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투자를 통해 경기 부양할 때’

한·일 석학 인터뷰 -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

한국은행 총재직에서 물러난 지 어언 2년 반.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는 스스로를 가리켜 ‘자연인’이자 ‘자유인’이라고 불렀다. 현직에 있을 동안 마음대로 하지 못했던 여행과 바둑 등 취미생활을 원 없이 즐기고 있다. 1년에 두 달 정도는 외국에 나가 노년의 여유를 만끽한다. 무엇보다 가족에 충실하려고 노력하는 그는 요즘 명절이나 집안 행사 때 집으로 찾아오는 11명이나 되는 손자 손녀들의 재롱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가족 얘기를 하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짓던 그도 최근의 경제 현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눈빛이 달라졌다. 그는 예의 또렷또렷한 말투로 현재 진행 중인 경제 위기의 원인과 해법을 제시했다. 그는 지금의 금융 위기보다 조만간 닥칠 실물경기 침체가 더 걱정된다면 정부가 적극적으로 경기 부양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단순한 경기 사이클 측면에서 최근의 문제로 접근해서는 실체를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세계경제의 장기적 흐름에서 파악해야 합니다. 1990년대를 전후해 세계경제에는 3가지 큰 흐름이 나타났습니다.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세계화, 그리고 중국 경제의 부상이 그것입니다. 이 세 가지 요소가 어우러지면서 세계경제는 유례없는 15년간의 장기적 호황을 맞게 됩니다. 이 시기 경제의 특징은 고성장과 저물가, 양극화, 호황 속의 서민 경제 침체 등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저물가로 인한 과잉유동성이 불거지면서 자산에 거품이 끼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최근의 경제 위기는 이러한 장기 호황의 말기 증상으로 거품이 터진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지금 한국을 포함한 세계경제는 호황에서 불황으로 넘어가는 변곡점에 서 있습니다.금융 위기는 아마 1~2년 정도 지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실물경기 침체입니다. 이미 피부로 느낄 수 있지만 금융 위기 이후에 닥치게 될 실물경기 침체는 4~5년 이상 계속될 것입니다.한국 경제의 펀더멘털이 양호하다는 지적에는 동감합니다. 10여 년 전 외환위기를 겪으며 우리 기업들이 구조조정을 성공적으로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업들은 빚도 거의 없으며 은행들의 부실 채권도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외화보유액도 최근 줄긴 했지만 2000억 달러에 이르고 있습니다. 펀더멘털만 놓고 보면 우리나라가 미국이나 유럽보다 뒤처질 게 없습니다. 문제는 파이낸셜타임스(FT) 등 외신들이 한국을 위험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들은 심지어 국가 부도의 위험성까지 얘기하고 있습니다.무엇보다 단기 부채가 많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금융 시스템이 매우 취약하다는 얘기입니다. 한국 금융시장에서 외국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지나치게 높다는 점도 외신들이 우려하는 부분입니다. 우리나라 주식시장의 40% 정도가 외국인인데 만약 이들이 한꺼번에 시장에서 빠져나가면 큰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파생상품, 특히 그중에서도 선물환 시장이 너무 크다는 것도 우려 요소입니다. 조선업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조선 업체들은 환율 헤지를 위해 선물환을 순매도하는데 이 규모가 올해의 경우 약 1500억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경제가 정상적으로 돌아갈 때는 이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게 어디서 막히기 시작하면 문제가 심각해집니다.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때처럼 국가 부도 사태까지는 오지 않을 것으로 봅니다. 고비만 넘기면 환율도 다시 떨어질 것이고 자금 경색도 풀릴 것입니다. 하지만 서민 생활의 어려움은 이전보다 훨씬 가중될 것입니다. 고용 없는 성장이 심화되면서 중소기업, 자영업자, 농민들이 피부로 체감하게 될 고통은 IMF 때보다 더 심해질지도 모릅니다. 지금부터라도 철저하게 대비해야 합니다.은행에 공적자금을 투입하자는 말은 은행을 사실상 국유화하자는 얘긴데 지금 그럴 때는 아니라고 봅니다. 은행 스스로 위기를 극복하고 스스로 구조조정할 수 있도록 지원·유도하는 정책이 무엇보다 긴요하지요. 하지만 금융회사 구조조정에 대한 강력한 유도와 감시·감독이 병행돼야 한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지금 닥친 경제 위기에 대한 정부의 상황 판단은 너무 안이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입니다. 우리 경제의 펀더멘털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강조했을 뿐 바깥에서 지적하는 위기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위기를 위기로 보지 못하다 보니 제대로 된 처방도 나올 수 없었습니다. 정부가 그동안 추진해 온 성장 우선 정책은 정상적인 경제에서 쓸 수 있는 것이지 지금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는 적절하지 않습니다. 감세 정책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최근 정부가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민생 우선 정책으로 전환한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지요.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 민생 중심의 공공 투자 정책을 펼쳐야 합니다. 영세민과 자영업자, 실업자 등을 위한 사회 안전망 강화에도 팔을 걷어 붙여야 합니다. 이를 위해선 막대한 재정 지출이 뒷받침돼야 하는데 일부 부유층을 위한 감세 정책은 앞서 지적했듯 지금과 같은 비상 상황에서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내년이 되면 빈곤층은 지금보다 더 늘어날 것입니다. 날로 심각해져 가고 있는 청년 실업 문제에 대한 대책도 세워야 합니다. 영세 자영업자들에 대해선 경기 침체가 끝날 때까지 한시적으로 1~2년 정도 조세를 감면해 주는 방안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경기를 부양하기 위해선 소비를 늘리는 방법이 있고 투자를 늘리는 방법이 있습니다. 지금 정부는 부유층의 소비를 늘려 경기를 부양하려고 하는데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비능률적입니다. 지금은 투자를 통해 경기를 부양해야 하는데 민간 투자로는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우리 기업들은 수십조 원의 현금을 보유하고 있지만 투자를 하지 않고 있는 상황 아닙니까. 가장 확실한 것은 정부가 대규모 투자에 나서는 것입니다.얼마 전 종부세 완화를 골자로 한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나왔지만 저는 잘못됐다고 봅니다. 개인적으로 전 종부세를 환급받을 수 있는데 나라를 위해선 종부세 유지가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의 부동산 시가 대비 보유세 비율은 0.2% 수준입니다. 미국은 1.5%, 일본은 1.4% 정도입니다. 종부세 도입으로 이 0.2%를 내년부터 0.6%로 올리겠다고 하는 것인데요, 한국이 부동산 중심 사회에서 벗어나려면 이 비율을 앞으로 높여나가야 하는데 이를 없었던 일로 하자고 하니 안타깝습니다.조금 과장을 덧붙여 얘기하면 요즘 어느 지방을 가 봐도 마을이 유령화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농촌에 어린애 울음소리가 그쳤다는 얘기도 나온 지 오래됐지만 상황은 더 악화돼 가고 있습니다. 사람이나 기업 모두 수도권으로만 몰리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지방을 황폐화시켜서는 대한민국에 희망이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선진화를 가로막는 가장 큰 원인이 수도권 과밀화와 지방 황폐화라는 사실을 정책 당국자들이 알아야 합니다. 주택난도, 환경 문제도, 교통난도, 교육 문제도 모두 수도권 과밀에서 비롯됩니다. 지방의 대입 차별도 없애야 합니다. 수능 성적보다 내신 중심으로 대학생을 선발하는 게 방법입니다.1936년 전북 김제 출생.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뉴욕주립대 올버니대학원 경제학박사. 1976~2001년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 1988년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 1988~89년 건설부 장관. 1993~96년 대한주택공사 이사장. 2001년 공적자금관리위원회 민간위원장. 2002~06년 한국은행 총재.김재창 기자 changs@kbizwee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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