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연중 특별기획 ‘기업가 정신이 희망이다’③ - 슘페터 다시 읽기
‘20세기가 케인스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슘페터의 시대다.’상당수의 경제학자들은 21세기에도 살아남을 경제학자로 슘페터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가 100여 년 전 던진 ‘기업가 정신(Entrepreneurship)’ ‘창조적 파괴’ ‘혁신’ 등에 대한 물음은 오늘날 세계화와 무한 경쟁, 지식 기반 경제가 몰고 온 대격변을 이해하고 헤쳐 나가는데 필요한 통찰들을 제공한다. 최근 미국발 글로벌 금융 위기로 케인스식 단기 수요 처방이 다시 각광받는 듯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결국 슘페터적 혁신 없이 진정한 위기 극복은 불가능하다. 케인스의 그늘에 가려 있다가 사후 40여 년이 지난 1990년대 들어 진가를 인정받고 있는 슘페터의 삶과 사상을 재조명해 본다.1983년 두 명의 위대한 경제학자가 탄생 100주년을 맞았다. 칼 마르크스가 망명지인 영국 런던에서 세상을 떠난 1883년 동갑내기로 태어난 조지프 알로이스 슘페터와 존 메이너드 케인스다. 하지만 이들의 추모 행사는 여러모로 대조적이었다. 케인스 탄생 100주년 때는 수많은 콘퍼런스가 개최되고 책 출간과 언론 보도가 쏟아졌다. 반면 슘페터 100주년은 소규모의 전문적인 세미나만 열린 채 조용히 지나갔다. 하지만 그로부터 26년이 지난 오늘날 세계가 직면한 복잡한 경제 정책적 문제들을 푸는데 슘페터의 사상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이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기업가 정신’ ‘창조적 파괴’ ‘혁신’ 같은 슘페터의 핵심 개념들이 큰 거부감 없이 일상적으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이 이런 변화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슘페터는 1883년 2월 현재 체코 지역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방도시 트리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삶은 불운한 천재의 전형을 보여준다. 20대에 이미 학계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스타가 됐지만 낯선 미국 땅에서 보낸 그의 말년은 쓸쓸했다.대대로 물려받은 의류 공장을 경영하던 슘페터의 부친은 그가 겨우 네 살 때 사냥터에서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의 운명을 뒤바꿔 놓았다. 열 살 때 귀족 출신 장교와 재혼한 어머니를 따라 제국의 수도인 빈으로 이사했다. 슘페터는 귀족인 양아버지 덕에 귀족 자제들을 위한 교육기관인 테레지아눔에 들어갈 수 있었다. 1901년 빈대학에 입학한 슘페터는 이곳에서 당시 오스트리아 학파의 거장들이었던 뵘 바베르크, 비저 등과 같은 당대 최고의 경제학 교수들을 만나 지도를 받았다. 당시 빈은 세계 경제학 이론의 수도였다.대학 졸업 후 영국을 거쳐 이집트 카이로에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한 슘페터는 저녁이면 집에 틀어박혀 자신의 첫 저서를 완성하는데 몰두했다. 마침내 1908년 그에게 엄청난 명성을 안겨준 ‘이론경제학의 성격과 본질’을 출간했다. 첫 저서의 성공에 힘입어 슘페터는 이듬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동쪽 지역인 체르노비츠대에 조교수로 부임, 제국을 통틀어 최연소 경제학 교수 기록을 세웠다. 이 26세의 패기만만한 경제학자의 앞길은 밝게만 보였다.1916년 무렵에는 정치 참여에도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몰락해 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경제 고문과 독일의 사회화위원회 위원을 거쳐 1919년 신생 오스트리아공화국의 재무장관으로 전격 발탁됐다. 오스트리아공화국은 제1차 세계대전 후 쇠락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로 탄생한 사회민주당과 기독교 보수주의자들의 연립정부였다. 36세의 젊은 재무장관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던 경제난을 수습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부임 7개월 만에 재무장관에서 해임되고 말았다.그러나 슘페터는 정계에서의 참담한 실패를 딛고 빈의 작지만 명망 있던 은행 비더만방크의 총재를 맡아 사업가로 또 한 번 변신한다. 하지만 이 역시 4년 만에 실패로 끝을 맺었다. 슘페터는 무모한 투자로 거액을 날렸으며 재무장관 시절 호화로운 생활로 진 엄청난 빚까지 남아 있었다.1925년 슘페터는 독일 본대학 재정학 교수로 학계에 복귀했고 두 번째 결혼에도 성공, 불안한 그의 삶은 다시 안정을 찾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듬해 그의 정신적 버팀목이던 어머니와 그토록 사랑하던 아내가 차례로 숨을 거두면서 본격적인 불행이 시작된다. 이들의 죽음은 슘페터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그는 매일 밤 죽은 아내의 일기를 그대로 베껴 쓰기 시작했다. 틀린 철자까지 그대로 옮겨 적었다. 슘페터는 빚 갚을 돈을 마련하기 위해 원고 청탁과 강연 의뢰를 닥치는 대로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돈을 위해 글을 쓰고 강연해야 한다는 사실은 그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짓뭉갰다.결국 슘페터는 본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1932년 미국 하버드대의 초빙 제의를 받아들였다. 신대륙 미국에서 새로운 삶을 꿈꾼 것이다. 그는 유럽에서의 쓰라린 기억을 떨쳐 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연구에만 몰두했다. 아침이고 저녁이고 주말이고 휴가고 가리지 않고 일에만 매달렸다. 슘페터는 가혹할만큼 철저하게 자신의 생활을 관리하고 통제했다. 매일 일기에 그날의 성과를 자평하고 평점을 매겼을 정도다.하지만 미국 땅도 그의 안식처가 되지 못했다. 케인스주의가 하버드 경제학과를 휩쓸자 슘페터를 추종하던 많은 학생들이 그를 떠났다. 슘페터는 동료 교수들과도 자주 마찰을 빚었다. 그는 점점 냉소적이고 공격적으로 변해갔다. 죽은 아내와 모친에 대한 집착도 더욱 심해졌다. 두 여인은 추억 속의 인물이 아니라 그에게는 숭배의 대상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정교한 수학적 모델링이 경제학계를 풍미하면서 학생들은 사회경제학을 지향한 슘페터에게서 점점 더 멀어졌다. 슘페터는 학생들 사이에서 ‘한계효용 개념을 17개 국어로 말할 수 있는 사람’ 정도로만 여겨졌다.1950년 1월 슘페터는 산더미 같은 미완의 원고 뭉치들만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날 밤에도 다음에 있을 강연 원고를 손질하고 있었다. 경영학의 아버지인 피터 드러커는 슘페터가 죽기 며칠 전 병문안을 갔다. 같은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피터 드러커의 아버지는 슘페터의 오랜 친구였다. 당대 최고의 명성을 누리고 있던 30세 때 슘페터는 ‘당신은 진정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라는가?’라는 물음에 특유의 오만함으로 이렇게 답한 적이 있다. “나는 빈 최고의 연인으로, 유럽 최고의 승마인으로, 그리고 세계 최고의 경제학자로 기억되길 바랍니다.” 피커 드러커가 죽음을 앞둔 그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지자 이렇게 말했다. “그 당시와는 전혀 다른 대답을 준비하고 있네. 나는 대여섯 명의 우수한 학생을 일류 경제학자로 키운 교수로 기억되길 바란다네. 이제는 책이나 이론으로 기억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 만한 나이가 되었어. 책과 이론이 진정 사람의 삶을 변화시키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나.”= 피터 드러커의 표현을 빌리면 ‘주요 경제학자 중 유일하게 슘페터만이 기업가의 역할에 주목했다’. 전통 경제학에는 기업가가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항상 수요와 공급이 모든 것을 결정했다. 마르크스의 경제학도 노동자와 자본가의 이항대립으로만 구성됐다. 기업가는 때로 자본가가 되기도 하지만 이 둘은 서로 구분된다. 슘페터는 기업가(Entrepreneur)를 ‘새로운 결합을 능동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자신의 기능인 경제 주체’라고 명확하게 정의한다. 이런 점에서 기업가는 단순한 생산 관리자와도 차이가 난다.슘페터에 의해 ‘기업가’는 자본주의의 역동성을 대표하는 주역으로 화려하게 등장했다. 기업가는 획기적인 방식으로 ‘새로운 결합’을 수행해 기존의 균형 상태를 뒤흔든다. 슘페터는 이러한 새로운 결합, 즉 혁신의 유형을 △소비자들이 아직 모르는 재화 또는 새로운 품질의 재화의 생산 △해당 산업 부문에서 사실상 알려지지 않은 생산 방법의 도입 △새로운 판로의 개척 △원료 혹은 반제품의 새로운 공급의 획득 △독점적 지위 등 새로운 조직의 실현 등 5가지로 정리한다. 혁신에 성공한 기업가는 추가 이윤을 가져간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이러한 ‘기업가 이윤’은 잉여가치의 유일한 원천이다.새로운 결합의 등장은 구결합의 도태를 동반한다. 혁신은 과거의 지식이나 기술, 투자를 쓸모없게 만드는 것이다. 그 유명한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의 개념이 여기서 나온다. 슘페터는 기업가의 창조적 파괴 행위가 바로 자본주의의 역동성과 경제 발전을 가져오는 원동력이라고 강조한다. 혁신에 성공한 기업가에게 주어지는 초과이윤은 모방자들의 등장으로 자연스럽게 소멸돼 새로운 균형 상태를 이룬다. 슘페터의 천재성은 이처럼 경제 체계를 하나의 균형 상태에서 다른 균형 상태로 끊임없이 몰고 가는 힘이 경제 체계 자체에 내재한다고 본 데서 빛을 발한다. 슘페터는 이러한 아이디어를 확장해 1939년 ‘경기순환론’을 썼다.다윈의 적자생존론을 연상시키는 ‘창조적 파괴’는 사실 그리 기분 좋은 개념은 아니다. 창조적 파괴에는 중단이 없기 때문이다. 현재의 성공에 안주하는 자는 조만간 지반이 꺼지는 위험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한때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던 카세트테이프는 콤팩트디스크(CD)에 밀려났으며 CD 역시 순식간에 MP3에 자리를 내주고 있다. 제록스(복사기)와 폴라로이드(즉석카메라)처럼 혁신적인 제품을 내놓고 새로운 산업을 주도하던 기업들도 더 뛰어난 디자인과 가격 경쟁력을 앞세운 경쟁자들에 밀려 수익률 하락을 경험하고 있다.그렇다면 기업가는 왜 끊임없이 혁신을 시도하는 것일까. 슘페터는 기업가 혁신의 동인을 3가지로 설명한다. 첫째는 사적(私的) 제국을 건설하려는 꿈과 의지다. 현대사회에서 과거식의 제국은 존재할 수 없지만 지배자적 지위에 대한 매혹은 여전히 강력하다. 이것은 사회적 권위에 도달하는 다른 길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 특히 중요하다. 둘째는 승리자가 되고자 하는 의지다. 이는 성공 그 자체를 위해 성공하려는 의지를 뜻한다. 이윤은 종종 성공의 지표가 되고 승리를 기념하는 기둥이 된다. 말하자면 경제 행위는 스포츠와 같은 것이 된다. 셋째는 창조의 기쁨이다. 단순한 상점주가 하루 노동을 간신히 마친 것과는 달리 기업가는 변화와 모험 그 자체를 위해 변화를 선택하고 과감하게 돌진한다. 이는 일에 대한 기쁨, 새로운 창조 그 자체에 대한 기쁨과 마찬가지다.= 1950년 사망한 슘페터는 그로부터 40여 년이 지난 1990년대 정보기술(IT) 분야의 기술 혁신이 인플레 없는 장기 호황을 가져온 신경제(New Economy)론의 등장과 함께 새롭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IT 혁명은 슘페터가 왜 기업가 혁신을 경제 발전의 원동력으로 봤는지를 단적으로 확인해 준다.앨런 그린스펀 전 미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은 슘페터의 열렬한 추종자였다. 그는 자신의 회고록 ‘격동의 시대’에 이렇게 고백했다. “창조적 파괴는 1942년 하버드 경제학 교수인 슘페터에 의해 통합된 개념이다. 영향력 있는 다수의 개념들이 그렇듯 그의 논리도 단순했다. 즉, 시장은 노쇠하고 쇠락해 가는 기업들을 폐기 처분함으로써 점차 내부에서 생기를 회복하게 될 것이며 자원은 좀 더 생산적인 차원으로 재분배될 것이라는 이론이다. 나는 20대에 슘페터의 이론을 읽었고 항상 그가 옳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평생 동안 그 과정이 진행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경제 정책을 중심으로 단순화하면 1970년대까지 가장 중요한 경제학자는 단연 국가의 개입과 완전 고용 정책을 정당화한 케인스였다. 이어 1980년대 들어서는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나 밀턴 프리드먼 같은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득세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금융과 화폐, 조세 등에 대한 공급 중심적 해석을 옹호했다. 반면 1990년대부터는 국가 전체의 구조적 경쟁력을 강조하는 슘페터식의 혁신주의적 접근이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들은 ‘혁신’의 공급에 강조점을 둔다. 김석현 과학기술정책연구원 혁신정책연구센터 연구위원은 “대기업이 주도하는 대량생산 시대에는 케인스의 이론이 유효했다”며 “하지만 기술 혁신의 중요성이 커진 최근에는 슘페터의 혁신론이 주목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오늘날 슘페터에 대한 관심은 어떻게 혁신을 촉진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로 모아진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는 “경제 제도나 시스템을 어떻게 갖추느냐에 따라 혁신이 이뤄질 수도 있고 멈출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를테면 기업가들이 혁신을 했을 때 보상받는 시스템인가, 아니면 지대추구 행위(rent-seeking)가 더 보상받는 시스템인가 하는 것이다. 하 교수는 “혁신은 창조적 파괴를 통해 새로운 기업의 등장과 함께 기존 기업이 도태되는 역동적인 과정을 내포한다”며 “이런 것들이 잘 이뤄질 수 있게 경제적 유인 체계를 잘 설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금융 환경, 시장 구조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한국은 지금 기업가 정신이 발휘되기 어려운 환경인 게 사실”이라고 덧붙였다.슘페터는 최근 불어 닥친 글로벌 경제 위기와 관련해서도 주목받는다. 유필화 성균관대 경영전문대학원(SKK GSB) 부학장은 “그 어느 때보다 슘페터 정신이 절실히 필요한 시기”라며 “과거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기업가들이 많이 나와야만 경제가 활력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취재=장승규 기자 skjang@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