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경영 조력자’…한국형 모델 ‘시급’

어떻게 키울까

세계화 시대를 살아가는 대다수의 글로벌 시민들은 ‘싱크탱크’가 개별 국가가 직면한 다양한 핵심 과제들을 선별하고 해결하는 국가 발전의 중요한 파트너라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비록 싱크탱크의 기원과 역할에 대해서는 저마다의 사회가 처한 역사적 배경과 정치적 환경에 따라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싱크탱크’가 행정부 정당 기업 언론 시민사회 등의 주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국가 발전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공감하고 있는 것이다.싱크탱크의 기능을 ‘국가 경영(statecraft)의 조력자’라는 광의의 차원에서 해석한다면 조선시대의 집현전이나 피렌체의 마키아벨리의 경우도 포함될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정당이나 언론, 기업보다 훨씬 오래된 역사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최근에는 싱크탱크의 역할이 세계화 시대라는 환경 변화에 조응하면서 싱크탱크 간 초국가적 네트워크가 형성되고 있다.이러한 네트워크 형성을 통해 소위 ‘정책 지식(policy knowledge)’의 글로벌 교류 현상이 매우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안타깝게도 ‘선진국 벤치마킹’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능동적이었던 우리 사회가 유독 한국형 싱크탱크의 양성에는 뒤처져 있다는 생각에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의 글로벌 경쟁력을 상실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를 갖게 된다.싱크탱크의 역할을 압축적으로 설명하자면 거버넌스 차원에서의 ‘책임성(accountability)’을 높이는 데에 있다. 이 과정에서 상시 정책 전문가들이 양산돼 집권 세력에 공급되기도 하고, 특정 정책의 실행을 위해 시민들을 대상으로 홍보 및 교육을 담당하기도 하며, 또한 동일한 이념적 정체성을 공유한 정치 세력과 연결돼 이데올로기적 논쟁에 휩싸이기도 하는 것이다.그렇다면 세계화 시대에 걸맞은 한국형 싱크탱크의 발전 전략은 무엇일까. 첫째, 국내 싱크탱크의 발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전문가 정신으로 무장한 싱크탱크 종사자들이 지속적으로 공급돼야 한다. 싱크탱크에서 요구되는 ‘전문가 정신’은 ‘다양한 지식들을(기반 지식)을 정책 개발 과정에서 가용 가능한 지식(활용 지식)으로 활용할 수 있는 능력’, ‘대내외적 환경 변화를 정책 개발에 효율적으로 접목할 수 있는 능력’, ‘필요한 경우 국민들을 계도하면서 민의를 분야별 정책 개발에 성공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 능력’으로 요약된다.헤리티지, 브루킹스, RAND, 카네기재단과 같은 미국형 싱크탱크는 물론이고 유럽 주요국과 일본, 심지어 중국에서도 다양한 영역에 걸친 싱크탱크들의 활약이 돋보인다. 이들의 글로벌 활약이 가능한 배경에는 무엇보다도 싱크탱크를 통한 상시 전문가 집단이 형성돼 있기 때문이다. 자기 분야에서 최고의 정책 대안을 개발할 수 있는 상시 전문가 집단이 없이는 국정 파트너로서의 싱크탱크를 기대하기는 어렵다.둘째, 이러한 전문가 집단을 바탕으로 한 ‘싱크탱크 시장’이 형성돼야 한다. 시장이 가지는 가장 긍정적인 의미인 ‘건강한 경쟁을 통한 전체 이익의 상승’을 싱크탱크 차원에서 적용해 본다면 책임 있는 전문가들 사이에 정책 개발 경쟁이 일상화되고 이 과정에서 정책 대안들 간의 ‘선택’과 ‘탈락’이 반복된다면 싱크탱크의 발달로 말미암아 우리 사회의 포괄적인 부와 이익은 증대될 수 있을 것이다.선거 때마다 접하게 되는 싱크탱크연(然)하는 소규모 홍보회사 수준이 아니라 ‘정책 시장’에서 구매될 수 있는 정책을 개발할 수 있는 총체적인 능력의 제고가 필요하다. 미국의 경우 어림잡아 싱크탱크의 역할을 담당하는 기관의 수는 2000여 개, 이 중에서 경쟁력을 확보한 약 200개의 싱크탱크는 수요자로부터 선택된 정책을 공급하는 소위 ‘시장에서 살아남은’ 기관으로 볼 수 있다.현재 국내 싱크탱크의 경우 특정 기업에서 운영하는 어느 한 경제연구소가 싱크탱크 시장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누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정 경쟁이 실종된 시장은 시장으로서의 존재 가치가 없듯이 경쟁에서 살아남은 정책을 공급하지 못하는 싱크탱크는 국가 거버넌스의 책임성 제고에 별반 도움이 되지 못한다.셋째, ‘재정’과 ‘정치적 영향력’으로부터 독립적인 싱크탱크여야 한다. 안정적인 재정 능력을 갖추고 집권 세력을 포함한 외부 정치 세력으로부터 독립적일 수 있어야 진정한 글로벌 경쟁력이 생겨난다. 이와 관련해 일부 사람들은 일종의 한국형 싱크탱크인 ‘국책연구기관’을 비판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을 보인다. 사실 재정적으로 독립적인 싱크탱크의 발달은 전형적인 미국형 싱크탱크의 경우이고 각 나라의 사정에 따라 싱크탱크들이 국가와 기업 등으로부터 재정의 일정 부분을 의존하는 경우는 흔히 발견된다. 다만 재정 지원 방식을 ‘전략화’해 정책 개발의 독립성이 훼손되지 않는 방안을 강구할 수만 있다면 다양한 재정원(財政原)의 개발은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정책 개발 과정에서 싱크탱크 종사자들의 독립성 확보는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이므로 외부 영향력으로부터 이들을 보호하는 장치는 매우 중요하다. 유럽의 싱크탱크들이 정부를 포함해 다양한 외부 기관의 재정 지원 속에서도 연구의 독립성을 확보하고 있는 지혜를 참고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형 싱크탱크의 일종인 ‘국책연구기관’의 부정적인 측면을 부각하기보다는 오히려 싱크탱크로서의 글로벌 경쟁력을 모색해 보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사실 한국개발연구원(KDI), 산업연구원(KIET) 등과 같은 우리의 토종 싱크탱크가 아니었다면 우리의 성장 신화는 그렇게까지 감동적이지 않았을 것이다.마지막으로 국내 싱크탱크의 발전을 위해서는 세계적인 싱크탱크와의 지식 교류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최근에 와서 국내 대규모 정책 연구 기관의 경우 글로벌 싱크탱크와의 연대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만 대개의 경우 미국의 특정 싱크탱크들과의 관계 강화에 집중돼 있다. 또한 그 내용 면에서도 지식의 환류를 통한 정책 개발의 ‘시너지효과’라기보다는 인맥 관리, 혹은 정책 지식의 일방적인 수입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훌륭한 정책은 그 완성 과정에서 다양한 지식(정책 지식)을 흡수해야 하는 일종의 먹이사슬적 특성을 보이는데, 다양한 정책 지식의 공급원이 국내적 차원에 머무르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훌륭한 음식의 7할은 재료가 결정하듯이 국내외를 넘나드는 지식(특히 실용적 지식)의 공급이 있어야만 성공적인 정책 개발이 가능한 것이다.세계 주요국의 유력 싱크탱크들은 정부를 대신해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지식을 공유함은 물론 인권 안보 교육 환경 등 초국가적 이슈들에 대해서 서로 경쟁적으로 대안을 내놓음으로써 글로벌 사회의 규범과 규칙을 제시하는 새로운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한마디로 싱크탱크들 간 글로벌 경쟁과 네트워크가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국가 경영과 관련해 유력한 행위자로 등장해야 하는 과제조차 달성하지 못한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이제 또다시 새로운 뒤처짐으로 다가오고 있다.‘시장’과 ‘마케팅’을 전제로 한 미국식 싱크탱크의 역할은 국가 운영 과정에서 이미 정치적 상수가 되었고 미국식 국가 경쟁력의 원천이 되었다. 이제 우리 사회도 민주화 20년의 역사를 경험했고 그만큼 국가운영 방식의 근간이 바뀌었다. 그 한가운데에 싱크탱크의 역할이 기대되는 현실이다.민주화 과제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우리는 이제 선진화라는 새로운 고지를 향해 국가 발전을 위한 핵심 과제들을 선별하고 전문가 정신으로 무장한 상비 정책 개발자들을 통해 한국 사회의 질적 향상을 위한 정책들을 생산하도록 해야 한다. 세계화, 정보화 시대에 맞춰 활용 가능한 지식과 정책 판단의 토대가 되는 근본적인 아이디어를 끊임없이 발굴해 이를 적용 가능한 정책으로 전환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동아시아에서 가장 건강한 민주주의를 이룩한 우리사회가 하루빨리 세계 유수의 싱크탱크와 경쟁할 수 있는 견고한 정책 연구 기관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박인휘·이화여대 국제학부 교수 ihpark@ewh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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