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물 ‘체증’탓 커…‘바닥론’ 대두

‘반 토막’이란 말이 대유행이다. 부동산, 펀드, 주식 할 것 없이 ‘반 토막’의 저주에 걸린 것처럼 침체의 악몽 속을 헤매고 있다. 실제로 아파트 시장에선 30% 이상 가격이 폭락해 ‘반 토막’을 향한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곳이 수두룩하다. 특히 서울 강남, 송파, 분당, 용인 등 강남권에 비상이 걸렸다. 아파트 1번지의 ‘굴욕’이다. 이제 사람들의 관심은 반 토막의 도미노가 어디까지 이어질 것인가에 모아져 있다. ‘이 정도면 바닥이 아닐까’하는 궁금증도 고개를 든다. 강남권 아파트 현장에서 반 토막 저주의 주문을 풀어봤다.“석 달 넘게 거래를 못했어요. 전기세 월세 다 밀렸다고 하면 알아 듣겠수? 집값이건 중개업소건 반 토막이라니까!”분당 이매동의 한 중개업소 사장은 기자가 들어서자 손사래부터 쳤다. “몇몇 아파트 값이 반 토막 난 게 사실이냐”는 질문에 그는 “호가가 2년 전 최고점과 비교해 40% 정도로 떨어졌으니 반 토막이나 다름없다”고 답했다. 매물이 쌓이는데 거래가 되지 않자 사정이 급한 집주인들이 가격을 계속 내려 부르면서 벌어진 일이라는 설명이다.몇몇 중개업소에선 “기자와 말하고 싶지 않다”며 “반 토막 난다는 기사 그만 쓰고, 바닥 쳤으니 사라는 기사를 쓰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하락 행진 속에서 거래마저 얼어붙자 심기가 아주 불편해 보였다.재건축 불패 신화가 호령하던 개포동 대치동 둔촌동 잠실동 등의 분위기도 비슷하다. 최고점 대비 40% 안팎이 내린 곳이 많아 집주인이나 중개사나 신경이 곤두선 모습이다. 대치동의 한 공인중개사는 시황을 묻는 질문에 “우리 상가 중개사들은 노코멘트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아예 입을 다물겠다는 소리다. 신규 입주 아파트가 쏟아진 잠실동의 한 공인중개사는 “하도 반 토막, 반 토막 말들을 하니까 저가 매수를 고려하던 실수요도 추가 하락의 공포심에 거래를 망설인다”면서 “이 정도면 집단 패닉(공황) 아니냐”고 했다.올 가을 겨울 재테크 분야 최고 유행어는 ‘반 토막’이 아닐까. 시작은 지난 10월부터 쏟아져 나온 비관적인 경기 전망에서 비롯됐다. 선대인 김광수경제연구소 부소장이 ‘부동산 대폭락 시대가 온다’라는 책을 통해 “한국 집값에는 거품이 잔뜩 끼어 있다. 향후 10년 동안 물가상승률을 감안한 실질가격 기준으로 반 토막 날 수도 있다”고 해 신호탄을 쏴 올렸다. 뒤이어 11월엔 다음 아고라에서 활동하는 논객 미네르바가 “주가 500까지 폭락, 집값 반 토막 날 것”이라고 예상하면서 본격적인 불이 붙었다.실제로 9월 추석 이후 아파트 시장은 하락세를 거듭하면서 불과 몇 개월 만에 반 토막 실현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부동산써브가 지난 9월 10일부터 석 달간 강남권 아파트 31만여 가구의 시세를 조사한 결과 전체 가구의 75.6%인 23만9934가구의 가격이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하락 폭에서도 강남권 아파트들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스피드뱅크가 아파트 값이 고점을 찍은 2006년 12월 셋째 주 대비 하락률이 큰 아파트를 조사했더니 서울 강남, 강동, 송파구와 용인 수지 등의 아파트가 상위 순위를 가득 채웠다.특히 강남구 개포동 주공6·7단지 112㎡는 2년 전 평균가 13억2500만 원에서 5억6000만 원이 떨어져 42.3%의 하락률을 기록했다. 강동구 둔촌동 주공3단지 112㎡도 평균 10억7500만 원에서 4억2000만 원이 떨어져 39%의 하락률을 보였다. 용인 신봉동 LG신봉자이2차 148㎡는 평균 7억8000만 원까지 올랐다가 최근 4억7500만 원선으로 39.1%나 떨어졌다.경매 시장에서는 반 토막의 윤곽이 좀 더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특히 분당·용인 일대 아파트 낙찰가가 추락 중이다. 분당은 3.3㎡당 1000만 원선, 용인은 3.3㎡당 700만 원선에 낙찰되는 사례도 나오고 있다. 2006년 말 분당 평균 아파트 값이 3.3㎡당 2000만 원, 용인 1500만 원을 웃돌았던 것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반 토막’이 난 셈이다.분당 금곡동 쌍용아데나렉스 218㎡는 지난 12월 1일 성남지원에서 6억6110만 원에 낙찰됐다. 최초 감정가의 57%로 3.3㎡당 낙찰가가 1001만 원에 그쳤다. 용인에선 수지구 상현동 만현마을5단지 아이파크 225㎡가 최근 경매에서 4억8100만 원, 3.3㎡당 707만 원에 낙찰되는 기록을 세웠다.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많고 많은 아파트 가운데 왜 몇몇 지역, 몇몇 아파트가 유난히 반 토막의 저주를 받고 있을까. 어떤 요인이 이들 아파트의 가격 하락 폭을 깊게 만드는 것일까. 혹시 다른 이유는 없을까.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다양한 답을 내놓았다. 우선 전통적으로 가격을 좌우하는 환경적인 요인이다. 박상언 유엔알컨설팅 대표는 “평균치보다 심한 하락세를 경험하는 아파트들은 몇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면서 “주변 입주 물량 증가, 신도시 건설로 인한 공급 확대 등 주거 및 투자 환경이 바뀌는 곳이 영향을 많이 받는데 잠실이나 용인, 분당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했다.박 대표는 또 “실수요보다 투자자가 많이 몰린 단지, 시장 출하 물량이 많은 대단지에서도 하락 폭이 크다”고 덧붙였다. 개포동 둔촌동 명일동 등지의 재건축 대상 아파트를 말하는 것이다. 특히 투자자가 많이 몰린 단지는 재건축 이슈 때문에 매매 값 대비 전세 값 비율이 3분의 1에도 못 미치는 곳이 많다. 통상 매매 가격의 50% 정도가 전세 값으로 책정되는 것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강동구 둔촌동 주공2단지 82.6㎡의 경우 최근 평균 매매가가 7억 원인데 비해 전세 값은 1억5000만 원선으로 4.5분의 1 수준이다.흔히 아파트 투자의 금과옥조로 꼽히는 ‘대단지 프리미엄’도 맥을 못 추고 있다. 거래가 부진해 매물이 해소되지 않고 계속 쌓이면서 시세에 불리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간의 압박을 받는 소유주가 내놓는 급매물이 시세에 반영돼 하락 도미노를 만들기도 한다.평상시에 선호도가 낮은 단지가 집값 하락기에 유난히 낙폭이 크다는 풀이도 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분당 이매동 K단지다. 이 아파트는 분당에서도 가격 하락 폭이 가장 큰 단지로 거명되고 있다. 그런데 그 이유가 경쟁력이 뒤떨어지는 구식 평면 설계 때문이라는 것. 분당 이매동의 한 중개업소 관계자는 “분당신도시 입주가 15년이 지난 만큼 평면 설계가 거의 구식이지만 이 아파트는 유난히 실용성이 떨어진다는 평을 받고 있다”면서 “요즘 같은 하락기에 이 점이 더 부각되면서 다른 단지보다 낙폭이 큰 것 같다”고 분석했다.이런 특징은 분당동 구미동 등 외곽지역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교통, 주거환경 등의 요인이 뒤떨어지는 경우 같은 신도시 울타리 내에서도 하락 폭이 크게 나타나는 것이다.물론 단지별로 각기 다른 이슈들도 가격에 큰 영향을 미친다. 개포동 주공 고층 단지가 대표적이다. 저층 단지의 용적률을 높이고 고층 단지의 용적률을 하향 조정한다는 안이 나온 게 약세의 주원인이라는 분석이다. 사업성 악화 우려가 가격에 반영된 셈이다.숫자의 오류 때문에 하락 폭이 부풀려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억지로 반 토막 만들기’경우다. 부동산 칼럼니스트 아기곰은 “정확한 시세는 건교부 실거래가를 기준으로 봐야 하는데 요즘 나오는 ‘가격’이라는 건 거의 호가가 기준”이라면서 “호가라고 해도 상한가 하한가의 상당한 간극을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실제로 최근 보도되고 있는 일부 기사는 ‘반 토막 아파트’를 만들기 위해 시세를 끼워 맞추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예를 들어 ‘2년 만에 48%가 하락해 반 토막이 됐다’고 보도된 분당 이매동 아름건영 162㎡의 경우 하락률 산정의 기준을 과거 최고 호가(13억 원)와 최근 하한가(6억8000만 원)로 맞췄다. 역대 최고 호가에서 최근의 하한가를 빼 보니 48%나 떨어졌더라는 이야기다. 즉, 로열동 로열층의 수리가 잘된 집의 호황기 가격과 저층의 낡은 아파트의 침체기 시세를 일직선상에 놓고 비교한 셈이다.이 아파트의 실제 가격을 놓고 다시 계산해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2006년 이 아파트의 최고 실거래가는 10월 하순의 10억4500만 원. 최근의 실거래가 신고가 없어 시세 정보 업체 평균가(하한가·상한가의 평균치, 스피드뱅크) 7억4500만 원을 기준으로 계산하니 하락 폭은 28.7% 정도였다.집값 하락은 현재진행형이다. 그러나 시장은 ‘부활’을 굳게 믿는 눈치다. 정부가 서울 강남 3구에 대한 투기지역 해제를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진 12월 17일, 현장에서의 즉각 반응이 이를 증명한다. 이날 강남의 거래 시장이 술렁이면서 급매물 호가가 즉석에서 1000만~2000만 원 올랐다. 잠실주공5단지, 개포 주공 등에선 급매물을 중심으로 거래가 성사되기도 했다.투자자들의 행태도 11년 전 외환위기 때와는 사뭇 다르다. 지난 11월 28~29일 한경비즈니스가 주최한 ‘2009 경제 대전망 세미나(유료)’엔 1200여 명의 청중이 몰려 성황을 이뤘다. 또 12월 17일 디지털 태인이 세종대에서 개최한 경매 강좌에는 250여 명이 몰렸다. 디지털 태인 관계자는 “예상보다 훨씬 많은 투자자가 몰려 관심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적당한 시기에 투자 대열에 합류하겠다는 이가 그만큼 많다는 의미다.하지만 향후 전망에 대한 전문가들의 의견은 분분하다. “분당 용인 등을 중심으로 10% 이상의 추가 하락이 예상된다”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금리 인하 후 심리적으로 바닥을 지나고 있다”는 의견도 있다. 또 경매 시장 쪽에선 “경매 낙찰가, 낙찰가율 등의 지표가 계속 떨어지고 있어 당분간 하락세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불황에는 경매 지표가 일반 부동산 시장의 선행지수 역할을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무릎에 사서 어깨에 팔라’는 투자 격언이 있지만 보통 사람들의 욕심은 이와 다르다. 바닥에 사서 상투에 팔고 싶은 게 인지상정. 그러나 바닥을 알아보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누가 알려주지도 않는다. 여러 방법을 통해 바닥임을 알아차리는 수밖에 없다.첫 번째 방법은 거래량 증감 추이를 확인하는 것이다. 가격이 떨어져도 거래량이 늘어나면 시장 참여자가 늘어나 회복된다는 징후로 본다.시장 상황을 변화시킬 변곡점이 나타났는지 여부도 중요하다. 부동산 칼럼니스트 아기곰은 “부동산 규제 완화, 뉴타운 지정, 전철 완공 등의 호재가 시장 참여자의 심리에 미쳐 변곡점을 만들어내곤 한다”면서 “시장 참여자의 투자 심리에 영향을 미칠만한 변곡점이 나타나면 시점을 두고 시장 가격에 반영되기 때문에 바닥이 가까이 왔다는 확실한 신호가 된다”고 말했다.경매 시장에서 힌트를 얻는 방법도 있다. 바로 낙찰가율 추이를 살피는 것이다. 박상언 유엔알컨설팅 대표는 “외환위기 후 부동산이 반등을 시작한 2001년 상반기에 경매 낙찰가율이 올랐다”면서 “80% 선이 넘으면 반등의 신호로 볼 수 있다”고 귀띔했다. 12월 15일 현재 서울지역 아파트 낙찰가율은 71.8% 선이다.취재=박수진 기자 sjpark@kbizweek.com
상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