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연출가 권오일·권은아 부녀
지난 7월 20일 호평 속에 막을 내린 연극 ‘느릅나무 그늘의 욕망’은 권오일 권은아 부녀 연출가에게는 각별한 연극이라고 할 수 있다. ‘협력 연출’이란 타이틀과 함께 부녀가 함께 연출한 첫 작품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도와 연출한 작품은 이번 작품까지 약 6편 정도지만 그동안은 그야말로 조연출에 가까웠거든요. 이제야 비로소 조연출에서 협력 연출로 승진한 셈이죠.(웃음)”(권은아) “협력 연출이긴 하지만 연출하면서 트러블은 없었어요. 트러블이 있을 리가 있나. 내가 왕초인데.(웃음)”그러면서도 “배우들은 나보다 은아와 더 잘 통하는 것 같더라”며 넌지시 자랑하는 권오일 연출가의 모습은 연극계의 거목이라기보다는 딸을 자랑스러워하는 아버지, 그 자체다.“아니에요. 아무래도 아버지가 워낙 대선배다 보니까 제가 더 만만해서들 그랬을 거예요”라며 손사래를 치는 은아 씨 역시 촉망받는 연출가라기보다 아버지에 대한 존경으로 가득 찬 딸, 그 자체이긴 마찬가지다.그녀의 말대로 사실 ‘권오일’이라는 이름은 대한민국 연극계에서 만만치 않은 존재감을 과시한다. 극단 성좌를 창단하고 39년 동안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꾸준히 리얼리즘 연극을 추구해 온 그는 가장 많은 연극인들이 존경하는 연극인 중 한 명이기 때문이다.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딸 은아 씨는 연극과 아버지를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항상 연극만 생각하고 연극에 목숨을 건 천생 연극인이셨어요. 그래서 사실 어머니에게 있어서는 별로 좋은 남편은 아니셨지요. 그래서 아버지를 존경하는 만큼 아버지를 연극에 몰두하실 수 있게 뒷바라지해 온 어머니를 존경하는 마음도 커요.”(권은아)어머니를 힘들게 한 아버지에게 반발할 수도 있었으련만 은아 씨는 단 한 번도 아버지를 원망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아니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그녀 자신이 아버지의 그 연극에 대한 열정을 그대로 닮아버렸다.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연극에 빠지게 된 것이 언제부터였는지도 모른다. “연극에 매력을 가지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게 아니라 그저 자연스럽게 지금의 길을 걷게 된 것 같아요. 제 몸 속에 흐르는 아버지의 피가 저를 이 길로 이끈 것 같다니까요?”착하지만 성실하고 또한 자신의 선택에 책임질 줄 아는 그녀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1남 2녀 중 막내딸인 그녀가 연극을 하고 싶다고 했을 때 권오일 연출가는 특별히 반대하지 않았다고 한다.“물론 힘들고 어려운 길이죠. 하지만 자식이 셋이다 보니 그중 하나는 대를 잇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했어요. 게다가 본인이 좋다는 데야 뭐 굳이 말릴 필요 있나?(웃음)”(권오일)하지만 처음부터 은아 씨가 연출을 희망한 건 아니었다. 처음 그녀가 되려고 했던 것은 바로 배우, 대학에서 전공한 것도 연기였다. 1986년 서울예대 연극과를 졸업한 뒤 연극배우로 활동하기도 했다. 꽤 호평 받을 정도로 연기에 소질을 보였지만 그녀는 이내 배우보다 연출가로서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아무래도 연기보다는 연출이 작품의 전체를 보는 재미가 있더라고요. 게다가 원래 남의 지시를 받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요. 연출은 지시를 받기보다 지시하는 편이라서 적성에 더 맞는 것 같아요.(웃음)”(권은아)그래서 1995년부터는 연출가 이윤택과 황인뢰 밑에서 조연출로 활동했다. 이윤택 연출가의 조연출로 ‘문제적 인간 연산’ ‘오구’ 등의 작품을 올렸고 황인뢰 연출가의 ‘하드록 카페’ ‘불 좀 꺼 주세요’ ‘나와 함께 마지막 춤을’ 등의 작품에서 조연출로 활동했다.“왜 아버지 밑에서 연출 수업을 받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하지만 언젠간 꼭 아버지에게서 배울 기회가 있을 것 같아 오히려 다른 분들에게 배운 거였지요.”(권은아)그리고 2002년, 뮤지컬 ‘헤이걸’로 연출에 데뷔했다. 그 뒤 연극과 뮤지컬을 아우르며 다양한 장르의 작품 활동으로 대학로의 주목받는 연출가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극단 성좌의 작품을 연출하는 아버지 밑에서 조연출을 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 무렵부터다.“처음 아버지의 연출을 도와드릴 때는 꽤 떨렸던 기억이 나요. 잘하고 싶어서 애도 많이 썼고요.”(권은아)연극계의 산증인, 리얼리즘의 거장으로 불리는 아버지 권오일 연출가의 연출을 배우고 싶어 선택한 일이었다. 극단 성좌의 창단작인 ‘두보의 고향을 아십니까(1970)’를 시작으로 그간 100편이 넘는 작품을 연출했고, 희수(喜壽)를 앞둔 고령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역으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는 아버지 권오일 연출가는 은아 씨가 가장 닮고 싶고 배우고 싶은 연극인이었기 때문이다.그래서 은아 씨와의 공동 작업은 권오일 연출가에게도 새로운 활력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더 좋은 작품, 더 좋은 연출에 대한 욕심이 생겼기 때문이다.“그 외에도 함께해서 좋은 점이 많죠. 일단 젊은 배우들과 더 잘 소통할 수 있어 좋고,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면이 있기 때문에 일하기에도 편하고요.”(권오일) 재능 있는 후배이자 동시에 누구보다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하는 은아 씨이기에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통하는 만큼 일을 하기가 훨씬 수월했다는 얘기다.“실제로 무대를 준비하면서 소도구나 의상이 어, 저게 아닌데 싶어서 보고 있으면 어느새 은아가 그 부분을 조율하고 있더군요. 그럴 때 아, 이렇게 통하는구나 싶어요. 배우들의 연기에 대한 개인 지도도 마찬가지고요.”(권오일) 그 점은 은아 씨 역시 마찬가지다. 배우고 싶고 닮고 싶은 아버지와의 공동 작업은 매 순간 순간이 소중한 배움의 기회가 됐다. 자신의 부족한 점을 깨닫고 보완할 수 있는 기회였던 것이다. 그래서 은아 씨는 내년에 있을 공연에 기대가 크다. 내년은 극단 성좌의 창단 40주년이 되는 해이자 아버지 권오일 연출가가 희수(77세)를 맞이하는 해이기 때문이다.“벌써부터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 등의 기념 공연을 준비하고 있는데 제대로 잘 해내고 싶어요. 아버지의 연극 인생에 큰 의미가 있는 해인만큼 최고의 작품을 선보이고 싶습니다.”(권은아)“이제 저는 지는 해죠. 그에 비해 은아는 이제 본격적으로 꽃 피울 수 있는 시기가 됐어요. 연극에 인생을 건 만큼 후회 없이 열정적으로 자신의 재능을 발산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합니다.”(권오일)서로를 많이 닮은 아버지와 딸, 연극계의 존경받는 원로와 촉망받는 기대주, 그리고 연극에 대한 열정을 함께 불사르는 든든한 동료. 권오일 권은아 부녀 연출가가 펼쳐낼 다음 작품을 기대해 본다.권오일 1932년생 서울대 교육심리학과 졸업. 고려대 교육대학원 상담심리학과 졸업. 서울대 재건연극회 초대 회장, 83년 ‘적과 백’ 이재현 작 ‘대한민국연극제 대상 및 희곡상 수상’. 89년 한국연극협회 이사장 역임. 극단 성좌 대표(현).권은아 1965년생. 서울예대 연극과 졸. 연극 ‘퇴계선생 상소문’, ‘달의 뒤쪽’, ‘소나무 아래 잠들다’. 뮤지컬 ‘헤이 걸’ ‘12살에 부자가 된 키라’ ‘메노포즈’. 액션 극 ‘배틀로드 802.15.4’ 등 연출.김성주·자유기고가 helieta@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