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은 자전거 타고 언덕 오르는 것’

유용석 한국정보공학 대표

본사: 경기도 성남시 분당인원: 80여 명주요 사업: IT 기기 유통 및 소프트웨어 사업작년 매출: 약 1000억 원지난 1990년 12월. 차가운 강바람이 부는 여의도의 한 작은 사무실에 ‘한국정보공학’이라는 낯선 이름의 간판이 걸렸다. 영문명은 코리아 인포메이션 엔지니어링 서비스(Korea Information Engineering Service). 이름은 상당히 거창하고 글로벌화돼 있었다.직원이 5명에 불과한 미니 회사. 이제 서른을 갓 넘은 당시 32세의 유용석 대표는 ‘정보기술(IT) 분야에서 글로벌 기업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러면서 직원들에게 구체적인 약속을 내걸었다. ‘더불어 사는 조직을 만들자.’ ‘앞으로 10년 내에 적어도 압구정동에 작은 아파트 한 채씩은 가질 수 있도록 하겠다.’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이 약속은 유 대표가 자신의 주식을 무상으로 2번에 걸쳐 나눠주면서 실현됐다. 이날의 창업은 유 대표로서는 ‘의사’ 대신 ‘공학도’를 통한 성공의 길을 가겠다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첫발을 내디딘 날이기도 하다.그로부터 18년이 흐른 지금, 경기도 분당에 있는 한국정보공학은 연매출이 1000억 원에 육박하는 업체로 성장했다. 소프트웨어 개발 업체에서 IT 유통 업체로 변신했고 인터넷과 소프트웨어 유통을 결합한 새로운 사업에 도전하고 있다. 지난 몇 년간 자회사에 대한 투자와 이에 따른 손실 등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이런 어려움을 점차 털어내고 재도약의 기반을 다지고 있다.유 대표의 부모는 유 대표가 대를 이어 의사가 되길 내심 바라고 있었다. 양친은 모두 평양 출신으로 남한으로 내려온 뒤 부친이 병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중학교 2학년 때 부친이 갑자기 돌아가시자 큰 충격을 받았다. 졸지에 홀어머니의 외아들 신세가 됐을 뿐만 아니라 ‘남들은 치료하면서 정작 당신의 몸은 돌볼 수 없을 정도로 바쁜 게 의사가 아닌가’라는 생각에 의사라는 직업에 회의를 갖기 시작했다.유 대표는 결국 공학도의 길을 택했다. 서울대 공대와 동대학원에서 산업공학을 전공한 뒤 삼성그룹에 입사해 제일모직에서 전산 시스템 구축 업무를 담당했다. 3년 반 정도 근무한 뒤 사표를 내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통상 2년 정도 걸리는 스탠퍼드대 대학원 과정에서 유 대표는 3쿼터(9개월) 만에 석사학위를 받았다. 전공은 경영과학공학으로 공학과 경영학을 융합한 학문이다.내친김에 박사과정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마침 어머니가 편찮으시다는 연락을 받고 귀국했다. 잠시 서울시스템에서 컴퓨터 신문 조판 시스템 개발 업무를 하던 그는 1990년 한국정보공학을 설립하면서 내 사업의 꿈을 이뤘다. 세계적인 기업을 만들겠다는 당찬 꿈은 있었지만 여느 중소기업과 마찬가지로 초창기엔 자금과 인력 문제로 어려움에 봉착했다.쌈짓돈과 친인척들로부터 5000만 원을 모아 사업을 시작했지만 금세 자금이 바닥났다. 선배와 친구들로부터 또다시 5000만 원을 충당해 사업을 이어갔다.더욱 큰 문제는 우수한 인력 확보였다. 누가 이름도 없고 구멍가게만한 회사에 오겠는가. 그래서 그는 임직원이 함께 성장하는 회사를 만들겠다는 의미에서 ‘더불어 사는 회사’를 사시로 내걸었다. 마침 아주대와 산학 협동을 할 기회가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우수한 인재를 뽑을 수 있었다.처음 시작한 사업은 시스템 통합(SI)이었다. 특히 데이터베이스에 관한 용역을 받아 수행했다. 전자전화번호부 사업 등이 그것이었다. 시스템 통합과 용역은 큰돈이 벌리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회사를 운영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 줬다.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것은 학교 종합 정보 시스템의 구축이었다. 지금의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 National Education Information System)의 전신 격인 이 시스템은 학생의 개인 정보와 성적 건강 기록 등을 전산으로 처리해 콤팩트디스크(CD)에 담아 송부하거나 관리하는 것이었다.소프트웨어 개발 능력을 인정받아 당시 교육부와 시도 교육청의 종합 정보 시스템을 구축하면서 회사는 비약적인 성장을 하게 된다. 2000년 코스닥 등록 시에는 당시로선 기록적인 배수인 액면가의 300배로 청약을 받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액면가 2억5000만 원어치의 주식을 공모하는데 750억 원이 회사로 들어온 것이다.자금마저 풍족해진 한국정보공학은 공공기관 전자 결제 시스템과 지식 기반 솔루션인 ‘와이즈 키즈’를 개발하는 등 유관 분야 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스카이교육TV(지금의 스카이에듀)와 센트로닉스를 각각 설립하는 등 사업 다각화에 나서기도 했다. 센트로닉스는 IT 분야 중 시스템온칩(SoC)을 개발하는 업체다.호사다마인가. 사업이 궤도에 오르자 유 대표는 임원들에게 권한을 대폭 넘겨줬다. 10여 년간 쉴새 없이 달려오다가 성취감을 느끼자 한편으로는 목표 달성 후에 오는 나른함, 무력증 같은 것이 밀려왔다.‘이제는 임원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좀 쉬엄쉬엄 해도 되는 게 아닐까’라고 생각했지만 이게 큰 오산이었다. 투자한 여러 회사들이 잇달아 적자를 내면서 한국정보공학은 2004년 109억 원의 적자를 냈다. 2005년과 2006년은 소폭 흑자를 냈지만 2007년에 다시 86억 원의 적자를 내는 등 어려움을 겪었던 것이다.“그때 기업은 성장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을 절감했다”고 유 대표는 설명한다. 흔히 사업은 자전거 타는 것에 비유된다. “자전거는 내리막길에선 페달을 밟지 않아도 되지만 사업은 그럴 짬이 없다”며 “사업은 오르막길에서 타는 자전거이기 때문에 페달을 멈추는 순간 낭떠러지로 떨어진다”고 그는 단언한다.다시 신발끈을 졸라맸다. 센트로닉스를 비롯한 자회사를 매각하고 새로운 수익원 발굴에 나서 IT 유통에 뛰어들었다. 휴렛팩커드의 한국 내 총판을 맡아 서버 노트북 등의 판매를 시작했고 썬마이크로시스템즈의 한국 내 총판도 맡았다.유 대표는 “IT 유통을 통해 전국적인 판매망을 구축했고 영업이 무엇인지 조금씩 알게 됐다”고 밝힌다. 그는 “제품을 잘 만들어도 팔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고 1등 기술 제품이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잘 팔리는 것도 아니다”고 설명한다. “2등 제품이라도 잘 팔면 그게 1등 제품이 되는 것”이라고 덧붙인다.“영업은 기술과 품질 가격 서비스의 결정체인 동시에 고객으로부터 제품에 대한 반응을 얻어내 제품의 품질과 기능을 향상시키는 등 고객과의 중요한 접점”이라는 게 그의 시각이다. “영업을 잘하려면 시장이 원하는 제품이 어떤 것인지 끊임없이 연구해야 되기 때문에 결국 시장에서 경쟁력 있는 제품을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하게 된다”고 설명한다.그는 “공학도 출신 기업인들이 빠지는 함정 중의 하나가 기술력에만 의존한 채 영업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것”이라며 “판매가 잘 안되면 자신을 몰라준다며 시장 탓을 하는데 그럴 시간이 있으면 제품이 과연 시장성이 있는지, 그리고 자신의 영업 능력이 있는지를 되돌아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시장은 절대로 무식하지 않기 때문이다.그는 “그동안 축적한 영업 노하우와 전국적인 유통망을 한국정보공학의 강점인 소프트웨어 기술과 인터넷에 연계해 새로운 사업에 나설 것”이라며 “글로벌 컴퍼니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가짐으로 하나씩 다부지게 챙겨나가겠다”고 밝힌다.약력:1958년생. 81년 서울대 공대 산업공학과 졸업. 84년 서울대 대학원 졸업(산업공학 전공). 89년 미국 스탠퍼드대 경영과학공학 석사. 88년 서울시스템 개발실장. 90년 한국정보공학 설립 및 대표(현).김낙훈 편집위원 nhkim@kbizwee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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