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냐 ‘경기’냐…금리 놓고 냉가슴

‘진퇴양난’ FRB

‘금리 인상론’이 제기되고 있다. 고유가가 주범이다. 유가가 고공행진을 하다 보니 인플레이션 압력도 높아진다. 이를 제어하려면 금리를 올리는 수밖에 없다. 유럽중앙은행(ECB)은 발 빠르게 금리 인상 방침을 천명했다. 미국과 일본에도 동참을 요구,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국제적 공조 체제를 구축하자는 압박도 넣고 있다.그런데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입장이 난감하다. 기준금리를 선뜻 올릴 수도, 그렇다고 내릴 수도 없는 상황이다. 사면초가다. 딜레마이기도 하다.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선 금리를 올려야만 한다. 그렇지만 아슬아슬한 경기가 침체 상태로 곤두박질칠게 우려된다. 경기만 생각하면 금리를 더 내려야 마땅하다. 그러나 고유가에 따른 인플레이션 압력을 생각하면 영 아니다.FRB는 ‘인플레이션 압력 해소’에 무게를 두고 있다. 일단은 금리 인상에 힘을 싣는 분위기다. 이를 통해 달러화 약세 현상을 막은 뒤 유가 오름세를 막아 보자는 심산이다. 그런데 자세히 뜯어보면 고민 그 자체다. 내심으로는 금리 동결 상태를 유지하려는 생각이 엿보인다. 정확히는 좀 더 관망하겠다는 속내다.문제는 이런 상황이 장기화되는 경우다. 만일 ECB가 금리를 올리고 FRB가 금리를 동결할 경우 금리 차는 벌어진다. 달러화는 더 떨어지고 그렇게 되면 달러화 베이스로 거래되는 국제 유가는 더 오를 공산이 크다. 결국 인플레이션 압력은 심화되고 경기도 악영향을 받게 된다.이렇게 보면 결국 당분간 뉴욕 증시와 글로벌 증시는 FRB의 태도를 주시할 수밖에 없게 됐다. FRB가 통화 정책 기조를 어느 한쪽으로 잡아가는지 여부와 과연 ECB 등과 공조 체제를 이뤄낼 수 있을지 여부가 글로벌 증시 흐름에 결정적인 변수가 될 전망이다.국제 유가가 배럴당 140달러에 육박하자 FRB 등 미국의 정책 당국자들이 바빠졌다. 미국은 그동안 입으로 ‘강한 달러’를 외치면서도 달러화 약세를 즐겨왔던 게 사실이다. 달러화 약세로 수출이 늘어나면서 경기 침체를 막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국제 유가가 뜀박질을 시작하자 마냥 팔짱을 끼고 있을 수만은 없게 됐다. 유가 상승으로 휘발유 값이 오르고 소비가 바짝 오그라들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힘 있는 당국자 모두가 한목소리를 내고 나섰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6월 9일 “강한 달러는 미국의 이익이고 미국의 이익은 곧 세계의 이익”이라며 “미국 경제는 과거에 겪지 못했던 도전을 맞이하고 있지만 성장을 지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비록 원론적 측면인 감이 없지 않지만 강한 달러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고 있다.외환시장의 총책임자인 헨리 폴슨 장관은 한발 더 나아갔다. 폴슨 장관은 “달러화 약세 현상을 경계하고 있으며 이를 막기 위해 모든 정책 대안을 고려하고 있다”면서 “외환시장 개입이나 그 이상의 정책도 배제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사실 ‘강한 달러’는 폴슨 장관의 소신이다. 그는 입만 열면 ‘강한 달러’를 외쳤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입으로만’이었다. 행동으로 나선 경우는 없었다. 부시 행정부 자체도 지난 2001년 집권 이후 한 번도 외환시장에 개입한 적이 없다. 미 정부가 달러화 약세를 막기 위해 외환시장에 개입한 것은 지난 1995년이 마지막이었다. 지난 2000년 9월 빌 클린턴 행정부 당시 외환시장에 개입했으나 달러화를 팔아 유로화 가치를 지지하기 위한 것이었다.이런 경험을 감안하면 폴슨 장관이 ‘외환시장 직접 개입’을 외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이다. 그만큼 상황이 절박하다는 얘기도 되고 이번엔 ‘구두 개입’이 아니라 실제 개입할 것이란 의미도 갖고 있다.달러화 약세를 막기 위한 구두 노력의 방점은 벤 버냉키 FRB 의장이 찍었다. 버냉키 의장은 지난 9일 보스턴에 열린 경제 콘퍼런스에 참석해 “미국 경제가 심각한 경기 침체로 진입할 것으로 우려됐던 징후들은 거의 사라졌다”며 “앞으로 장기 인플레이션 전망에 대해 강력이 대처할 것”이라고 말했다.버냉키 의장의 이같은 발언은 금리 동결이란 그동안의 통화 정책 기조가 금리 인상으로 변경될 것임을 시사하는 것으로 풀이됐다. 결국 ‘금리 인상→ 달러화 약세 방지→ 유가 상승 방지→ 인플레이션 억제’라는 구도로 FRB가 방향을 잡았다는 얘기도 된다.특히 버냉키 의장의 발언은 장 클로드 트리셰 ECB 총재가 조만간 금리를 인상할 것이라고 발언한 직후 나온 것이어서 인플레이션 압력 해소를 위한 국제 중앙은행 간 공조 체제가 구축된 게 아니냐는 추측을 낳았다. 시카고 선물시장에서는 당장 9월 금리 인상 가능성을 54%반 영해 선물 가격이 형성됐다.버냉키 의장의 발언 이후 시장은 금리 인상론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FRB가 딜레마에 빠진 것 아니냐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버냉키 의장의 발언이 있은 이틀 뒤인 6월 11일 도널드 콘 FRB 부의장은 보스턴에서 열린 콘퍼런스에 참석해 “미국 경제가 스스로 균형을 찾을 수 있도록 실업률과 인플레이션의 일시적인 상승을 용인해야 한다”며 “사태를 관망하는 것이 최선책일 수 있다”고 말했다.그는 “인플레이션이 바람직한 수준을 웃돌고 있으며 실업률도 용인 범위를 상회하는 상황”이라며 “이런 상황에서는 조정 기간을 허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덧붙였다. 아울러 “역사적으로 볼 때 유가 상승이 인플레이션에 미친 영향은 그리 크지 않았다”고도 언급했다.버냉키 의장과는 방향이 약간 다르다. 이를 해석하면 이렇다.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선 금리를 올려야 마땅하다. 그러나 경기가 문제다. 지난 5월 실업률은 5.5%로 높아졌다. 한동안 잠잠하던 경기 침체에 대한 공포가 다시 살아나는 분위기다. 이런 상황에서 섣불리 금리를 올렸다가는 경기가 실제 침체(recession)에 빠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게다가 같은 날 발표된 FRB의 경기 종합 보고서인 베이지북은 콘 부의장이 왜 이런 발언을 했는지 짐작하게 한다. FRB는 베이지북에서 “식료품과 에너지 가격 인상으로 소비자들의 실질소득이 줄고 있으며 이로 인해 경기가 전반적으로 부진하다”고 평가했다. 미국 경제의 70%를 차지하는 소비가 줄고 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인정한 셈이다.한마디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그래서 “좀 더 두고 보자”는 콘 부의장의 발언이 나왔다는 시각이다. FRB가 딜레마에 빠진 상황이다.만일 지금 상태가 지속되면 성장은 정체되고 물가만 오르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이 나타날 수 있다. 스태그플레이션이 무서운 것은 뾰족한 대책이 없다는 점이다. 금리를 올릴 수도, 내릴 수도 없는 상황이다. 스태그플레이션에 빠졌던 지난 1970년대 세계 경제가 여기에서 빠져나오는데 15년이 걸렸을 정도니 그 무서움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물론 지금 상황은 1970년대와 같지 않다. 유가가 오른다고는 하지만 당시와는 다르다. 국제적 공조 체제도 나름대로 구축돼 있다. 그렇지만 문제는 경기 진단에 대한 ECB와 FRB의 시각이 약간 다르다는 점이다. ECB는 즉각적인 금리 인상을 주장한다. 그렇지만 FRB는 아직은 소극적이다. 일본중앙은행도 경기에 대한 우려를 들어 금리 인상에 주저하기는 마찬가지다. 만일 이 같은 시각 차이가 봉합되지 않을 경우 문제는 사뭇 심각해진다. ECB가 금리를 올리고 FRB는 금리를 동결할 경우 금리 차는 더 벌어진다. 달러화는 더 약세로 돌아서고 달러화를 기반으로 거래되는 유가는 더 오를 수밖에 없다. 인플레이션 압력은 더 심해지고 ECB로선 금리를 더 올려야 한다는 압박에 처할 수 있다.하영춘·한국경제 뉴욕 특파원 ha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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