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시장 찬바람에 ‘휘청’… 앞길 ‘캄캄’

일본 자동차, 불황 늪에 빠지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일본자동차공업협회 회장인 아오키 사토시 혼다자동차 회장은 2009년 일본 내 신차 판매 대수가 전년에 비해 4.9% 감소한 486만100대로 1978년(468만1863대) 이후 31년 만에 500만 대를 밑돌 것으로 예상하면서 최근 이렇게 말했다. 이에 따라 도요타자동차 등 일본 자동차 제조업체 8개사는 2009년 국내외에서 생산할 차량 대수를 당초 계획에 비해 221만1000대가량 줄이기로 했다. 일본 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해 온 자동차 업계의 불황이 심각한 상황으로 빠지고 있는 것이다.일본 자동차 업계가 미국발 금융 위기에 취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지나친 외수 의존형 수익 구조 때문이기도 하다. 2007년 3월 결산을 기준으로 도요타 혼다 닛산 마쓰다 스즈키 후지중공업 등 일본 자동차 6개사가 북미 지역에서 벌어들인 영업이익은 2조927억 엔이다. 전체 영업이익의 절반에 육박했다. 그러나 2008년 3월 결산에서는 이들 지역에서의 영업이익은 3013억 엔으로 급락했다. 금융 위기로 미국의 소비 시장이 바짝 오그라들었기 때문이다.JP모건은 “금융 위기로 인해 일본 자동차 메이커의 수익원이었던 북미 시장이 붕괴되면서 수익 구조가 격변했다”며 “일본 자동차 회사들은 새로운 모델을 찾아야 한다”고 경고했다.실제 일본 자동차 회사들의 자동차 판매 감소는 미국의 ‘빅3’ 못지않게 심각하다. 일본의 간판 자동차 회사인 도요타자동차의 2007년 11월 세계 자동차 판매는 61만8000대로 전년 동월에 비해 21.8% 감소했다. 여기엔 다이하츠공업 히노자동차 등 계열사들의 실적도 포함된 것이다. 이 같은 감소 폭은 월간 기준으로 비교 가능한 2000년 1월 이후 가장 큰 것이기도 하다.세계 동시 불황으로 미국과 유럽뿐만 아니라 아시아와 일본 내에서도 자동차 판매가 30% 가까이 줄어든 탓이다. 같은 기간 도요타자동차의 일본 내 판매는 10만8484대로 전년 동월 대비 28%, 해외 수출은 24%씩 감소했다. 이에 따라 2007년 1~11월 중 도요타자동차의 세계 생산은 773만1791대로 전년 같은 기간보다 2.1% 줄었다. 일본 내 생산은 3.4%, 해외 생산은 0.8% 위축됐다.일본 내 3위 자동차 회사인 닛산도 세계 전체 차량 생산 감소율이 25년 만에 최대치를 기록했다. 2007년 11월 전 세계 차량 생산량이 전년 동월 대비 33.7% 하락한 22만2212대로 줄었다. 이 회사가 1984년부터 전 세계 차량 생산 실적을 집계한 이후 가장 큰 폭의 하락률이다.혼다는 글로벌 생산 대수가 같은 기간 32만6176대로 9.9% 떨어졌다. 2003년 8월 10.5% 하락률을 보인 이후 최대 낙폭이다.상황이 이렇다 보니 도요타는 미국 내 새 공장 등의 생산 능력 증강 계획을 대부분 연기 또는 축소했다. 또 2009년 회계연도(2009년 4월~2010년 3월)의 설비 투자를 당초 계획보다 30%가량 낮은 1조엔 이하로 줄일 방침이다.또 도요타는 감산 확대를 통해 판매 차량의 재고를 줄이는 데도 힘을 쏟고 있다. 차량 제조공장은 낮과 밤 2교대가 기본이지만 2009년 2월에는 국내외 75개 공장 가운데 16개 공장에선 주간에만 라인을 가동할 계획이다.도요타는 북미 진출 24년 만에 처음으로 감원에도 나설 계획이다. 도요타의 북미 생산 부문의 짐 와이즈만 부사장은 “매출이 지속적으로 감소함에 따라 감원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며 “상황이 그 정도로까지 악화되지 않을 것으로 기대하지만 결코 가능성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도요타는 비용 절감을 위해 미시시피 주의 프리우스 공장과 텍사스의 트럭 공장 가동을 중단하는 등 미국과 캐나다에서의 생산량도 줄이기 시작했다. 2008년 70년 만에 처음으로 영업적자를 내는 등 심각한 경영난에 빠진 도요타가 특단의 조치를 강구하고 있는 것이다. 도요타는 2008년 회계연도(2008년 4월~2009년 3월)에 1500억 엔(약 2조 원)의 영업적자를 기록할 전망으로, 도요타가 영업적자를 내는 것은 창사 다음해인 1938년 이후 처음이다.경영 위기에 직면한 일본 자동차 업계에선 창업 가문 출신이 경영 일선 전면에 나서 비상 경영 체제를 꾸리고 있기도 하다. 책임감과 강력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한 ‘오너 경영’으로 지금의 위기를 정면 돌파하겠다는 전략이다.도요타자동차의 경우 창업자 4세인 도요다 아키오(53) 부사장을 오는 4월 정기주주총회에서 대표이사 사장으로 전격 승진시키기로 했다. 현재 와타나베 가쓰아키(67) 사장은 부회장으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날 것으로 알려졌다.도요타는 세계 자동차 판매 급감과 엔고로 2009년도 고전이 예상되면서 경영 체제 혁신 차원에서 창업 가문 출신인 도요다 아키오 부사장의 사장 기용을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도요타에서 창업 가문 출신이 사장을 맡게 되는 것은 1995년 8월 퇴임한 도요다 다쓰로(80) 이후 14년여 만이다. 도요다 다쓰로 사장 이후엔 오쿠다 히로시 상담역,조 후지오 회장,와타나베 가쓰아키 사장 등 전문 경영인들이 경영을 맡아 왔다.현재 도요다 가문이 갖고 있는 도요타자동차 지분은 2%에도 못 미친다. 그러나 도요타자동차에서 도요다 가문은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때문에 창업 가문 출신의 경영인에 대한 거부감은 없다.도요다 아키오 부사장은 도요다 사키치 도요타그룹 창업자의 증손자이자 도요다 쇼이치로(82) 현 명예회장 장남이다. 게이오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밥슨칼리지에서 경영학석사(MBA)를 받은 그는 뉴욕의 투자 회사에서 근무하다 부친의 권유로 도요타에 입사했다.2000년 이사에 취임한 뒤 2002년 상무,2003년 전무,2005년 부사장 등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며 경영 승계를 준비해 왔다.앞서 비상 경영을 선언한 경차 업체인 스즈키에서도 창업 가문 출신인 스즈키 오사무(79) 회장이 최근 경영 일선에 복귀했다. 스즈키 회장은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한 쓰다 히로히(64) 사장의 후임을 임명하지 않고 자신이 사장직까지 겸직하기로 한 것이다. 1978년 사장에 취임해 22년간 경영을 책임지다가 2000년 회장으로 물러난 스즈키 회장이 사장으로 경영 일선에 재등판한 셈이다.하지만 북미 의존형 수익 구조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치지 않고는 일본 자동차 회사들의 위기 탈출은 만만치 않을 것이란 지적이 많다. 2008년 회계연도 하반기(2008년 10월~2009년 3월)에 1900억 엔의 영업적자가 예상되는 혼다의 경우 친환경 차량 개발을 통해 향후 100년에 도전할 계획이다. 그러나 미국 내 판매가 회복되지 않으면 이런 계획의 재검토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도요타자동차도 2008년 11월 미국 내 신차 판매 대수가 전년 동월에 비해 34%나 감소하는 등 미국의 빅3에 속하는 포드자동차(30% 감소)에 비해 더 큰 타격을 입었다.도요타자동차 관계자는 “미국 빅3의 경영 위기가 강 건너 불이 아니다. 일본 자동차 업계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스즈키자동차의 스즈키 회장은 “지구 경제가 미국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고, 미국 경기가 회복되지 않으면 세계 전체가 곤란해진다”며 “자동차 산업의 부활을 위해서는 어쨌든 미국의 경기 회복이 필수적”이라고 말했다.차병석·한국경제 도쿄 특파원 chab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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