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생길’ 옛말…투자·기술 이민 ‘각광’

국가·방식 다양해졌다

해외 이민의 최근 트렌드는 ‘다양화’로 요약된다. 이민을 가는 나라와 이민의 형태가 무척 다양해졌다. 비단 생계 목적뿐만 아니라 교육, 취업, 은퇴 후 삶 등 갖가지 목적을 가진 이민 수요가 늘어나고 20대부터 60대까지 연령층이 넓어지면서 일어나는 현상이다.우선 이민 대상 국가의 변화부터 살펴보자. 외교통상부의 재외동포현황 자료에 따르면 시민권과 영주권을 가진 한국인 이민자가 1000명이 넘게 사는 나라는 23개국에 달한다. 눈에 띄는 것은 전통적인 이민 선호국가인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선진국 외에 동남아 중동 아프리카 등 ‘기타 국가’의 비중이 크게 늘고 있다는 점이다. 외교통상부의 해외 이주 신고 자료에 따르면 2007년 신고자 2만3008명 가운데 ‘기타 국가’ 이주자는 3421명으로 14%를 차지한다. 5년 전인 2002년의 2238명에 비해 52%나 늘어난 수치다.특히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 국가들과 멕시코 과테말라 등 남미,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아프리카 국가들에 최근 10년 사이 이민자가 급증했다. 과테말라의 경우 10년 전 116명에 불과했던 이민자 수가 2007년엔 2788명으로 늘었다. 무려 2303%의 증가율이다. 또 남아프리카공화국은 331명에서 1131명으로 241% 증가했고 싱가포르도 238명에서 1358명으로 470%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반면 미국은 10년 전 184만 명이 넘었던 이민자 수가 2007년 155만 명 수준으로 15.8% 줄어든 상태다. 이민 허가가 적체 상태인 데다 이민 쿼터제 시행 등으로 사실상 문호가 닫힌 것이 중요한 이유로 꼽힌다.하지만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는 이민자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미국 대체 국가로 인기가 높은 캐나다는 10년 전 9만4437명에서 2007년 17만3559명으로 83.8%나 늘어났다. 호주 역시 3만3371명에서 5만4632명으로 63.7%가 늘어난 상태다.이민의 형태도 많이 달라지고 있다. 과거의 이민은 별다른 전문 기술 없이 떠나 현지에서 일거리를 찾는 생계형이 많았다. 하지만 외환 위기 이후 일명 ‘닭공장 이민’이라는 취업 이민이 대종을 이루더니, 최근에는 일정 금액을 현지 부동산이나 사업체에 투자해 영주권을 받는 투자 이민이 각광받고 있다. 또 미용 요리 용접 등 특정 기술을 앞세우는 기술 이민도 늘고 있다. 20~30대 젊은층 중에선 평소 관심 있던 분야의 꿈을 이루는 계기로 이민을 선택하기도 한다.이민이 인생의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하는 ‘고생길’이라는 인식은 이제 사라지고 있다. 교육수준과 생활수준이 높아지면서 선진국에서의 새 출발에 자신감을 갖는 젊은층이 크게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박필서 신세계이주공사 대표는 “얼마간의 자본과 적당한 수준의 기술만 있다면 이민 후 안정된 생활을 누릴 수 있다”면서 “국내에서 꼼꼼하고 착실하게 준비해 떠난다면 현지 적응 기간은 3~6개월 정도면 된다”고 설명했다.캐나다 밴쿠버에서 자동차 튜닝숍을 운영하고 있는 이상훈 씨의 사례는 달라진 이민 풍토를 잘 보여준다. 그는 30대 중반의 나이에 현지인 직원 네 명을 두고 연소득 5만 달러 정도를 올리고 있다.그가 이민을 결정한 시기는 지난 2004년이다. 그의 아버지가 국내의 사업을 정리하고 캐나다로 투자 이민을 떠나기로 했기 때문이다. 때마침 다니고 있던 직장이 적성과 맞지 않고 미래도 불투명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본인도 가족과 함께 떠나기로 결정했다.대신 이 씨는 캐나다의 칼리지에 입학해 새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평소 자동차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본격적으로 관련 기술을 배우려고 한 것이다. 특히 자동차 문화의 선진국인 캐나다에서는 솜씨 좋은 튜닝 전문가가 좋은 대접을 받는다는 정보가 그의 마음을 굳히게 했다.물론 2년간의 교육과정이 그리 쉬운 건 아니었다. 영어도 그리 능숙하다고 할 수 없었고 기술의 ‘기’자도 모르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인 특유의 뛰어난 손재주와 성실성으로 학교 내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성적이 좋아지자 교수들이 직접 나서 여기저기 실무 경험을 쌓을 수 있는 인턴십 자리를 알아봐 줬다.졸업 후 아버지의 도움과 직장 생활을 하며 모은 돈을 합쳐 밴쿠버 변두리에 자동차 튜닝숍을 차렸다. 처음엔 현지 유학생들의 차를 손봐 주는 정도였다. 하지만 그가 튜닝한 차가 지역대회에서 입상하는 등 업계에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하자 현재는 현지인들도 몰려드는 인기 튜닝숍이 됐다. 이 씨는 “한국은 아마도 세계에서 경쟁이 가장 치열한 곳 일 것”이라며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생활의 여유도 즐길 수 있는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고 말했다.이민 희망자들이 선호하는 나라들은 각기 다른 이민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미국은 크게 EB-1에서 EB-5까지 5가지 형태의 이민을 받아들이고 있다. EB-1은 과학 교육 예술 등 각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였거나 다국적 기업의 간부를 대상으로, EB-2는 석사 이상의 전문직 종사자로 과학 예술 사업 등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인 사람들만 신청이 가능하다. EB-3는 학사학위의 전문직, 2년 이상의 경력을 필요로 하는 숙련공, 미국 내에서 인력난을 겪고 있는 분야의 비숙련공 등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EB-4는 종교인, 국제기구 직원 등을 대상으로 한다.이 때문에 특별한 이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민자라면 EB-3을 신청해야 하지만 현재 미국에서 EB-3의 대상자는 1만 명으로 제한한 상태다. 워낙 신청자도 많고 수속 기간이 오래 걸려 일부에선 선착순도 아닌 ‘뽑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루머가 돌 정도다.투자 이민의 개념인 EB-5에 주목하는 이가 늘어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EB-5란 외국인이 미국 내에 설립된 회사에 자신의 자본금을 투자해 10명 이상의 신규 고용을 창출할 경우 2년 유효 조건부 영주권을 주고 2년 후 고용 여부를 확인해 조건을 해지해 주는 이민 제도다. 일반 지역의 경우에는 100만 달러의 투자금이 있어야 하지만 농촌지역 혹은 고실업률 지역에는 50만 달러만 투자해도 EB-5를 발급받을 수 있다.E-2(소액투자이민비자)와 달리 자신이 직접 사업체를 운영하지 않아도 돼 적당한 투자처만 찾는다면 부담이 덜한 편이다. 특히 2년간의 조건부지만 영주권자로 인정되기 때문에 미국 내 어디서든 학업이나 거주가 가능하다. 유학생의 경우엔 정부 차원에서 학비와 의료비도 지원된다.업계 한 관계자는 “EB-5 투자 이민은 투자처가 영주권의 조건부 꼬리표를 좌지우지하는 요소인 고용 창출이 확실한 곳인지 고려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면서 “투자금 회수를 위해서 투자금의 실제 사용처가 어떤 곳이고 객관적으로 안전한 곳인지 아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이주 업체 중에서는 직접 믿을 만한 투자처를 알선하거나, 아예 프로젝트파이낸싱 형태로 투자처를 개발하는 곳도 생겨나고 있다. 일례로 신세계이주공사는 미국 앨라배마 시내 대형 종합병원 개발 프로젝트를 직접 맡아 시행할 예정이며, 이에 대한 투자자들을 모으고 있는 중이다. 또 MCC는 캘리포니아 주의 여러 군기지 개발 프로젝트, 밀워키 상공회의소 개발 프로젝트 등을 소개하고 있는 중이다.EB-5가 무리라면 많은 이들이 신청하고 있는 E-2 비자도 대안이 될 수 있다. 한국에 자산이 반드시 남아 있어야 하며 영주권과도 관계가 없지만 20만 달러 정도를 투자한 작은 점포 등을 마련해 1명 이상의 현지인만 고용하면 비자가 발급된다. 사업체를 유지하는 기간 동안 무기한으로 체류 가능한 게 가장 큰 장점. 특히 배우자가 취업이 가능하며 자녀는 무료 공립학교 교육을 받을 수 있다. 교육 목적의 이민이라면 고려해볼 만하다.캐나다의 투자 이민은 연방기업이민제도, 연방순수투자이민 등이 있다. 연방기업이민은 미국의 EB-5처럼 고용 창출 목적이 최우선이다. 이 때문에 이민자의 경력에 대한 요건도 꽤 까다로운 편이다. 먼저 자국 내에서 최소 10%의 기업 지분을 소유하고 있으며 기업을 직접 운영해 본 경험자만이 신청할 수 있다. 또 30만 캐나다 달러 규모의 개인 자산을 서류로 증빙할 수 있어야 한다.또 본인이 100% 지분을 소유하고 있을 경우 매출액 50만 캐나다 달러 이상과 직원 2명 이상의 기업체, 50% 지분의 경우 매출액 100만 캐나다 달러 이상과 직원 4명 이상의 기업체여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연방순수투자이민은 연방정부에 40만 캐나다 달러를 5년간 무이자로 예치해야 하는 이민이다. 기업 이민에 비해 돈이 오랜 기간 묶여야 하는 단점은 있지만, 캐나다 정부가 예치금을 보증하므로 손실에 대한 책임이 없다. 또 기업을 직접 운영해야 한다는 조항이 없어 일반 직장인도 신청할 수 있다. 다만 과거 5년 중 2년간 5인 이상의 직원을 직접 관리한 경력이 있어야 한다.투자 이민이 부담스럽다면 연방전문인력이민, 이른바 ‘기술 이민’도 고려해 볼만하다. 미국과는 달리 인구가 3000만 명 내외에 불과한 캐나다는 부족한 ‘노동력’에 대한 문호도 열려 있기 때문이다. 현재 연방전문인력이민은 가장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는 이민 종류로 경력 학력 나이 언어 등을 점수제로 심사해 67점 이상만 되면 가능하다. 특히 캐나다에서 노동 허가를 받고 일하는 경우, 캐나다 내 회사에서 정직원으로 고용될 경우에는 1년 이내에 영주권을 발급받을 수 있다.재미있는 건 캐나다는 미국과는 달리 주 정부 차원의 이민도 가능하다는 점이다. 이민 신청 요건이 연방정부에 비해 덜 까다로운 편이지만 거주지에 대한 제약이 있다. 이 역시도 기업 이민과 순수 투자 이민, 기술 이민 등으로 나뉜다.일례로 뉴브런즈윅 주 기업 이민은 30만 캐나다 달러의 자산을 서류상으로 증명해야하며 10만 캐나다 달러의 투자가 이뤄져야 한다. 퀘벡 주 순수 투자 이민은 캐나다 40만 달러의 투자금을 주정부에 예치하면 사업에 대한 조건이 전혀 없다. 알버타 주 기술 이민은 현지 기업에 정식 고용된 이민자들에게 자격이 주어진다.호주는 캐나다와 같은 영연방 문화를 공유하는 나라여서 사회 문화 법규 등이 매우 비슷하다. 두 나라의 시골을 놓고 보면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흡사하다. 하지만 특징을 따져 보면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 캐나다가 미국 진출을 위한 교두보로 큰 매력을 갖고 있다면, 호주는 세계 최고 수준의 복지제도를 바탕으로 안락한 생활이 가능하다는 게 장점이다.호주는 영주권자에게 커다란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우선 만 18세 미만 자녀의 국공립 학교 학비, 공립병원 치료비가 무료다. 영주권 발급 후 2년이 지나면 파트너 보조금, 병가 보조금, 청소년 보조금, 양육 지급금, 구직 지급금, 장년 보조금, 이주 보조금 등의 혜택이 주어진다. 또 첫 2년 동안 구직 네트워크를 지원하고 10년 후부터는 장애인 지원 연금과 경로연금의 혜택도 볼 수 있다.호주의 이민 심사는 이민 희망자의 기술 수준과 경험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신청자가 가진 기술을 어떻게 배웠는가, 기술을 어떻게 발전시켜 왔는가, 살면서 어떤 에피소드를 겪었는가, 비슷한 분야의 호주 전문가들과 습득 내용이 비슷한가 등을 심사한다. 사연과 에피소드의 나열을 중시하는 게 한국 문화와는 큰 차이를 보인다.또 비영어권 국가 이민 신청자들은 IELTS라는 영어 능력 측정 시험을 치러야 한다. 영주권 발급을 위해선 밴드(Band) 5.0~6.0을 따야 하는데, 읽기 쓰기 말하기 등 4개 섹션으로 시험이 진행된다. 밴드 5.0을 목표로 할 경우 통상 3~5개월 정도의 공부 기간이 필요하다.호주는 영주권 발급에 소요되는 기간이 비교적 짧다는 것도 특징이다. 기술 이민의 경우 심사에 10일~4개월, 영주권 발급은 8개월~1년 정도가 소요된다. 특히 호주에서 인력이 부족한 직업을 가지고 있다면 더 유리하다.호주는 1년에 두 차례에 걸쳐 부족한 직업군을 가려내 발표한다. 2007년 7월 발표된 부족 직업군 리스트에 따르면 전문직 중에서는 회계사, 마취과 의사, 간호사, 건축가, 화학제품 엔지니어, 토목기사, 컴퓨터 전문가 등이 꼽혔다. 또 요리사, 제빵 기술자, 목수, 전기배선 기술자 등도 리스트에 올랐다.한편 한국인 이민자들은 시드니와 멜버른에 가장 많이 자리를 잡고 있다. 지난해 영주권을 발급받은 한국인 가운데 54.6%가 시드니권에, 20.5%는 멜버른권에 터전을 마련한 것으로 나타났다.이홍표·박수진 기자 hawlling@kbizwee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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