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출 ‘뚝’·기업들 ‘휘청’…살얼음판

국내 실물경기 파장 어디까지

“(글로벌 경제 위기가) 금융 쪽은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고 실물 쪽은 이제 막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이성태 한국은행 총재의 말이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의 현안보고를 하는 자리에서였다.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대출) 부실 사태에서 촉발된 금융 위기가 전 세계 실물경제에도 타격을 입히기 시작했다는 중앙은행 총재의 견해는 당연히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다. 2년 가까이 끌고 있는 금융 위기 시나리오 중 최악의 상황이 현실화되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지난 9월 14일 미국의 투자은행인 리먼브러더스가 파산 신청을 하자 전 세계 금융시장은 곧바로 패닉 상태에 빠졌다. 국내에서도 이 사건이 어떤 파장을 몰고 올지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금융 당국은 긴급회의를 열고 리먼브러더스의 파산으로 인한 국내 금융업의 손실은 제한적이라고 발표하며 시장을 안심시키는 데 주력했다.금융감독원에 따르면 국내 금융 회사가 리먼브러더스에 투자한 금액은 약 7억2000만 달러 정도다. 하지만 실제 손실액은 최대 4000억 원가량에 머무를 것으로 예상된다. 물론 적지 않은 돈이지만 우려할 정도는 아니었다. 파산이 우려됐던 AIG도 미국 정부가 구제금융을 실시해 국내 시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도 없어졌다.비록 주식시장의 위축이 불가피한 상황이지만 이 정도면 안도의 한숨을 내쉴 만하다. 하지만 정말 심각한 것은 실물경제가 금융 위기의 영향권 안에 들어서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특히 중소기업, 그중에서도 수출 비중이 높은 중소기업은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 상태다.먼저 올 초부터 문제가 되고 있는 환율 관련 손실이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다. 영업으로는 흑자를 내고도 환율 상승 때문에 손실을 보고 있는 중소기업이 갈수록 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최근의 금융 불안은 환율 불안을 가중시키고 있다. 자금난을 해소하기 위해 외국계 투자사들이 국내의 투자금을 회수하면서 달러가 말라가는 통에 환율의 고공행진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약달러 추세임에도 불구하고 유독 원·달러 환율만은 상승세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게다가 하루에도 4~5%씩 오르내리는 등 변동성이 커져 외환시장의 불안감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전문가들은 높은 수준에서 불안정하게 움직이는 현재의 움직임이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분석한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금융시장의 불안이 최소한 내년 상반기까지 계속될 것이란 점이 첫째 이유다. 환율은 장기적으로 경상수지에 의해 결정되지만 단기적으로는 주식이나 채권 등 투자 행위를 통해서 좌우된다. 금융시장의 위기가 지속된다면 단기적인 자금 회수가 이어지고 이에 따라 환율 하락은 기대하기 어렵게 된다.변동성이 높아진 원·달러 환율 시장에 투기 세력의 영향력이 커질 것으로 보이는 것도 문제다. 국내 외환시장은 경제 규모에 비해 작아서 투기 세력들이 활개를 치는 데 유리하다.문제는 환율의 고공행진이 기업들, 특히 중소기업들에 치명상을 입히고 있다는 점이다. 많은 수출 중소기업들이 환 리스크 관리를 위해 통화 옵션 상품인 키코(KIKO)에 가입했다가 환율이 예상과 달리 치솟으면서 엄청난 손실을 입고 있다. 키코는 환율이 미리 약정한 수치 밑으로 떨어지면 이익이 되지만 그 이상으로 오르면 오른 금액의 2배를 은행에 줘야 하는 구조다. 이 상품에 가입한 기업들의 약정 환율은 대개 950원 내외였다. 하지만 환율이 예상과 달리 1100원대로 치솟으면서 막대한 손실을 떠안게 됐다.금융감독원에 따르면 6월 말 약 520여 개 기업에 1조5000억 원가량이던 손실이 9월 17일 현재 2조 3000억 원으로 불어났다. 환율이 더 오르면 키코 관련 손실은 더욱 불어날 것이 틀림없다. 이렇게 되면 최악의 경우 무더기 파산 사태도 벌어질 수 있다. 실제로 지난 9월 17일 견실한 중견 기업인 태산엘시디가 회생 절차 신청을 해 우려가 현실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 회사는 매출액이 6000억 원대에 이르고 올 상반기 114억 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한 우량 기업이지만 올 상반기에만 키코로 인해 806억 원의 손실을 봤다.자금난도 심각하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8월 중소기업 대출은 전달에 비해 1조8000억 원 증가했다. 이는 7월 증가분인 5조5000억 원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은행들이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 중소기업 대출을 꺼리고 있어 중소기업의 자금난은 갈수록 도를 더할 것으로 우려된다.더군다나 은행들이 대출 금리를 너도 나도 올리고 있어 중소기업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에 조사에 따르면 금융 회사로부터 최근 금리 인상 요구를 받은 기업이 전체의 43.4%에 이른다. 자금 사정이 지난해에 비해 나빠졌다는 기업도 43%에 달했다.수출 감소도 배제하기 어렵게 됐다. 금융 위기가 미국 경제의 위축으로 이어질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미국은 금융 등 서비스 산업의 비중이 크기 때문에 금융 위기는 곧바로 경제에 타격을 줄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미국 수출 비중이 큰 한국 경제에 미칠 파장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투자증권의 박선욱 애널리스트는 “계속되는 신용 경색은 미국의 가계 수지 개선을 지연, 소비 위축을 심화시키고 있다”며 “미국의 내수 부진 심화는 대미 수출 증가세 둔화로 나타나고 있다”고 우려했다.자동차 전기 전자 등이 대표적이다. LIG투자증권의 안수웅 리서치센터장은 “미국 금융 위기가 단기적으로 자동차 판매의 침체로 전염될 수 있다”며 “하지만 미국에서 자동차는 필수 소비재적 성격이 강해 판매 침체가 장기화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조심스럽게 내다봤다.업종별로 따지면 건설업의 위기감이 가장 크다. 미분양이 속출하는 등 가뜩이나 부동산 시장이 얼어붙어 곤란을 겪고 있는데 금융 위기로 어려움이 가중될 가능성이 높다. 은행들이 리스크 관리를 위해 부동산 관련 대출을 줄일 경우 주택 수요가 감소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주택 공급도 줄 수밖에 없다. 특히 프로젝트 파이낸스를 통한 건설사들의 자금줄도 마를 것으로 예상된다. 미분양으로 신음하고 있는 지방의 중소 건설사들의 경우 도미노 파산마저 우려되고 있다.그동안 상대적으로 호황을 누려왔던 오피스 시장도 타격이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 오피스에 상당한 투자를 해 왔던 해외의 투자은행들이 자금을 회수하기 위해 대량의 매물을 쏟아낼 경우 가격 하락을 피할 수 없다. 오피스 가격이 이미 상당히 올랐기 때문에 차익 실현 욕구도 강한 상황이다.가계 부실도 걱정거리다. 금융권이 너도 나도 금리를 올리기 시작해 가계 부실이 가속화될 것이란 우려도 높아지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7월 말 가계 대출 잔액은 사상 최대인 500조 원에 이른다. 물론 경제 규모가 커질수록 가계 부채액도 불어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부채 상환 능력이 떨어진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최근 들어 금융권이 대출 금리를 올리고 있어 이에 따른 연체율 상승과 금융권의 부실을 염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변형주 기자 hjb@kbizwee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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