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보다는 ‘질’… 돈 되는 특허에 ‘올인’

기업들의 사활 건 대결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특허 강국이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국제 특허 출원 증가율이 중국에 이어 세계 2위를 차지한 데서 단적으로 알 수 있다.특허청과 세계지식재산권기구(WIPO) 등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의 국제특허협력조약(PCT)에 따른 특허 출원 건수는 전년 대비 18.8% 증가해 중국(38.1%)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성장세를 나타냈다.지난해 PCT 기준 전 세계 특허 출원 건수를 잠정 집계한 결과 우리나라는 7061건으로 미국(5만2280건) 일본(2만7731건) 독일(1만8134건)에 이어 4위를 차지했다. 이어 프랑스가 6070건으로 5위를 차지했고 영국(5553건) 중국(5456건) 네덜란드(4186건) 스위스(3674건) 스웨덴(3533건) 이탈리아(2927건) 순으로 집계됐다. 특허청 관계자는 “PCT 특허 출원 분야에서 전통적으로 강세를 보이던 서유럽 선진국들이 최근 수년간 정체를 보이고 있는 동안 우리나라는 중국과 함께 최근 4년간 세계에서 가장 두드러진 성장세를 보였다”고 말했다.하지만 국내로 눈을 돌려보면 얘기가 조금 달라진다. 삼성전자 LG전자 등 국내 대기업의 국내 특허 출원 건수가 지난 2년 동안 절반 수준으로 감소한 것. 이는 기업들이 특허 전략을 ‘양’에서 ‘질’로 전환하고 있는 데 따른 것이다. 국내 기업 중 가장 많은 특허를 보유하고 있는 삼성전자는 2005년 1만7813건을 정점으로 줄어들기 시작해 지난해 1만1471건까지 감소했다. 특허 출원 건수 2위에 올라 있는 LG전자는 같은 기간 1만3330건에서 5932건으로 출원 건수가 60%가량이나 줄었다.이에 대해 LG전자 관계자는 “연구·개발(R&D) 단계에서부터 선택과 집중 전략을 채택하고 있다”며 “예전엔 3~4개로 쪼개서 내던 특허들을 ‘묶음 특허’로 출원하는 추세”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특허 출원 건수는 줄었지만 특허로 얻는 수입은 2006년 6000만 달러, 2007년 1억 달러 등으로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고 덧붙였다.삼성전자 관계자도 “특허 관련 인력이 최근 5년 새 2배가량 늘어 현재 400명에 이른다”며 “국내 특허 출원 건수가 줄어든 것은 ‘돈이 되고 미래 가치가 있는’ 특허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최근에는 특허 출원에 따른 보상금 액수가 특허로 얼마나 돈을 벌어들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며 “R&D 인력들도 이 같은 원칙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특허 출원 건수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말했다.특허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특허 관련 기업 간 분쟁도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대다수의 특허 분쟁은 경쟁사들이 특허를 맞교환하는 일명 ‘크로스 라이선스’ 협상 도중 일어난다. 협상이 틀어져 법정으로 향하는 경우는 자사의 특허 가치가 더 높다고 생각하는데 상대가 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시장에서 치열한 경쟁이 벌어질 때도 특허가 무기가 된다. LG전자가 드럼세탁기 점유율이 떨어지자 대우일렉트로닉스를 상대로 세탁기 판매 정지 처분 소송을 낸 것이 좋은 예다.특허 전쟁에는 적지 않은 ‘실탄’도 들어간다. 삼성전자는 연평균 40~50건의 특허 소송을 벌인다. 각 소송마다 최종 판결이 날 때까지 2~3년이 걸리고 평균 4억~5억 달러의 소송 및 배상비가 드는 실정이다.기술 중심적인 중소기업은 특허 침해 시 바로 도산 위기를 맞을 수도 있기 때문에 자사 기술 보호에 안간힘을 쏟고 있다.이런 가운데 국내 한 중소기업이 굴지의 미국 반도체 장비 업체와의 특허 소송에서 승소해 눈길을 끌고 있다.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검사 전문 업체 파이컴(www.phicom.com)은 지난 4월 법원 판결에 따라 미국 폼팩터사가 제기한 특허 침해 금지 본안 소송에서 승소했다. 서울남부지방법원 민사11부(박형명 부장판사)는 판결을 통해 “파이컴의 제조 방법은 폼팩터 특허와 상이해 동 특허를 침해하지 않는다”며 파이컴이 폼팩터의 프로브 제조 방법 특허 2건을 침해했다는 폼팩터의 주장을 기각했다.파이컴과 폼팩터의 특허 분쟁은 파이컴이 400억 원 이상을 투자해 독자적으로 개발한 멤스카드로 2003년 프로브카드 시장에 진출하자 2004년 2월 미국 폼팩터사가 특허 침해 소송을 제기하면서 시작됐다.특허 침해 소송에 대해 파이컴은 특허 무효 소송으로 맞섰고 폼팩터의 특허 4건 중 2건은 작년 9월 대법원에서 최종 무효 판결을 받아 그 효력을 잃었고 남은 2건 중 1건도 특허법원에서 지난해 무효 판결을 내려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파이컴 측에 따르면 이번 소송은 남은 2건의 소송에 대해 무효 소송과 별도로 침해 여부를 가리는 특허 침해 금지 본안 소송으로 ‘파이컴 제조 방법의 폼팩터 특허에 대한 비침해 여부’가 이 사건의 쟁점이었다. 서울남부지방법원이 파이컴의 주장을 받아들여 폼팩터의 청구를 기각함으로써 파이컴은 자사의 프로브카드 제조 기술(대한민국 10대 신기술 지정)의 독자성을 인정받게 됐다. 아울러 이미 대법원에서 무효된 특허에 대한 침해 소송을 포함한 나머지 소송에서도 파이컴의 승리가 유력해졌다는 게 회사 측의 설명이다.파이컴 변호인단을 이끌고 있는 법무법인 광장의 권영모 변호사는 “이번 사건은 막대한 자금력을 배경으로 무조건 특허 침해 소송을 제기해 경쟁사의 수주, 판매 활동을 방해하는 등 거대 외국 회사들의 일련의 움직임을 막아낸 쾌거로 볼 수 있다”며 “특허권자의 정당한 권리 행사는 보호받아야 하지만 부실한 특허로 부당하게 독점적 권리를 누리는 일은 제지돼야 한다는 원칙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고 밝혔다.이와 유사한 사례는 또 있다. 지난 2월 이긍해 항공대 교수가 한국마이크로소프트(MS)를 상대로 낸 특허권 침해 금지 및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일부 승소 판결을 얻어낸 특허법인 신성의 박해천 대표변리사의 경우가 그런 케이스.‘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쳤다는 평가를 받은 이번 특허 소송의 발단은 199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컴퓨터에서 한글·영어를 자동 변환하는 기술을 발명한 이 교수는 박해천 변리사를 찾아가 특허 출원을 상의했다. 당시 이 교수는 몇 가지 기술을 보완한 뒤 특허를 출원한 다음 MS에 특허 기술을 살 것을 제안했지만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하지만 2년 뒤 MS는 버젓이 이 교수의 특허 기술을 ‘MS워드 97’ ‘MS오피스 97’에 탑재했다. 이 교수는 재차 라이선스 협의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골리앗’ MS는 대학교수를 안하무인식으로 무시한 셈이다.박해천 대표는 2000년부터 박정후 변리사와 팀을 이뤄 MS와 특허 전쟁에 돌입했다. 이 교수가 MS를 상대로 특허 무효심판 청구 소송과 특허 침해 금지 본안 소송을 낸 데 따른 것. 하지만 2001년 1심에서 이 교수는 패소했다. 그렇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2003년부터 다시 재판을 준비했고 마침내 5년 만에 이번 중간 판결이 났다. 박 대표는 “지난 20년 변리사 경력 중 가장 뜻 깊은 사건”이라며 “다국적기업의 입 안에까지 들어갔던 특허권을 되찾아 왔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업계는 손해배상액만 최소 600억 원 이상이 될 것으로 보이는 이번 소송이 대법원까지는 가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번 판결에 앞서 대법원이 이 교수의 특허권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린 데다 MS가 당사자 간 합의에 나설 가능성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박 대표는 “개인 발명가들과 중소기업인들은 특허 등록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생각한다”며 “하지만 특허의 범위를 명시한 특허명세서를 제대로 작성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김재창 기자 changs@kbizwee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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