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이고, 졸라매고 … 6분기 연속 흑자

휴대전화 제조업체 팬택의 2009년은 이미 2008년 11월 1일 시작됐다. 박병엽 팬택 부회장은 “남들과 같아서는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며 “2009년 상반기에 심각한 불황이 예상되는 만큼 남들보다 빨리 한 해를 시작해야 할 것”을 임직원들에게 당부했다. 2006년 한때 회사가 쓰러질 위기에 처하기도 했던 팬택은 당시의 위기 상황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듯 보인다. 기업개선작업 이후 지금까지 6분기 연속 영업이익 흑자를 기록했고 2007년 140만 대였던 판매량은 2008년 350만 대 수준으로 늘었다. 남보다 일찍 ‘나 홀로’ 불황을 맞고 남보다 먼저 위기 극복에 나선 팬택의 저력은 무엇일까.팬택 박병엽 부회장에게 2008년 11월 15일은 잊을 수 없는 날이다. 2년 전인 2006년 이날은 팬택계열이 기업개선작업을 신청한 날이기 때문이다. 2008년 11월 17일 월요일 오전 7시, 박 부회장은 경영점검회의를 가진 자리에서 “팬택의 2009년은 이미 시작”됐음을 천명하고 2009년의 불황을 이겨낼 것을 주문했다. 그에게 11월의 의미는 남달랐던 것이다. 그렇다면 2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일명 ‘레이저 쓰나미’이었다. 2006년 팬택을 부도 직전까지 몰고 갔던 위기의 실체다. 2004년 출시된 모토로라의 ‘레이저(RAZR)’ 폰은 처음에는 인기를 끌지 못하다가 2005년 대대적인 마케팅에 힘입어 전 세계적으로 5000만 대 이상이 팔리며 휴대전화 업계에 쓰나미를 일으켰다. 레이저와 비슷한 가격대와 성능의 휴대전화가 거의 팔리지 않을 정도였다. 보통 ‘밀리언셀러’로 불리면 히트 상품이 될 정도로 단일 제품의 100만 대 판매가 쉬운 일이 아닌데 레이저폰은 7000만 대까지 팔렸다고 구전되기도 하는 것을 보면 쓰나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1991년 창업 후 2004년까지 연간 50%가 넘는 지속적 성장을 해 왔던 팬택은 3~4개월 동안 판매가 전무하다시피 할 정도로 어려움을 겪었다. 이런 상황이 6개월 동안 지속되면서 국내·해외에서 재고가 쌓이기 시작했다. 팬택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재고를 덤핑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와중에 팬택의 뒤를 이어 벤처 신화를 써오던 휴대전화 업체 VK가 무너졌다. VK는 채권단 협의마저 이뤄지지 않아 결국 2006년 7월 파산 절차에 이르게 됐다. 이 때문에 팬택 채권단의 시선도 싸늘하게 변해갔다. 살아날 가능성이 있을까라는 회의적인 시선이 지배적이었다.분위기만 싸늘해진 것이 아니라 실제 신용 축소로 이어졌다. 불안감을 느낀 채권단은 2006년 한 해 동안 2000억 원 규모의 신용 한도를 축소했고, 또 2000억 원의 채권을 회수하면서 팬택은 도합 4000억 원의 추가 자금 부담을 안아야 했다. 당시 팬택의 부채비율은 200%도 되지 않았을 정도로 양호했지만 채권단이 돈을 회수하면서 실제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기업 자체의 재무구조나 품질 경쟁력은 문제가 없지만 시장 상황 때문에 금융 위기를 겪은 것은 지금 대부분의 기업이 겪고 있는 금융 위기와 비슷한 상황이다.늘어나는 재고와 금융권의 신용 축소라는 2중고는 기어이 팬택을 유동성 위기로 몰아넣었다. 결국 팬택은 2006년 11월 15일 기업개선작업을 신청했다. 그러나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2001년 5년 기한으로 제정된 한시법인 ‘기업구조조정촉진법(기촉법)’이 11월 말 효력이 끝나버린 것. 기촉법에 따르면 채권단의 75%의 동의만 받아도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이 가능했지만 2006년 개정이 이뤄지지 않아 효력이 상실되면서 팬택은 채권단 100%의 동의를 받아야 워크아웃에 들어갈 수 있었다.은행권의 시각은 “기촉법의 도움 없이 수많은 채권자들을 어떻게 묶을 것이냐? 이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채권자의 절반은 제1금융권이지만, 나머지 절반은 2금융권을 비롯해 사채, 개인 채권까지 포함돼 있어 누구인지, 어디 있는지도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박 부회장은 “해보지도 않고 무너질 수 없다”며 전 재산을 내놓기로 하고 채권단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워크아웃을 신청한 뒤 한 달이 지나서야 추진 결정이 이뤄졌다.이때부터 박 부회장을 필두로 한 임직원들은 채권자를 대상으로 설명회 공고를 내고 전국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부르는 곳이라면 무조건 찾아갔다. 팬택 측은 “예를 들어 지방의 신용협동조합의 한 지부에서 ‘회원들이 당신 얘기를 듣고 싶어 한다’는 요청이 오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찾아갔다”고 당시를 회고했다.박 부회장은 “내 것을 다 던지더라도 실패한 경영인이 될 수는 없다”는 심정으로 회사 지분을 모두 내놓기도 했다. 2007년 6월 전까지 팬택의 지배구조는 ‘박병엽 부회장→ 팬택씨앤아이(100%)→ 팬택앤큐리텔(31.97%)→ 팬택(48.09%)’으로 박 부회장은 자신이 지분 100%를 가진 팬택씨앤아이를 통해 팬택앤큐리텔과 팬택을 소유했다. 그러나 2007년 3월 감자(팬택앤 큐리텔은 30 대 1, 팬택은 20 대 1)를 결정하고 5월에 이를 통과시키며 팬택앤큐리텔과 팬택에 대한 박 부회장의 실질적 지분은 거의 소멸됐다. 이후 채권단은 채무를 출자 전환해 팬택앤큐리텔과 팬택의 소유권은 산업은행, 새마을금고 등으로 넘어갔다.오너가 자신의 지분을 모두 포기한 사례는 예전 쌍용건설을 살리기 위해 뛰었던 김석준 회장의 경우가 있다. 이때는 사재 헌납의 조건으로 추후 쌍용건설 매각 시 우리사주조합이 회사를 되살 수 있도록 우선매수청구권을 옵션으로 받았었다. 팬택의 경우는 “당시 상황이 워낙 급박해 어떤 옵션을 걸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이 홍보실 측의 얘기다.이런 노력을 통해 100%에 가까운 99.9% 이상의 동의서를 얻을 수 있었다. 그 결과 드디어 2007년 4월 19일 기업개선작업이 개시됐다. 5월에 내부 정비를 시작해 6월에 자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2006년 2분기부터 누적되기 시작한 영업적자는 기업개선작업 시작 직후인 2007년 3분기부터 흑자로 돌아섰다.그렇다면 팬택 실적 회복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일단은 ‘레이저 쓰나미’가 사라지며 시장 상황이 호전됐다. 모토로라는 레이저의 성공에 도취된 나머지 3세대(3G)폰 개발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그 결과 2006년 세계 점유율 21.4%에서 2007년 13.9%로 내려앉으며 노키아에 이은 세계 2위 자리를 삼성전자에 내줘야 했다. 레이저 이후 별다른 히트 폰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팬택의 판매량도 서서히 늘어나 2007년 내수 141만 대, 2008년 내수 350만 대(추정치)에 이르렀다. 2007년 ‘돌핀폰(IM-U220)’ ‘레인폰(IM-S240K, IM-S250L)’이, 2008년 ‘러브캔버스폰(IM-R300)’ 등이 잇따라 히트한 결과였다. 모토로라 부진의 반사 효과일 수도 있지만 그동안 팬택이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기업개선작업을 계기로 비효율적인 내부 시스템을 뜯어고치는 기회로 삼았다.팬택은 기업개선작업 이전에 이미 내부 구조조정이 완료된 상황이었다. 2005년 말 4500명이던 직원을 2500명으로 줄여 놓았던 것. 2005년 SK텔레콤으로부터 ‘스카이’ 브랜드를 가진 SK텔레텍을 인수한 뒤였다. 박 부회장은 “뼈를 깎는 듯한 아픔이었다. 그러나 최대한 연공서열이나 맞벌이 부부 우선 같은 주관적인 감원이 아니라 철저하게 능력 위주의 구조조정이었다”고 얘기하고 있다.해외 사업에서도 사업 구조에서도 구조조정이 있었다. 2006년 수익성이 나지 않는 해외 지역은 과감하게 정리해 오픈마켓 시장은 철수하고 기업용 납품에 집중했다. “소비자들을 상대로 하는 오픈마켓은 마케팅 능력이 부족해 한계가 있었다. 그에 비해 기업 비즈니스는 품질과 인지도만으로도 가능하기 때문에 이에 집중했다”는 것이 팬택 측이 밝히는 이유다. 국내외 60여 개의 모델 수도 35개로 확 줄였다. 모델 수를 줄이는 대신 모델 당 판매량을 늘리는 전략으로 바꿨다.내수에서는 2007년부터 ‘큐리텔’ 브랜드를 출시하지 않고 프리미엄 제품군인 ‘스카이’로 브랜드를 통일했다. 그 결과 2008년 350만 대 이상의 내수 판매를 기록할 수 있었다. 팬택은 2008년 매출 2조1000억 원, 영업이익 2000억 원, 판매량 1000만 대(해외+내수)를 예상하고 있다.팬택의 기업개선작업은 2011년 12월 31일까지로 예정돼 있다. 아직 3년이나 남아 있지만 지금의 실적만으로도 조기 졸업도 충분히 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기업개선작업이 오히려 든든한 방어막 역할을 하고 있다. 중견 기업들이 금융권으로부터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팬택은 그럴 걱정 없이 채권단이 보호해 주기 때문이다. 남보다 일찍 위기를 겪은 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팬택계열은 소유 구조로 보면 이제 박 부회장의 손을 떠난 상태다. 2011년이 지나면 채권단은 지분을 매각해야 하는 상황을 맞이한다. 팬택 측은 “이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런 방안이 마련돼 있지 않고, 또 채권단이 알아서 할 일”이라는 입장이다.기업개선작업 전까지 박병엽 부회장은 팬택계열의 오너 경영인이었고 지금도 최고 수장이다. 다만 나이가 ‘회장’을 하기에는 젊다는 이유로 ‘부회장’ 타이틀을 달고 있다. 박 부회장은 기업개선작업에 들어가면서 직원들에게 ‘멘털(mental: 정신)’의 변화를 주문했다.기존 부서들은 전·후 단계의 부서들만 커뮤니케이션을 했지만 박 부회장의 주문은 전 부문을 크로스(교차)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CS(Customer Service)본부의 기본은 AS(After Service)를 잘하는 것이 전부였지만, 이는 업무의 기초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CS 부서는 고객과의 접점에서 만나는 곳으로 고객 불만의 데이터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부서이기도 하다. 이들이 거꾸로 연구·개발부서에 피드백하고 이를 통해 제품 개발 시 품질 확보에 기여하는 것이 CS의 본질적인 역할이라고 본 것이다. 품질이라면 보통 생산 과정에서 불량률을 낮추고 생산율을 높이는 것을 뜻했고, 이것은 그간 품질본부만의 역할이었다. CS 부서를 통해 개발 과정에서 품질을 확보하도록 하라는 것이 박 부회장의 주문이다.박 부회장이 또 하나 강조하는 것이 ‘공유와 참여의 기업 문화’다. 박 부회장은 e메일을 통해 보고를 받고 발전 방향을 많이 제시하는데, 그의 메일에는 항상 “동(同) 사안을 ~과 공유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말이 달려 있다. 박 부회장의 답장을 받은 직원은 이를 다른 직원들에게 다시 전달해 많은 정보들이 사내에서 e메일을 통해 전달된다. 박 부회장이 나서서 “공유하는 팀장과 하지 않는 팀장에 대해 인사 평가에 반영하겠다”고 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이를 통해 부회장 외에 임직원들 사이에서도 수시로 ‘공유’ 메일이 오가는 문화가 정착됐다. 이를 통해 애사심이 높아졌고, 특히 사내 루머가 없어졌다는 것이 팬택 측이 밝히는 효과다.취재=우종국 기자 xyz@kbizwee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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