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연중 특별기획
‘현재의 경제 위기를 해결하려면 한국의 정주영 같은 인물이 많이 나와야 한다.’ 미국 ‘포린폴리시’ 최근호에 실린 내용이다.이뿐만 아니다. 전화기 한 대로 시작한 삼성상회를 기반으로 세계가 부러워하는 초일류 기업 삼성을 일궈낸 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장은 해외 경영대학원의 단골 연구 주제다. 만약 이들이 없었다면 오늘날 한국 경제의 모습은 어떠했을까.1부. 경제성장 원동력 ‘기업가 정신’1회. ‘기업가 정신’의 재발견2회. 진화하는 기업가 정신3회. 슘페터 다시 읽기4회. 전설로 남은 한국의 기업가들5회. 기업가 정신은 살아있다-유럽편6회. 기업가 정신은 살아있다-미국편7회. 기업가 정신은 살아있다-일본편울산광역시 동구에 들어서면 ‘조선산업의 메카’라는 커다란 안내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국내 최대 조선사인 현대중공업이 자리해 있으니 결코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 지역은 한국을 뛰어넘어 ‘세계 조선 산업의 메카’로 불러도 손색이 없다. 현대중공업은 1983년 이후 단 한 차례도 놓치지 않고 줄곧 세계 1위를 달리고 있고 인근에 있는 현대중공업의 자회사 현대미포조선도 세계 4위에 올라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울산 동구는 ‘조선 대국 코리아’를 움직이는 심장부다.지난 2월 10일 오전에 찾은 현대중공업은 ‘제2의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라는 경제 위기의 한파에서 한발 비켜난 듯 활기가 느껴졌다. 605만㎡(옛 183만 평)에 달하는 초대형 조선소로, 작업장을 오가는 셔틀버스가 6개 노선이나 운행될 정도다. 하지만 한창 건조 중인 수십 층 빌딩 높이의 선박들이 촘촘히 어깨를 맞대고 있어 오히려 좁다는 느낌마저 든다. 이곳 울산 조선소에선 이틀에 한 척 꼴로 거대한 배가 완성돼 나온다. 한 척에 평균 1억6000만 달러인 고가의 초대형 선박들이다. 이날도 야드에선 40척의 배가 건조 작업 중이었다. 안내를 맡은 조용수 부장은 “부지가 좁아지면서 외부 협력 업체에서 블록을 조립해 오고 매립도 하지만 한계에 달했다”며 “군산조선소가 완공돼야 그나마 숨통이 트일 것”이라고 말했다.현대중공업에 대한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애정은 각별했다. 설립 초기에는 직원 사택 1단지 1동에 세 번째 입주자로 들어가 몇 년 동안 아예 울산에서 살았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새벽녘에 지프를 몰고 공사 현장을 누비다 바다 속으로 추락해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한 적도 있다. 그 후로도 정 회장은 1990년대 초 정치 참여 전까지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시로 현장에 들이닥쳤다. 1977년부터 10년간 전경련 회장을 맡았을 때는 해외 사절단이 오면 현대중공업 방문 일정을 빼놓지 않고 넣도록 했다. 현대중공업에 대한 자부심이 그만큼 대단했던 것이다.하지만 이제는 울산 조선소에서 정 회장의 흔적을 찾기 쉽지 않다. 초창기 건물은 이미 철거된 지 오래다. 본관 건물이 있던 자리도 지난해 최신 인텔리전트 빌딩이 들어섰다. 그나마 정 회장이 매월 1일 전 직원을 모아 놓고 사전 원고도 없이 열변을 토하곤 했던 종합체육관과 노동조합 건물이 그나마 옛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울산에 내려올 때면 현장 직원들과 불고기 파티를 하며 파안대소했던 영빈관 밑 잔디밭도 그때와는 모습이 많이 달라졌다.현대중공업 탄생에 얽힌 일화는 지금도 유명하다. 1971년 정 명예회장이 조선소를 지을 울산 백사장 벌판 사진 한 장과 거북선 그림이 들어 있는 500원짜리 지폐를 달랑 들고 영국 바클레이스은행에서 4300만 달러의 차관을 끌어왔다는 전설적인 스토리다. 과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정 명예회장은 회고록에 조선소 건설을 처음 꿈꾼 것은 1969년부터라고 적고 있다.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간 것은 이듬해 현대건설에 조선 사업부를 설치하면서부터다. 당시 중화학공업 육성을 추진하던 정부가 일본 측에 요청해 작성한 ‘아까자와 리포트’는 해운업의 열악한 수준에 비춰볼 때 한국에는 5만 톤급 선박 건조 능력을 갖춘 조선소면 충분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정 명예회장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큰, 최신의 조선소를 마음속에 그리고 있었다. 문제는 자금이었다. 해외 차관 도입을 위해 백방으로 뛰었지만 배 한 척 만들어본 적 없는 현대에 선뜻 돈을 빌려 주는 곳은 없었다.수소문 끝에 정 회장은 영국의 유명한 조선 기술 회사인 애플 도어사의 롬바톰 회장을 찾아 갔다. 하지만 그 역시 현대의 ‘능력’에 의문을 나타냈다. 그때 정 회장은 불쑥 바지 주머니에서 500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테이블 위에 펴 보였다. “영국의 조선 역사는 1800년대부터지만 우리는 1500년대에 이미 거북선을 만든 민족입니다.” 이 말을 들은 롬바톰 회장은 빙그레 웃었다. 결국 그의 주선으로 바클레이스은행과 차관 협의가 시작됐다. 바클레이스 측은 한국에 실사단을 파견해 현대가 실제로 배를 만든 적은 없지만 각종 플랜트 건설로 충분한 능력과 기술을 갖췄다는 것을 꼼꼼히 확인했다.하지만 산 넘어 산이었다. 이번에는 영국 수출보증기구가 선박 수주를 먼저 받아오라며 브레이크를 걸었다. 정 회장은 다시 백사장 사진과 영국 조선소에서 빌린 유조선 설계 도면을 들고 선주들을 만나 ‘선박을 먼저 사주면 그것으로 돈을 빌려 조선소를 짓고 배를 만들어 주겠다’는 다소 엉뚱한 이야기를 수없이 하며 전 세계를 돌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선박왕 오나시스에 버금가는 그리스의 거물 해운업자 리바노스 회장이 값싼 배를 구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마침 그는 부친이 별세한 후 휘하 선단을 확장 중이었다. 리바노스 회장은 현대에 25만 톤짜리 배 두 척을 주문했다.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리바노스 회장은 2001년 정 회장 타계 직후 보낸 조문에서 “정 명예회장을 처음 만났을 때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며 “정 명예회장을 믿고 유조선을 발주해도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회고했다.정 명예회장의 놀라운 확신은 과연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어딘가 조그만 근거만 있으면 적극적으로 생각합니다. 적극적으로 확대해 나가면서 유사한 것은 뭐든지 다 할 수 있다, 이런 가능성에 자신부터가 신념을 가져야 주위 사람들도 신념을 갖게 되고 믿고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경부고속도로도 하고 울산 조선소도 짓고 주베일 공사도 해낸 겁니다.”울산이 정 명예회장의 기업가적 삶을 대표하는 곳이라면 대구는 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장의 꿈과 야망이 시작된 도시다. 1910년 경남 의령의 대지주 가문에서 태어나 일본 와세다대를 중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이 회장은 마산에서 정미소와 운수업으로 사업에 뛰어들었다 한차례 참혹한 실패를 경험했다. 그 후 이 회장은 6개월 동안 전국 각지를 도는 꼼꼼한 시장조사 끝에 1938년 3월 대구에 660㎡(200평) 남짓한 점포를 마련하고 ‘삼성상회’란 간판을 걸었다.이 회장의 나이 28세 때다.자본금 3만 원으로 출발한 삼성상회는 대구의 사과, 포항의 건어물 등을 만주와 중국으로 수출했다. 이후 제분기와 제면기를 설치하고 ‘별표 국수’를 만들어 팔아 큰 인기를 끌었다. ‘별표’라는 상표는 세 개의 별을 뜻하는 ‘삼성’에서 따왔다고 한다. 사업이 번창하자 이 회장은 1년 만에 대구에서 첫손에 꼽히던 ‘조선양조’를 인수해 대구 지역의 손꼽히는 사업가로 올라선다. 대구 삼성상회는 광복 후인 1948년 서울로 진출해 삼성물산공사를 설립할 때까지 이 회장의 든든한 사업 기반 역할을 톡톡히 했다.대구시 인교동 61의 1, 삼성상회가 있던 곳은 생각보다 썰렁했다. 목조 4층으로 지어진 옛 삼성상회 건물은 1997년 철거됐고 그 자리엔 ‘삼성의 모태가 되는 삼성상회가 있던 자리’라는 표지와 1층을 떠받치던 6개의 기둥, 그리고 간단한 설명 동판 몇 개가 남아 있을 뿐이다. 높은 건물이 주변에 들어서 있는데다 수백 개의 공구상이 몰려 있는 공구 골목의 끝자락인 때문에 방문자들이 찾기도 쉽지 않다. 대구 지역 대학생들이 과제물을 만들기 위해 가끔 찾아오는 정도다. 공구 골목 중간쯤엔 이건희 전 회장이 태어나고 서울 혜화초등학교에 진학할 때까지 유년시절을 보낸 1층 한옥 가정집이 그대로 남아 있다.인교동 일대는 지금은 개발이 더딘 구도심에 속하지만 예전에는 대구의 상업 중심지였다. 삼성상회 터에서 대구역과 우리나라 3대 장터 중 한 곳으로 유명한 서문시장이 모두 1km 이내 거리에 있다.서울로 진출한 이 회장은 1년 만에 무역업 순위 7위에 오르는 큰 성공을 거뒀지만 6·25전쟁이 터지면서 또다시 빈털터리가 되고 만다. 재산을 모두 빼앗기고 대구로 피란 온 이 회장은 뜻밖의 기회를 잡는다. 이 회장은 1948년 서울로 올라갈 때 삼성상회와 조선양조의 경영을 직원들에게 일임하고 떠났다. 그 후 간혹 편지로 보고를 받았을 뿐 경영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들이 그동안 수익금을 꼬박꼬박 모아 3억 원의 자금을 마련해 둔 것이다. 재기 자금을 얻은 이 회장은 임시 수도인 부산에서 삼성물산을 재건해 본격적인 성장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사람과 신뢰를 중시하는 이 회장의 경영 철학은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삼성상회 터에서 차로 10분 떨어진 침산동에는 삼성그룹 성장사에 또 다른 이정표가 된 옛 제일모직 터가 자리해 있다. 1954년 설립한 제일모직은 한 해 전 출범한 제일제당과 함께 상업자본으로 커 온 삼성이 산업자본으로 변신하는 계기가 됐다. 이 회장은 전쟁 후 피폐해진 황무지에서 ‘사업보국’의 기치를 내걸고 제조업을 통해 수입 대체와 자립 경제의 기반을 마련했다. 국내 최초로 현대식 생산 시설을 갖춘 대규모 섬유 공장인 대구공장에서 생산된 순 국산 양복지 ‘골덴텍스’는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사업을 위해 살다간 사나이로 남고 싶다’이 회장은 이때의 감격을 ‘호암자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황무지에 공장이 들어서고 수많은 종업원들이 활기에 넘쳐 일에 몰두한다. 쏟아져 나오는 제품의 산더미가 화물차와 트럭에 가득 실려 나간다. 기업가에게는 이렇게 창조와 혁신감에 생동하는 광경을 바라볼 때야말로 바로 살고 있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게 하는 더없이 소중한 순간인 것이다.”제일모직 대구공장은 다른 섬유공장과는 출발부터 달랐다. 과거 대구 시민들은 이곳을 ‘제일공원’이라고 부르곤 했다. 수십 년 된 느티나무가 울창하게 자라고 오엽송(잣나무)과 감이 주렁주렁 열리는 감나무 등 유실수가 가득했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호암자전’에서 “공장 부지 전체를 잘 다듬어진 정원으로 생각하는, 말하자면 정원 공장이라고 할 만한 것으로 꾸미고 싶었다”고 밝혔다.제일모직 대구 공장은 1996년 구미사업장으로 통합되면서 폐쇄된 상태다. 24만8000㎡(옛 7만5000평)에 달하던 공장 부지에는 이미 아파트와 대형 유통점이 절반 가까이 들어서 있다. 지금은 이 회장의 집무실이 있던 본관 건물과 기숙사만 일부 남아 있을 뿐이다. 또 한쪽으로는 2003년 삼성이 지어 대구시에 무상으로 기증한 오페라 하우스가 거대한 위용을 뽐내고 있다.건물을 뒤덮은 담쟁이덩굴이 유럽의 고성을 연상케 하는 기숙사는 현재 삼성전자서비스의 교육장으로 활용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기숙사로 꼽히는 이곳은 미용실 세탁실 목욕실 다리미실 도서실 정원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시설을 갖추고 있어 외부인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던 곳이었다. 이 회장의 인재 제일의 경영관이 잘 나타나는 대목이다.침산동 공장 터를 둘러보던 2월 11일, 시간을 뛰어넘은 듯 까치 2마리가 반갑게 날아와 울고 간다. 삼성상회 터에서 본 ‘호암자전’의 한 구절이 문뜩 떠오른다. “행복 척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인생이란 석재에 신도 악마도 새길 수 있다. 다만 나는 그 석재 속에 사업을 위해 살다 간 한 사나이로 새겨졌으면 한다.”울산·대구= 장승규 기자 skjang@kbizweek.com사진= 김기남·서범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