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만의 신용공황…‘성역이 없다’

위기의 미국 금융시장 ‘다음’은 어디

전 세계 금융시장이 사상 유례없는 신용 공황 상태에 빠져들고 있다. 앨런 그린스펀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은 최근 한 방송사와 가진 인터뷰에서 “지금의 금융 위기는 100년 만에 한 번 올 수 있는 것”이라며 “위기가 해결되기 전까지 더 많은 대형 은행들이 문을 닫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런 경고는 실제 상황으로 이어지고 있다. 투자은행인 리먼브러더스가 법원에 파산 신청을 하고 메릴린치는 뱅크오브아메리카(BoA)에 피합병됐다. 여기에 세계 최대 보험사인 AIG가 파산 직전에 정부의 구제금융을 받기에 이르렀다. 월가에는 이런 상황에서 누구도 안전할 수 없다는 인식이 급속히 확산됐다.금융 시스템을 유지하는데 가장 근간이 되는 신용이 붕괴되면 중앙은행들이 시중에 유동성을 아무리 쏟아 부어도 돈이 돌지 않는다. 당연히 자금을 빌리는 데 따른 이자 부담이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기업들의 자금 조달 부담은 1987년 이후 최고 수준으로 커졌다. 미국 정부가 AIG에 대출 한도를 지원하기로 결정한 9월 16일 하루짜리 달러 리보 금리(런던 은행 간 거래)가 6.4375%로 치솟았다. 전날만 해도 이 금리는 3.10765%였다. 하루 사이 금리가 두 배 이상 급등한 것이다.신용 공황이 이어지면 금융사들은 기업어음(CP)을 발행해 자금을 조달하기도 어려워지게 된다. 금리를 높게 쳐줘도 어음을 매입해 줄 곳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금융 위기가 빚어지면서 전 세계 투자자들은 대표적인 안전 자산으로 꼽히는 미국 재무부 발행 채권에만 투자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그렇게 되면 기업들이 금융사에서 돈을 빌릴 때 부담하는 비용도 치솟을 수밖에 없다. 이런 현상이 장기화되면 전체 경제가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된다. 1997년 우리나라의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사태와 1998년 러시아 금융 위기도 결국 자금 흐름이 끊긴 데서 비롯된 만큼 미국발(發) 금융 위기가 어떻게 전개될 지 전 세계 투자자들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올 들어 유동성 위기를 겪었던 금융사들의 공통점은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대출) 관련 증권에 적극 투자했다는 데 있다. 모기지 증권은 일종의 파생상품이다. 부실 모기지의 위험을 적당히 포장한 것이지만 주택 가격이 하락하면 증권 자체의 가치가 뚝뚝 떨어질 수밖에 없는 특성이 있다. 베어스턴스 리먼브러더스 메릴린치 등은 자기자본 대비 모기지 관련 자산을 많이 보유한 투자은행들이었다.보험사인 AIG는 금융 서비스 부문에서 모기지 관련 증권에 신용디폴트스와프(CDS)라는 보증을 팔면서 손실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모기지 증권이 부도나면 이를 물어주기로 하고 보증 수수료를 챙긴 셈이다. AIG가 유럽 등 전 세계 금융사에 부도 위험을 보증한 증권 규모는 총 4410억 달러에 달한다. 미국 주택 가격이 폭락하고 이에 따른 모기지 증권이 부실화되면서 AIG는 부도난 모기지 증권을 대신 물어줘야 했다. 최근 3분기 동안 185억 달러의 손실을 기록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그런데 AIG가 파산하면 보험(CDS)은 쓸모가 없어지게 된다. AIG와 거래한 금융사들은 자산을 재평가해야 한다. 당연히 대규모 상각이 뒤따른다. 문제는 이런 계약이 대부분 사적 계약 형태로 이뤄져 금융 감독 기관조차 규모가 정확히 얼마인지 누가 최종적으로 손실을 감당해야 할지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비안코리서치사의 하워드 사이몬스 채권 전략가는 “CDS와 관련해 구체적인 내용을 아무도 알 수 없다”고 말했다.전 세계 CDS 시장 규모는 62조 달러 정도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큰 시장의 주역이 쓰러진다면 세계 금융 시스템이 유지될 수 없다. RBC 캐피털마켓은 “1조1000억 달러의 자산과 전 세계 130개국에 7400만 명의 고객을 갖고 있는 AIG가 몰락하면 금융 산업의 손실 규모가 총 1800억 달러에 달할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리먼에 대한 지원을 끝까지 거부한 미국 정부가 며칠 새 AIG를 지원하게 된 것은 이런 위험을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해서다.우웨 레인하트 프린스턴대 경제학 교수는 “파생상품 시장의 붕괴로 어떤 연쇄 반응이 일어날지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라고 말했다. 그런데 스와프 등 파생상품은 증권이 아니기 때문에 증권거래위원회(SEC)의 감독을 받지 않았다. 그렇다고 전통 보험으로 분류되지 않아 보험감독청의 감독도 없었다. 바니 프랭크 하원 금융위원장은 “금융 감독이 부진한 게 다시 한 번 확인됐다”며 “민간 금융사들이 시장을 망쳐 놓고 정부가 이를 정리하는 과정을 반복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신용 공황이 단시일 내 가라앉긴 어렵다. 이 때문에 세계 금융사들은 사상 유례없는 혹한기를 맞이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수익성이 떨어질 게 뻔하고 자본 조달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모기지 증권 투자를 한 미국 금융사들은 추가로 자본을 확충해야 생존할 수 있다. 현재 월가에는 유동성 압박을 받은 대형 금융사들이 아직도 적지 않다.월가에선 AIG에 이어 저축·대부(S&L) 업체인 워싱턴뮤추얼과 와코비아은행이 도마 위에 오를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 회사 주가는 불확실성이 증폭되면서 최근 급락했다. 추가적인 자본을 확충해야 하지만 투자자들 찾지 못해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전 세계 투자가들 누구도 금융사의 증자에 참여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리먼과 패니메이 프레디맥 등 양대 국책 모기지 회사의 사례에서 확인됐듯 금융사가 도산 위험에 처하면 주식이 휴지가 되기 때문이다.자본 확충을 위한 생존 사투를 벌이는 금융사 입장에서 유일한 도피구는 새 주인을 찾는 길밖에 없다. 사업 구조를 보완할 수 있는 우량 기업과 합병하면 재무적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워싱턴뮤추얼은 JP모건체이스 등과 경영권을 넘기기 위한 협상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미국 금융 위기가 빚어진 것은 2007년 중반부터 주택 가격이 하락한 데 따른 것이다. 주택과 관련된 파생상품 시장이 커진 탓에 주택 시장 침체가 이어지면서 충격이 계속되고 있는 양상이다. 문제는 아직 주택 시장 전망이 어둡다는데 있다. 일부 지역에서 주택 가격이 안정을 보이고 있고 양대 모기지 회사의 국유화로 모기지 금리가 떨어지고 있지만 모기지 시장 자체가 활성화되기에는 역부족이다. 대부분의 금융사들이 모기지 사업 자체를 꺼리면서 신용이 아주 높은 사람에게만 제한적으로 모기지를 제공하고 있다. 모기지 시장이 활성화되지 않고 주택 시장이 살아날 수 없다. 또 주택 시장이 살아나지 않으면 미국 경제는 물론 금융 위기도 진정될 수 없다. 도널드 콘 FRB 부의장은 “주택 가격이 바닥을 확인했다고 말하긴 어렵다”고 강조했다.미국 부동산 전문 연구소인 리얼티트랙에 따르면 지난 8월 주택 차압 건수는 전년 동월 대비 27% 급증했다. 50%를 넘어섰던 지난 6월과 7월에 비해서는 증가세가 둔화된 것이지만 갚아야 할 모기지가 주택 가격을 웃도는 가정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 416가구당 1가구꼴로 주택 차압 통지를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8월 신규 주택 착공 건수도 17년 만에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주택 가격이 하락하면 금융사의 자산 상각은 계속돼야 한다. 이에 따른 자본 확충 방안이 나오지 않으면 어떤 금융사라도 위험에 처할 수 있다. 상대적으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잘 피했다는 평가를 받아 온 골드만삭스조차 안전지대에 있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전 세계 금융시장의 분위기는 흉흉하다.일각에서는 모기지 증권청산소를 만들자는 얘기도 나온다. 금융사들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담보를 쌓도록 하고 보유 모기지 규모를 줄여주자는 방안이다. 현재는 모기지 증권시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가치 평가조차 하기 어려운 만큼 보조 시장을 개설하면 숨통을 틔워 줄 수 있을 것이란 얘기다.이익원·한국경제 뉴욕 특파원 ik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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