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에도 아날로그 품격 ‘대세’

만년필&펜

많은 전문가들은 21세기에는 연필도 종이도 필요 없는 그야말로 디지털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상하곤 했다. 첨단 문명의 이기를 누리지 못하는 고루함과 촌스러움에 손을 들어 줄 이들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어느덧 21세기가 10분의 1을 훌쩍 넘기려는 지금, 펜과 종이에 대한 애잔한 집착은 이전의 고루함이나 허세와는 다른 방식으로 다가온다. 21세기의 트렌드는 그야말로 아날로그식의 품격이다. 빠른 것, 편리한 것에 밀려 ‘소중함’이나 ‘애정’이 등한시되는 경박한 사회 풍토가 ‘마음을 담아’, ‘천천히’, ‘순리에 맞게’ 살아가는 방식을 귀하게 여기게 된 것이다.그런 점에서 비즈니스맨들에게 신형 노트북이나 첨단 기능을 갖춘 전자수첩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펜’이다. 컴퓨터로 문서를 작성하더라도 마지막 사인만은 만년필로 멋진 필체를 남기는 것이 상대에 대한 예의라는 것쯤은 굳이 긴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 같다.‘펜’의 역사는 문명의 역사와도 맞물리며 자신만의 ‘펜’을 애장품으로 가진다는 것은 사회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어떤 사안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을 정도의 위치를 점하게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멋진 슈트와 함께 만년필이 비즈니스맨의 패션 감각과 품격을 대변하는 상징의 하나로 자리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최근 2~3년 사이에 펜 시장의 트렌드도 많이 바뀌었어요.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고급 필기구라고 하면 블랙 보디의 클래식한 디자인을 지닌 만년필을 떠올렸지만 요즘엔 젊은이들도 가지고 싶어 할만한 경쾌하고 화려한 디자인의 제품이 많이 출시되고 있죠. 클래식 만년필의 대명사이던 몽블랑도 블랙 보디의 정통성에서 살짝 비켜난 다양한 디자인을 선보여 인기를 끌 정도니까요.”그랜드 인터컨티넨탈 호텔 내 고급 필기구 전문 매장인 ‘펜샵(www.penshop. co.kr)’의 김경숙 팀장은 최근 필기구에 대한 달라진 인식에 대해 ‘다양함’을 첫 번째로 꼽았다.여전히 선물용으로는 몽블랑의 인기를 따라갈 수 없지만 디스콘티, 오로라 등의 이탈리아 브랜드가 선보이는 화려한 디자인의 제품들이 최근 들어 유독 강세를 보이는 이유도 클래식 펜 하나에도 개성을 담고 싶어 하는 소비자들의 다양한 욕구에 부합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특히 워터맨이 출시한 여성용 만년필 오다스는 색상이 다양하고 예쁜데다 가격대도 10만 원대 전후로 부담스럽지 않아 자신만의 예쁜 마스코트를 갖고 싶어 하는 20대의 젊은 여성들에게 인기가 높다. 오다스는 오는 3월 14일 화이트데이를 겨냥해 선물용으로 포장된 오다스 만년필 컬렉션을 선보이는 등 색다른 아이템을 원하는 여성들을 위한 다양한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다.워터맨의 해미스피어는 모던한 디자인에 가볍고 사이즈가 적당해 20대 젊은 남성들이 양복 안주머니에 가볍게 꽂고 다니기에도 적당하다.실용성과 품격을 동시에 만족하고 싶다면 펠리칸 제품도 추천할만하다. 정통 만년필의 품격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으면서도 다른 만년필에 비해 잉크 용량이 많고 가벼워 일명 고시용 만년필이라고 불린다.고시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많이 쓰는 실용적인 펜이라는 데서 유래한 별명이다. 몽블랑과 함께 대표적 필기구 브랜드 중 하나인 파카의 주력 제품 듀오폴드 역시 필기감과 스타일에서 우수한 평가를 받아온 스테디셀러 중 스테디셀러다.최근 하나의 시대 아이콘으로 자리 잡은 ‘자연주의’ 콥셉트로 남들과 다른 개성을 표현하고 싶다면 나무 재질의 그라폰 파버카스텔 만년필이 제격이다. 원래 색연필을 전문으로 생산하던 파버카스텔이 선보이는 클래식 컬렉션인 그라폰 파버카스텔은 연필이 주는 안정감과 자연스러움을 펜의 고급스러움과 접목해 감각적이지만 화려하거나 튀지 않는 품격을 원하는 30~40대의 젊은 비즈니스맨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나무로 만든 보디에는 우아한 나뭇결이 고스란히 살아 있어 세련된 멋이 느껴지며 쓸수록 그 펜을 소장한 사람의 손때와 체취가 더해 세월의 깊이가 묻어난다는 것이 그라폰 파버카스텔 펜을 선호하는 마니아들의 의견이다.굳이 만년필을 고집하기보다 실용성을 우선으로 생각한다면 크로스의 타운젠트 탱고가 무난하다. 여타 만년필 브랜드도 클래식 라인을 표방하는 볼펜이 출시되고 있으니 실용성과 품격을 동시에 누릴 수 있는 펜을 소장하고 싶은 이들이라면 염두에 두자.만년필은 고가의 제품인 만큼 고르는 요령도 중요하지만 구입 후 얼마나 잘 관리하느냐에 따라 수명이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펜촉을 갈아 끼워 가며 쓰는 제품이긴 하지만 함부로 다루다 보면 다시 쓰기 어려울 정도로 망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만년필을 오래 쓰려면 적어도 2~3개월에 한 번씩은 펜촉을 분리해 물이 담긴 종이컵에 담가두는 것이 좋다.펜촉을 물속에 담가 놓으면 펜촉에 남아 있는 찌꺼기가 용해돼 펜촉을 망가뜨리지 않고 오래 쓸 수 있으며 필기감도 그만큼 좋아진다. 보디에 생기는 스크래치를 방지하려면 펜 파우치를 사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가죽, 혹은 천 소재의 슬림한 파우치는 공간을 많이 차지하지 않으면서도 펜 외관에 손상이 가는 것을 방지해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상태를 유지해 준다.만년필을 처음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만년필을 고르는 것이 좋을지, 또 어떤 만년필이 자신에게 맞는 것인지 몰라 고심하게 된다. 디자인이나 소재의 고급스러움도 중요하지만 아무렇게나 쓰는 볼펜이 아닌 만큼 한번 구입하면 오래도록 쓰게 되는 고가의 제품이 대부분이라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에 맞는 제품인지, 손에 잡았을 때의 그립감이 좋은지, 필기감이 적당한지 등을 따져 고를 때부터 신중을 기하는 것이 중요하다.만년필을 고를 때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하는 것은 라이프스타일이다. 만년필은 제품마다 펜촉의 굵기가 조금씩 다른데 만년필을 쓰는 즐거움을 만끽하려면 펜촉이 조금 두꺼운 것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펜촉이 두꺼우면 그만큼 필기감이 부드럽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글의 특성상 펜촉이 너무 두꺼우면 글자가 두꺼워서 글을 썼을 때의 모양이 생각만큼 멋들어지게 나오지 않을 수 있다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필기감을 우선에 둔 굵은 펜촉의 만년필은 서명을 하는 정도의 소장용으로 더 적당하다. 특히 다이어리에 빼곡히 무언가를 기록하는 것을 좋아하는 여성이거나 일상적인 스케줄 관리도 펜으로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펜촉이 가는 만년필을 사용하는 것이 실용적이다.김지은 객원기자 likepoolggot@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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