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봐, 해봤어?’ 쓴 박정웅 메이텍·맥세이프카드 대표
‘이봐, 해봤어?’ 박정웅(64) 메이텍·맥세이프카드 대표는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생전에 즐겨 쓰던 이 표현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정 명예회장이 1977년부터 10년간 전경련 회장을 역임할 때 국제담당 상무로 통역을 맡았던 박 대표는 지난 2002년 당시 메모와 일지를 바탕으로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비화를 담은 ‘이봐, 해봤어?(FK미디어)’를 출간했다. 현대그룹 출신 경영자들도 ‘인간 정주영’을 가장 가까이에서 들여다본 인물로 박 대표를 인정할 정도다. 책을 본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은 “제목을 정말 잘 지었다”며 무릎을 쳤다고 한다. 박 대표는 “정 명예회장의 위대성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오히려 기회로 반전시킨 데 있다”며 “새로운 위기에 빠진 오늘날, 정 명예회장의 꺾이지 않은 도전 정신은 많은 시사점을 준다”고 말했다. 지난 2월 9일 분당 사무실에서 박 대표를 만났다.모든 사람이 정 명예회장을 막연하게 위대한 기업가라고 말합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이나 중동 진출, 조선소 설립, 국산 자동차 독자 개발 등 한국 경제사에 큰 획을 그은 많은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정 명예회장의 진정한 위대성은 위기를 오히려 도약의 기회로 만들어낸 불굴의 도전 정신에 있다고 봐요. 정 명예회장이 이룬 일들은 모두 엄청난 위험과 불확실성을 딛고 해낸 것이지요. 우리 여건에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전문가와 관료, 기업인들이 처음에는 하나같이 말렸어요.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잘 모르고 덤빈다고 했지요. 또 정 명예회장이 그동안 운이 좋아 번 돈을 다 까먹고 나라 망신시킬 것이라고 했습니다. 한 번도 예외가 없었어요.당시에도 기업가들은 많았습니다. 그러면 정 명예회장이 아닌 다른 기업인이 그런 일을 해낼 수 있었을까요. 전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모두가 미친 사람이라는 말을 했으니까요. 만약 정 명예회장이 그때 경부고속도로 건설이나, 조선업 진출 등을 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한국 경제는 어떤 모습일까요. 당시에도 다른 기업들은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는 위험 요소 최소화를 가장 큰 미덕으로 여겼지요. 정 명예회장은 과감한 도전 정신과 상상력으로 홀로 길을 냈고, 그걸 보고 다른 기업들도 따라온 겁니다.한국이 경제개발을 시작한 이후 크고 작은 위기가 없었던 적이 있습니까. 요즘 엄청난 위기라고 이야기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잊고 있는 게 있어요. 1~2차 석유 파동이 있었던 1974년 무렵을 봅시다. 2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유가가 무려 600% 뛰었지요. 제대로 된 산업 기반도 없고 외화보유액은 바닥나기 직전이었어요. 겨울철 발전용 벙커C유를 들여오지 못하면 온 국민이 얼어 죽어야 할 상황이었지요. 그때 정 명예회장은 중동 진출이란 카드를 꺼냈어요. 중동은 언어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한국과 가장 먼 나라였어요. 유럽과 미국이 이미 중동 지역의 기득권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빈틈이 없었어요. 일본처럼 기술이나 자본력도 없었지요. 거길 정 명예회장이 가겠다고 한 거예요. 석유 값이 뛰어 중동이 세계 돈을 다 끌어 모으고 있다, 돈을 벌려면 돈 있는 데로 가야 한다는 생각이었지요. 모두 미쳤다고 했어요. 중역들은 물론 동생들까지 말렸어요. 그런데도 가서 돈을 버니까, 다른 건설사들이 앞 다퉈 그 뒤를 따랐습니다. 만약 그때 중동에서 외화를 벌어오지 못했다면 꼼짝없이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를 겪었을 겁니다.1977년 5월, 리처드 스나이더 주한 미국대사가 조선호텔로 정 명예회장을 불렀지요. 자동차 독자 개발에 나선 현대자동차에 대한 미국 측의 우려를 전달하기 위해서였어요. 정말 역사적인 순간이었지요. 스나이더 대사는 현대가 독자 개발을 포기하면 GM이든 포드든 미국 메이저 자동차 회사와 현대가 원하는 가장 유리한 조건으로 조립 생산을 할 수 있도록 도와 주겠다고 했어요. 만약 독자 개발을 고집한다면 현대는 앞으로 해외 사업에서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라는 압박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미국은 향후 중국과 동남아 시장을 겨냥한 조립 생산 기지를 한국에 건설하고 싶어 했어요.특유의 어투로 이렇게 말했어요. ‘한 나라의 국토를 인체에 비유한다면 도로는 인체 내의 혈관과 같고 자동차는 혈관 속을 흐르는 피와 같다. 도로가 발달하고 자동차가 원활하게 다닐 수 있게 되면 모든 생산과 경제활동 역시 활발하게 돌아가고 경쟁력을 갖게 된다. 이 때문에 좋은 자동차를 싸게 공급하는 것은 인체 내에 좋은 피를 흐르게 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이다. 대사님 말씀대로 그동안 건설로 번 돈을 모두 쏟아 붓고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밑거름이 돼 후대에라도 한국 자동차 산업이 자리를 잡을 수만 있다면 그것을 보람으로 삼겠다.’ 지금 돌아보면 정 명예회장은 ‘지사적 기업가 정신’의 면모를 갖고 있었어요.정 명예회장은 외국 사절단이 오면 2군데를 꼭 돌아보게 했어요. 먼저 경제기획원에서 정부의 산업 발전 청사진을 듣게 했지요. 당시 김재익 국장이 겸손하면서도 완벽한 영어로 정부 계획을 브리핑했어요. 그 다음은 울산 현대중공업이 필수 코스였습니다. 외국인들에게 한국은 가난한 일제식민지 시대나 6·25전쟁의 참상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로만 알려져 있었지요. 정 명예회장은 현대 조선소를 무지와 자본 부족, 기술 부족을 딛고 일어선 한국인의 저력을 보여주는 전시장으로 여겼어요. 대형 빌딩 크기의 어머 어마한 배와 크레인을 보면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신뢰가 저절로 생깁니다. 정 명예회장은 그런 일정에는 밤을 새워서라도 반드시 내려가 직접 챙기셨어요. 그걸 다 따라다녔으니 아마 저만큼 울산 조선소를 많이 갔다 온 사람은 없을 겁니다.1977년 피터 드러커 교수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정 명예회장을 만났습니다. 드러커 교수는 기업가 정신은 많은 변수, 많은 위험 요소라는 구름 안개의 저 너머에 존재하는 사업성과 가능성을 감지하는 예지력과, 그런 위험과 불확실성을 무릅쓰는 돌파력, 또 주위 사람들을 설득해 함께 참여시키는 능력이라고 생각하는데, 정 명예회장은 바로 그런 개념에 꼭 맞는 극적인 사례라고 감탄했지요. 정 명예회장의 참모습을 꿰뚫은 대석학다운 분석입니다.리스크 관리와 예측 모델을 중시하는 금융공학이 바로 세계경제를 위기에 빠뜨린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 대출) 부실 사태를 만들었습니다. 기업가 정신은 지식이나 학문을 통해 이론적 천재성에서 오는 게 결코 아니에요. 기업도, 정부도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 혼란스러운 오늘날 과연 정 명예회장이 현업에 있었다면 우리에게 어떤 지혜를 줬을까요. 아마 위기에 등을 돌리지 말고 정면으로 맞닥뜨려 주도하라는 게 아닐까 싶어요. 정 명예회장이 자주 쓰던 ‘이봐, 해봤어?’라는 표현이 떠오릅니다.현대중공업에서 배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납기였어요. 제때 배를 인도하지 못하면 지연된 날짜만큼 배 값을 깎아 줘야 했기 때문이지요. 배를 발주하는 선주들은 최종 계약서 서명 직전에 꼭 정 명예회장을 만나 불쑥 납기 단축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면 옆에 서있던 현장 책임자들은 사색이 됐어요. 그런데도 정 명예회장은 천연덕스럽게 계약서에 사인합니다. 실무자들은 주문 받은 선박 건조에는 초대형 크레인이 필수인데 지금 당장 주문해도 그 크레인조차 계약서 날짜에 도착하지 못한다고 아우성이었죠. 그러면 정 명예회장은 위아래로 훑어보며 ‘이봐, 해 봤어?’ 그럽니다. 또 안 되는 방향으로 연구를 많이 한 것 같은데 당장 가서 되는 방향으로 연구를 다시 해오라고 호통을 칩니다.정 명예회장은 나름대로 분명한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당시 한국이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요. 그렇기 때문에 선진국이 한 달 걸리는 걸 우리도 이치를 따져 한 달 걸리면 절대 따라갈 수 없다고 생각한 겁니다. 일본이나 미국이 한 달 걸리는 걸 우리는 열흘에 해내야 이길 수 있다고 거죠. 실제로 그렇게 해서 한국 경제가 이만큼 성장했어요. 포드나 카네기, 잭 웰치를 위대한 기업가로 꼽지만 정 명예회장과는 비교가 안 된다고 생각해요. 정 명예회장은 정말 무에서 유를 창조했기 때문입니다.1944년 경기도 안성 출생. 71년 외신경제지 통신원. 74년 전경련 국제담당 부장, 이사, 상무. 88년 글로벌소시스코리아 사장. 95년 유니파이커뮤니케이션스코리아 사장. 중견기업연합회 부회장. 한국윤리경영연구원 국제부문 부회장. 메이텍·맥세이프카드 대표(현).장승규 기자 skjang@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