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아온 반도체 호황…“슈퍼사이클 정점은 2030년”

5G·전기차 등 4차 산업혁명이 수요 견인...파운드리·AI 반도체 역량 키울 기회로 만들어야

[커버 스토리]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네덜란드 에인트호번에 위치한 ASML 본사를 찾아 김기남 삼성전자 DS부문장 부회장과 EUV 장비를 살펴보고 있다. / 연합뉴스

반도체 시장에 지각변동이 일고 있다. D램을 중심으로 반도체 슈퍼사이클(장기 호황)에 접어들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연초부터 공급 부족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차량용 반도체 등 시스템 반도체도 격변을 예고한다. 반도체 기업들은 올해 사업 계획과 설비 투자를 정비하며 대응에 나서고 있다. ‘초호황’ 이후 상흔을 남긴 지난 슈퍼사이클과 이번 슈퍼사이클은 다를까.

세계 D램 가격, 5.26% 상승

최근 반도체 시장은 공급 부족과 가격 상승에 요동치고 있다. 대만의 시장 조사 업체 D램익스체인지에 따르면 PC에 주로 사용되는 D램(DDR4 8Gb 1Gx8 2133MHz) 고정 거래 가격은 올해 1월 말 기준 전달보다 5.26% 올랐다. D램 가격은 2018년 4분기부터 떨어지기 시작해 거의 2년 가까이 하락세를 유지하다가 작년 11월과 12월 보합세를 기록한 이후 올해 들어 상승했다.

메모리 반도체는 90% 이상을 물량 계약 후 고정 거래 시세에 맞춰 협상을 진행한다. 부족한 부분은 대만을 중심으로 한 현물 시장에서 거래한다. 실시간 시장 상황을 반영하는 D램 현물 시장에선 최근 상승세가 더욱 뚜렷하다. PC D램 범용 제품인 DDR4 8G 2400Mbps 현물 가격은 지난 2월 22일 22개월 만에 4달러를 돌파했다. 2월 25일 현재 가격은 개당 4.28달러로 지난달 말보다 16.1%, 작년 말보다 23.6% 급등했다. 중국 현물 시장에서도 D램 시장 거래 가격의 35% 이상 프리미엄이 생기는 등 가격이 폭등을 거듭하고 있다. D램 현물 가격 상승은 결국 기업 간 거래인 고정 거래 가격 상승으로 수렴한다.

시장 조사 기관들은 시장 규모와 가격을 상향 조정하고 나섰다. 시장 조사 업체 트렌드포스는 2분기 서버 D램 고정 거래가 상승률 전망치를 기존 8~13%에서 10~15%로 상향 조정했다. D램뿐만 아니라 낸드플래시 가격도 하반기 이후 상승세를 보일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업계 관계자는 “2017~2018년 슈퍼사이클 당시 업계 영업이익률이 삼성전자 기준 74%, SK하이닉스는 50%대까지 올라간 경험이 있어 아직 그 정도의 현상이 올해 중 나타날지는 알 수 없지만 작년 하반기부터 가격이 반등해 상승 국면에 접어든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고 말했다.

안기현 반도체산업협회 상무는 “메모리 반도체의 가격이 오르는 것은 확실하며 2018년까지 경험한 슈퍼사이클 때는 1년에 60%씩 성장했다면서 이번에는 10% 이상 오를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반도체 슈퍼사이클 도래 가능성 점검

최근 반도체 수요는 스마트폰과 서버가 이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2020년 D램 수요 비율은 모바일 40%, 서버 33%를 기록했다. 전문가들은 특히 지난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후 비대면 경제가 활성화되면서 PC·노트북·TV 등 정보기술(IT) 신규 수요가 증가한 점을 요인으로 꼽는다. 또한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가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면서 인터넷 클라우드 사업이 성장한 점도 서버 수요를 견인했다.

슈퍼사이클은 원자재 시장에서 유래한 용어로, 장기 가격 상승 추세를 의미한다. 사이클 상승 국면, 반도체 가격, 시장 규모, 영업이익률 등 다양한 기준을 가질 수 있다. 이승우 유진투자증권 센터장은 슈퍼사이클을 “2년 연속으로 반도체 평균 판가가 올랐을 때”로 정의한다. 이에 따르면 과거 1994~1995년, 2017~2018년 두 번에 걸쳐 슈퍼사이클이 왔다.

이 센터장은 “지난 2년간 상대적으로 주춤했던 D램 사이클이 앞으로 2년간은 성장 드라이브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며 “올해는 가수요의 영향으로 가격이 상승한 부분이 있어 하반기에 약간 조정을 받은 후 내년 이후 진정한 슈퍼사이클이 올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 센터장은 “앞으로도 언택트(비대면)의 흐름은 계속될 수밖에 없고 특히 메타버스(Metaverse : 가상현실)’, ‘모빌리티’,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 회사)’ 등 크게 세 개의 축으로 봤을 때 반도체의 성장성이 높다”고 말했다.

슈퍼사이클이 아닌 ‘업사이클의 귀환’으로 평가하는 시각도 있다. 메모리 반도체의 사이클은 좋을 때도 있지만 나쁠 때도 있는 순환적 의미를 갖는다. 김선우 메리츠증권 애널리스트는 “2016년 중반부터 2018년 10월까지 약 2년 4개월에 걸친 긴 업사이클을 경험하면서 제조업으로서는 경이로운 70%대 영업이익률을 기록했지만 슈퍼사이클이라고 칭하기에는 슈퍼다운사이클이라는 아픈 부분이 있다”며 “구매자와의 상호 장기 성장을 위한 건설적인 방향의 협력 관계가 아니었고 그 결과 2019년 50% 가깝게 가격 하락을 겪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에는 구매자들도 과거와는 다른 모습을 보일 것이고 판매자들도 과하게 가격을 끌어올리지는 않을 것”이라며 “순환적 관점에서 볼 때 내년 2분기에서 3분기 사이 가격 상승이 끝나고 하락세에 접어들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김 애널리스트는 “과거와 같은 강도의 슈퍼사이클은 있어서는 안 되고 ‘업사이클의 재도래’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하다”고 덧붙였다.

반도체 수출액을 기준으로 보면 2017년부터 시작된 슈퍼사이클은 아직 현재 진행형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연구원은 “슈퍼사이클이 장기적인 관점을 얘기하는 것으로, 반도체 수출로 보면 2016년 650억 달러 수준에서 2017년 900억 달러를 넘어선 이후 2019년 공급 초과로 단가가 떨어진 상황에서도 900억 달러를 넘었고 코로나19 국면인 지난해에도 역대 둘째 실적인 980억 달러를 기록했다”고 말했다.

시장 조사 기관 옴디아 등에 따르면 D램 시장은 2020년 653억 달러에서 2023년 892억 달러로 연평균 11%, 낸드플래시 시장은 2020년 560억 달러에서 2023년 926억 달러로 연평균 18%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D램 시장은 2022년 1044억 달러로 역대 최대 규모로 성장한 이후 다소 조정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미혜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내년 출시되는 인텔의 서버용 중앙처리장치(CPU)는 서버 최초로 DDR5 D램을 지원해 서버 수요를 촉진시켜 2022년 D램 시장 규모는 역대 최대인 2018년 시장 규모를 능가할 가능성이 있다”며 “서버 탑재량이 증가하고 있고 수요처가 다변화되면서 시장 규모는 계속 커지고 이에 비해 가격은 2017~2018년 규모를 넘지 않는 선에서 빅사이클을 형성할 것으로 전망된다”고 말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2월 24일 백악관에서 반도체 등 4개 품목의 공급망에 대한 검토를 지시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 연합뉴스

이번 슈퍼사이클이 기존과 다른 지점은 뭘까. 박재근 한양대 교수는 4차 산업혁명이 촉발되면서 5세대 이동통신(5G)을 기반으로 인공지능(AI)·사물인터넷(IoT)·증강현실(AR)·가상현실(VR)·드론 등의 새로운 산업을 열고 있는 점을 특징으로 꼽았다. 박 교수는 “2020년 20개국이 5G를 본격적으로 운영하기 시작했다”며 “5G를 시작으로 AI·IoT·AR·VR 등이 시장을 드라이브하면서 메모리 반도체 수요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2030년, 전기차로 슈퍼사이클 정점 온다”

2016년 알파고가 AI 시대를 열었다면 알파고를 위한 인터넷데이터센터(ICD)에는 1202개의 CPU, 176개의 그래픽처리장치(GPU), 1만4400개의 메모리 반도체 등이 쓰였다. 박 교수는 “패턴 학습을 하기 위해서는 CPU·GPU·D램·솔리스스테이트드라이브(SSD) 등이 많이 필요하다”며 “AI가 일상 속으로 파고들고 IoT가 연결되면서 데이터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고 그 수혜는 반도체 업체가 누릴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전기차와 자율주행차가 정점을 찍을 것으로 전망된다. 박 교수는 “2030년 각국의 탄소 중립 정책에 따라 유럽에서는 순수 전기차가 3000만 대 보급되는 등 신규 자동차의 30% 이상이 전기차와 자율주행차가 될 것”이라며 “전기차는 자율주행 3단계를 장착하면서 적어도 2030년까지 꾸준히 우상향하는 슈퍼사이클이 지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미혜 연구원은 “메모리 반도체는 투자에 따라 계단식으로 증가하기 때문에 주기적인 공급 과잉을 피할 수 없어 2023~2024년 단기 조정을 받을 수는 있지만 2030년까지는 전기차와 자율주행이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되면서 장기 우상향 사이클을 나타낼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자율주행차에는 최소 3개의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가 쓰인다. 인포테인먼트는 운전자에게 내비게이션 등 정보·영상·게임과 같은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하며 운전자 보조 시스템은 운전자를 보조하며 차량의 제어를 담당한다. 또 텔레메트릭스는 차량 간 통신을 이용해 자율주행을 위한 정보를 수집한다. 이와 함께 13개 이상의 시모스(CMOS) 이미지 센서, 전력 계통에서 20~30개의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용 전력 관리(PMIC), 4~5개의 디스플레이 구동칩(DDIC) 등 반도체를 필요로 한다. 박 교수는 “5G가 먼저 끌고 인터넷 데이터센터와 AI에 이어 자율주행차까지 수요가 증가하며 4차 산업혁명 분야에서 각국이 시장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한 ‘제3의 반도체 전쟁’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슈퍼사이클(업사이클·빅사이클)이 종료되는 시점은 2018년 무렵과 같이 공급 과잉에 따른 가격 폭락일 것이다. ‘학습 효과’에 따라 제조사가 무리한 출혈 경쟁을 벌이지는 않을 것이라는 의견에 힘이 실리는 가운데 적어도 올해는 각 제조사들의 이익 확장에 무게가 쏠린다.

SK하이닉스는 올해 말 인텔의 낸드 사업 부문 1차 인수를 마무리해야 한다. SK하이닉스의 순부채는 약 7조원인데 비해 인수 금액은 약 8조원으로 캐시카우인 D램은 수익 위주 경영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삼성전자는 상속 이벤트가 변수로 남아 있다. 순현금이 거의 바닥난 것으로 알려진 마이크론 또한 보수적 투자가 예상되는 상황이다.

삼성전자 평택 2라인 전경

삼성전자가 만든 메모리 칩들. / 연합뉴스

다시 찾아온 반도체 호황, 기업 전략 및 과제는

반도체 슈퍼사이클 국면에 대응하는 각 사 또한 전략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우선 D램 시장에서는 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이 5 대 3 대 2의 구도로 시장을 안정적으로 점유하고 있다. D램 시장에서의 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 모두 수혜를 볼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각 사의 전략은 극자외선(EUV) 적용을 통한 공정 미세화로 모아지고 있다. 지난해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가 업계 최초로 D램 양산에 EUV 장비를 사용한 바 있다. SK하이닉스도 EUV 스캐너 장비에 향후 5년간 4조7500억원을 투자하겠다고 2월 25일 밝혔다. 올해 하반기부터 EUV를 활용한 4세대 10나노급 D램 제품을 생산할 예정이다.

낸드플래시 시장은 5~6개 업체가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SK하이닉스가 인텔의 낸드사업부를 인수하면서 2위 수준으로 몸집을 키우고 있다. 만약 업계 1위인 삼성전자가 올해 치킨 게임을 시도한다면 다운 사이클에 들어서면서 또 한 번 격변의 소용돌이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

다시 찾아온 슈퍼사이클을 오래 지속하기 위한 과제는 무엇일까. 김선우 애널리스트는 “가수요가 더해지는 것을 보면서 과욕을 부르는 참사만 막는다면 이번 사이클도 오래 누릴 수 있을 것”이라며 “공급 증가를 굳이 서두르지 않아도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승우 센터장은 “무엇보다 파운드리 비즈니스에서 새로운 기회가 모색된다”며 “아마존·구글·페이스북 등 빅테크 기업이 직접 설계하면 어떤 파운드리에서 제조할 것인지 주목된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차세대 반도체로 꼽히는 AI 반도체가 새로운 경쟁 포인트로 부상하는 만큼 역량 확보에 힘써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이현주 기자 chari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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