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의 비밀은 ‘테르와르’에 있다

와인 ①-아버지와 아들

아기 타다시 ‘신의 물방울’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코맥 매카시의 소설 ‘로드’는 아버지와 아들이 주인공이다. 그런데 일흔이 넘은 저자에게 열 살이 안 된 아들이 있다고 한다. 아마도 소설에는 ‘아버지가 없는 어린 아들이 어떻게 인생이라는 길을 살아갈까’라는 늙은 아버지의 애틋한 생각이 투영되지 않았을까. 아버지의 관점에서 읽어서인지 내내 가슴에 바람이 불었다.전 세계적인 와인 선풍에 따라 화제가 되고 있는 만화 ‘신의 물방울’에서도 죽음 이후에도 아들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진한 사랑을 엿볼 수 있다. 췌장암으로 죽은 와인 평론가 아버지(칸자키 유타카)와 생전 아버지의 속을 무던히도 썩인 아들(칸자키 시즈쿠)의 이야기가 중심이다.‘신의 물방울’은 칸자키 유타카가 67세에 췌장암으로 사망하면서 유언을 남기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의 아들 시즈쿠는 맥주 회사에 근무하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와인 평론가로 양자가 된 토미네 잇세와 와인을 감별하는 대결을 벌인다. 승자는 20억 원에 이르는 와인 컬렉션을 계승한다. 처음에는 와인 평론가인 토미네 잇세가 게임을 주도하지만 시즈쿠가 ‘야성’을 발휘 하면서 팽팽한 대결이 펼쳐진다.= 유럽의 대기업에서는 경영자 간의 상담에 어떤 와인을 내놓느냐로 교섭의 향방이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아버지는 꼬마 때부터 뭔지도 모르는 행동을 하게 하셨어. 조금씩 맛이 다른 포도 주스를 마시거나, 다양한 물질의 맛을 보고, 냄새를 맡은 뒤 아버지한테 질문 세례를 받기도 했어. 그리고 아버지가 마시는 와인의 디캔팅은 내 일의 하나로, 실패하면 야단을 맞고 수없이 물로 연습을 해야 했지. 무엇보다 알 수 없는 건 시집을 읽어라, 그림을 봐라, 음악을 들어라…. 와인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 보이는 일에 잔소리를 해댔던 아버지가 왠지 와인의 이름에 대해서는 무엇 하나 가르쳐 주지 않았다는 점이야.”디캔팅은 와인의 맛을 ‘열어 주는’, 한마디로 와인을 공기와 만나게 해 단숨에 숙성을 진행시켜서 마시기 위한 작업이다. 와인 평론가인 아버지는 아들에게 어린 시절부터 디캔팅 훈련뿐만 아니라 후각과 미각 키우기 훈련을 하게 했다. 와인에 문외한이었던 아들이 아버지가 유언으로 남긴 과제를 풀면서 와인 전문가로 거듭나게 되는 것은 어린 시절 훈련 덕분이다.“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시켜서 뭔지도 모르는 많은 것들의 냄새를 맡아보며 자랐거든. 뜰에 있는 허브에 산딸기에, 산사나무, 아카시아 같은 꽃 냄새 등. 이상한 연필이랑 허리띠. 모닥불 냄새 같은 것도 익혀두라고 하셨지.”향은 와인을 평가하는 중요한 포인트로 소믈리에가 되려면 후각 훈련이 중요하다. 시즈쿠는 어린 시절 심지어 연필 냄새나 가죽 냄새도 맡아야 했다. 숙성된 와인의 냄새로 감별법을 익히기 위해서다. 즉, 와인 영재 교육을 받은 것이다.여기서 ‘기초 중시’를 읽을 수 있다. 냄새 훈련뿐만 아니라 감성과 표현력을 키우기 위해 시와 음악, 그림 공부도 시켰던 것. 결국 아버지는 아들이 와인의 길에서 벗어나자 유언이라는 마지막 수단을 통해 와인의 길로 이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 이끄는 방식이 철저하고 치밀하다는 점이다. 아버지가 와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아들을 와인계의 프린스라 불리는 와인 평론가 토미네 잇세와 대결하게 한다. 이는 자신에게 와인 영재 교육을 받은 아들을 믿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사람은 와인으로 구원을 받고 어떤 사람은 와인으로 인해 인생에 실패하기도 한다. 한 병의 와인 때문에 인생이 바뀐 사람도 있다.‘신의 물방울’에서 전체 줄거리를 압도하는 것은 바로 ‘테르와르(terroir)’다. 와인의 비밀은 포도밭의 테르와르에 달려 있다는 것. 테르와르는 포도밭의 토양과 배수 등의 환경이 와인 맛을 결정하는 핵심이라는 것이다. 화제가 되고 있는 TV 드라마인 ‘가문의 영광’에서 가풍이 중요한 것과 마찬가지다. 드라마에서처럼 종가와 졸부 집안의 차이는 물질적 부가 아니라 가문의 환경, 즉 테르와르가 아닐까.부르고뉴 와인 등급은 포도가 나는 밭에 따라 등급을 매긴다. 특급 포도원은 그랑크뤼(grand cru), 1급 포도원은 프리미에 크뤼, 마을 단위 와인, 부르고뉴 루주(부르고뉴 지방의 어느 곳에서 수확한), 기타 와인(포도를 블렌딩해서 만든 싼 와인) 순으로 나뉜다.특급 와인인 그랑크뤼는 포도밭의 토질과 햇빛, 배수 등 포도를 둘러싼 환경이 특히 뛰어나다고 인정받은 포도원을 말한다. 거기에서 수확한 포도로 만든 와인의 특징은 토질의 맛과 향에 햇빛과 배수가 과실의 맛으로 변해 나타난다. 그것이 포도원의 환경과 성질, 즉 테르와르라는 것이다.= 진정한 도멘(와인 양조가)은 이윤을 뒤로하더라도 좋은 와인을 제공하고 싶어 한다.와인 ‘에세조’에는 가격이 배 이상 차이 나는, 등급이 다른 두 와인이 있다. 특급 와인인 그랑크뤼와 ‘마을 단위’ 등급으로 같은 포도원에서 태어난 나이가 다른 형제의 와인이다. 이는 부르고뉴를 대표하는 명 와인의 양조가 베르나르 장 그로의 고집 때문이다. 마을 단위 와인의 포도를 딴 밭은 원래 그랑크뤼 에세조의 구획인데 포도나무를 다시 심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2001년까지 마을 단위의 등급을 달고 출하한 것이다.젊은 포도나무가 특급 와인이 될 수 없는 이유는 젊은 나무는 뿌리가 아직 깊이 뻗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말은 땅 속 깊은 곳에 잠자고 있는 뿌리의 힘, 미네랄과 양분을 충분히 흡수할 수 없다는 뜻이다. 빈티지의 차이도 있어 마을 단위 와인 쪽이 가볍다는 느낌을 주게 되는 것. 그 느낌이 바로 ‘테르와르’에서 오는 것이다.“내가 아버지가 길러낸 블루베리라면 그 사람(로랑)은 아사마 산에 열린 야생 블루베리 같아…. 타클라마칸 사막이라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자랐는데 놀라운 후각과 미각, 게다가 감성까지 갖추고 있어.”‘시즈쿠-미야비팀’에서 시즈쿠의 어시스턴트 역할을 하는 미야비는 소믈리에의 길을 걷다 시즈쿠팀에 합류한다. 그는 와인에 대한 지식이 해박하다. 토미네 잇세가 “내 사무실의 스태프로 스카우트하고 싶을 정도야”라고 유혹하기도 한다. 미야비는 자신이 마신 와인을 사진으로 찍어 데이터로 분류할 정도로 와인에 대한 열정과 식견이 높다. 반면 시즈쿠는 와인에 대한 체계적인 지식은 없지만 ‘야성’이 번뜩인다. 아버지의 훈육으로 본능적으로 후각이 발달돼 있고 아버지와 여러 음식을 먹어 미각 또한 굉장하다.이들과 대결하는 ‘토미네 잇세-로랑팀’에서 토미네 잇세는 최고의 와인 평론가다. 이에 반해 로랑은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자라 와인에 대한 지식이 없고 시즈쿠처럼 야성의 소유자로 본능적으로 후각이 발달했다. 하지만 두 팀은 서로의 단점을 보완해 주면서 이상적인 ‘드림팀’이 된다.= 당신은 내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가지고 있어. 난 당신에게 없는 것을 갖고 있고. 서로를 이해하면서 부족한 것을 보완하는 것이 완전한 미학으로 통하는 지름길이야(토미네 잇세가 로랑에게).“내내 아버지에게 반발하며 성인이 됐기 때문에, 이 나이가 되도록 와인을 마시지 않았어. 고집불통에 답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 결국 아버지와 함께 와인 잔을 기울인 적이 한 번도 없었지.”어린 시절 시즈쿠는 아버지가 마실 와인을 디캔팅하다 그만 향기에 취한 적이 있다. 그때 와인을 먹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아들에게 한 모금도 주지 않았다.“제가 생각하기에 시즈쿠 씨한테 ‘갈망’을 가르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어요.” 20억 원짜리 와인 컬렉션을 관리하는 별장지기는 시즈쿠에게 아버지가 와인에 대한 ‘갈망’을 심어주기 위해서라고 풀이한다.= 와인은 사람과 같이 일기일회(一期一會)라는 말을 생각나게 한다. 사람과 똑같이 만남이 있기에 거기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는 것이다.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비교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향신문 기자를 거쳐 현재는 연세대 미디어아트연구소 전임연구원으로 강의를 하는 한편 자녀경영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5백년 명문가의 자녀교육’ ‘세계 명문가의 자녀교육’ ‘5백년 명문가, 지속경영의 비밀’ ‘아빠가 들려주는 경제 이야기 49가지’ ‘메모의 기술 2’ ‘한국의 1인 주식회사’ 등의 저서가 있다.최효찬·자녀경영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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