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필요한 능력은 스태프와의 소통 기술’

콘티 작가 강숙

온갖 자료집과 영화 관련 메모들, 사진들, 시나리오와 스토리보드 북으로 가득 채워진 강숙 작가의 평창동 작업실은 영화 마니아들이 보면 그야말로 ‘훔쳐가고 싶은’ 보물들로 가득 찬 보물의 방과 같다.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이 작업실은 강 작가의 지난 10년을 말해 주는 곳이기도 하다.“좀 어지럽죠? 하하. 친구들은 이사 갈 때 어떡하느냐고 걱정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바로 지금의 저를 말해 주는 자료들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전시회가 막 끝난 뒤라 더 어지럽긴 하지만 평소에도 별반 다르지 않아요.(웃음)”콘티(콘티뉴이티·Continuity: 촬영 대본) 작가의 길로 들어선 지 어언 10년. 그 10년을 집대성한 것이 바로 지난 8월 2일부터 22일까지 펼쳐졌던 ‘명랑콘티작가 강숙의 일만프레임전’이라는 전시회였다.“그전부터 스토리보드들을 모아 전시회를 열자는 제의는 많았는데 올해가 마침 일을 시작한 지 10년이 되는 해여서 지금까지의 제 자신을 정리해 보자는 의미에서라도 해 보는 게 좋겠다 싶어 시도해 보았죠. 스토리보드는 시나리오나 대본에 쓰인 내용이 어떤 장면으로 어떻게 찍힐지를 미리 그림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의 각 장면들이 어떤 구도에서 어떤 분위기로 촬영되는지 알려주기 때문에 많은 이들은 스토리보드를 영화의 설계도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 스토리보드를 그리는 것이 바로 콘티 작가가 하는 일이다.강 작가가 처음 영화와 인연을 맺게 된 건 조명팀 스태프였다. 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했던 그녀의 관심사는 회화 조소 도예 디자인 사진 등 전방위에 걸쳐 있었는데 ‘빛’에 대한 궁금증이 결국 그녀를 영화판으로 이끌었다.“회화나 사진에서 가장 중요한 건 결국 ‘빛’이에요. ‘빛’을 어떻게 조율할 수 있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지죠. 그 빛을 잘 배울 수 있는 곳을 찾다가 영화 조명팀을 알게 됐어요.” ‘빛’을 알고 싶다는 욕심에 무작정 조명 감독을 찾아가 일을 배우게 해 달라고 졸랐다. 그 후 영화 ‘링’ ‘천일동안’ 등에서 조명팀 스태프로 일했다.“영화에는 조명 스크랩이란 것이 있어요. 각 신(scene)별로 조명의 일관성을 맞추기 위해 기록하는 것인데 그 옆에 콘티처럼 그림을 그리는 부분이 있죠. 그 그림을 그리다 보니까 많은 분들이 스토리보드를 그려도 되겠다고 추천해 주시더군요.”그리고 사람들의 소개를 받아 비로소 콘티 작가로서의 일을 시작하게 됐다. 그 후 김지운 감독의 영화 ‘장화, 홍련’ 등을 비롯해 ‘어린 신부’ ‘너는 내 운명’ ‘음란서생’ ‘그놈목소리’ 등의 영화 스토리보드와 ‘아일랜드’ ‘환상의 커플’ ‘내남자의 여자’ ‘이산’ ‘식객’ 등의 드라마 스토리보드를 그렸다.“보통 영화 한 편당 스토리보드 작업하는 데 약 두 달의 시간이 걸려요. 한 달은 프리 프로덕션 기간과도 같은데 시나리오를 분석하고 장소 헌팅도 따라가고 자료도 공유하는 일종의 스토리보드 구상 시간이죠. 감독과 영화 스태프들과의 콘티 회의를 통해 2주 정도는 호텔에 감금된 채(웃음) 일을 하기도 하죠. 실제로 그림을 그리는 기간은 한 달 정도예요.”그래서 콘티 작가에게 가장 필요한 능력은 ‘그림을 잘 그리는 능력’ 이 아니라 ‘얼마나 잘 소통할 수 있고 잘 공유할 수 있느냐’라고 한다.“감독이 어떤 장면을 어떻게 연출하고 싶은지 미리 그림으로 그려서 보여주는 게 바로 콘티 작가의 일이니까요. 그래서 단순히 예쁘게, 잘 그리는 게 아니라 그 장면이 가진 정보를 보여주는 게 더 중요해요.”각 장면의 연출 구상이 감독의 머릿속에 있다면 그 감독의 생각을 그림으로 구체화해 영상화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바로 콘티 작가의 일이란 얘기다.“그래서 콘티 작가가 되려면 인간관계도 좋아야 하고 이야기를 듣는 것도 잘해야 하고 되도록이면 모나지 않은 성격에 (웃음) 관심사도 다양해야 해요. 때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장면, 상상도 못한 장면을 그려야 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녀에게는 콘티 작가로서의 일이 마치 맞춤옷인양 몸에 딱 맞아떨어진다. 프리랜서이다 보니 언제 어느 때 일이 들어올지 몰라 마음껏 자기 시간을 누릴 수도 없고 다 그려 놓고 영화가 엎어질 때면 힘이 빠지기도 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그림을 바탕으로 구체화되는 영상들을 보면서, 또 현장에서 자신의 아이디어가 채택돼 영상으로 표현되는 일들을 보면서 강 작가는 자신의 일에 매번 무한한 매력을 느낀다. 그래서 강 작가는 현재 ‘스토리보드의 모든 것’을 주제로 한 책을 펴낼 준비를 하고 있기도 하다. 그토록 매력적인 작업이건만 아직도 콘티 작가의 일에 대해, 스토리보드 작업에 대해 알려진 것이 너무나 적기 때문이다.“아직 스토리보드 작업에 대해 전문적으로 가르쳐 주는 기관이 거의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 일을 하고 싶어도 어떻게 시작하고 어떤 식으로 일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도 많죠. 그래서 지난 10년간 제 자신이 현장에서 직접 일하면서 체득한 노하우를 공유하면 어떨까 해서 책을 쓰고 있죠.”이렇듯 콘티 작가로서 전시회도 열고 책을 쓰고 있지만 또한 강숙 작가는 동시에 몇 편의 영화에 출연한 배우로서의 이력도 지니고 있어 그야말로 ‘팔방미인’이란 단어가 참 잘 어울린다. 실제로 극단 ‘연단’에서 배우로 활동하기도 했는데 영화 ‘너는 내운명’에서는 ‘포주 강씨’를, ‘어깨너머의 연인’에서는 ‘잡지사 기자’를 연기했다. 인터뷰 며칠 전에도 한창 촬영 중인 강혜정 주연의 영화 ‘우리 집에 왜 왔니’에서도 ‘춘천댁’으로 분해 연기를 펼쳤다.“어렸을 때는 연기자가 되고 싶기도 했죠. 하지만 제 꿈은 이게 다가 아니에요. 문화 평론가, 영화 평론가, 영화감독, 여행 칼럼니스트 등등 아직도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아요. 하고 싶은데, 할 수 있는 데 못하고 지나쳐 버리면 후회만 남지 않겠어요. 그래서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면서 살고 싶어요. 그것도 즐겁고 행복하게.” 그래서 강숙 작가는 오늘도 열심히 그린다. 해피엔딩을 향해, 명랑한 자신의 명랑한 라이프 콘티북을….약력: 1974년생. 계원예고 미술과 졸업, 단국대 예술대 동양화과 졸업. 극단 연단 배우. 기획실 활동. 1998년부터 영화 조명팀과 콘티작가로 활동. 영화 ‘공중곡예사’ ‘바보’ ‘기억상실의 시대’ ‘색즉시공2’ ‘죽어도 해피엔딩’ ‘못말리는 결혼’ ‘이장과 군수’ ‘그놈목소리’ ‘어깨너머의 연인’ ‘해바라기’ ‘맨발의 기봉이’ ‘음란서생’ ‘너는 내 운명’ ‘어린 신부’ ‘여선생 VS 여제자’ ‘장화, 홍련’ ‘욕망’ 등 콘티. 드라마 ‘대한민국변호사’ ‘이산’ ‘메리대구공방전’ ‘내남자의 여자’ ‘히트’ ‘환상의커플’ ‘내인생의 스페셜’ ‘달콤한 스파이’ ‘아일랜드’ 등 콘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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