지만 더욱 고민되는 것은 마이크로크레디트의 지속 가능성이다. 워낙 저리 대출을 하다 보니 상환율이 아무리 높아도 최소한의 운영 자금을 마련하기도 벅찬 게 현실이다. 이에 따라 업계에서는 운영자금을 만들 수 있는 시스템을 개발하든지 이자를 높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입을 모은다.사회연대은행의 박 본부장은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한 구조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자율을 현실화할 필요가 있지만 정서적인 거부감이 강해 당장 실시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니다”며 “모든 마이크로크레디트 은행이 같은 금리를 적용할 필요는 없으며 케이스에 따라 다른 금리를 적용할 수도 있지만 이를 위해서는 업계 내·외부의 합의가 요구된다”고 말했다. 이슈의 공론화가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신나는 조합의 조한 국장은 “지속적으로 사업을 할 수 있는 한국형 모델을 만드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고 강조했다.변형주 기자 hjb@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