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펀드 ‘시들고’ 거대기업 ‘뜨고’

신용 경색 완화로 바짝 얼어붙었던 기업 인수·합병(M&A) 시장에 해빙 무드가 나타나고 있는 가운데 M&A 시장의 주도권이 사모 펀드에서 대기업으로 옮겨가고 있다.지난해 여름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대출) 부실 사태가 본격화된 이후 글로벌 M&A 시장은 크게 위축됐다. 지난 1분기 세계 M&A 시장 규모는 6520억 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40% 줄어들며 2004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대형 M&A 발표가 잇따르면서 글로벌 M&A에 ‘재시동’이 걸리는 모습이다.지난 5월 13일엔 세계 최대 PC 제조사 휴렛팩커드(HP)가 세계 2위 컴퓨터 서비스 업체인 일렉트로닉데이터시스템(EDS)을 139억 달러에 사들였다. 또 15일엔 방송사 CBS가 인터넷 매체 C넷을 18억 달러에 인수하기로 했다. 통신 업체인 케이블비전시스템즈는 미국 내 10위권 지역 신문 뉴스데이를 6억5000만 달러에 인수했다. 앞서 4월에도 ‘M&M 초콜릿’으로 유명한 미국의 제과 업체 마스가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과 손잡고 230억 달러에 추잉껌 업체인 리글리를 인수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475억 달러에 달하는 마이크로소프트(MS)의 야후 인수 추진 계획은 일단 ‘무산’됐지만 억만장자 투자자 칼 아이칸이 야후의 주식을 매입하면서 MS의 인수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압박하고 있는데다 MS가 검색사업부 매입 등 새로운 제안을 내놓고 있어 아직 ‘끝나지 않은 스토리’가 되고 있다.항공 에너지 철강 업계에도 M&A 바람이 거세다. 델타항공과 노스웨스트항공이 합병해 세계 최대의 항공사가 된데 이어 유나이티드항공은 US에어웨이즈와 M&A 협상을 벌이고 있다. 영국의 3위 천연가스 회사인 BG그룹은 5월 초 호주 2위 전력·가스 업체 오리진에너지를 인수하겠다고 나섰고 인도 4위 철강회사 에사르스틸도 경영난에 시달리고 있는 미국 10위 철강 업체 에스마크와 인수 협상에 나섰다.금융 정보 업체 딜로직에 따르면 2, 3월에 바닥을 쳤던 M&A는 4월 들어 신용 경색 우려가 다소 완화되면서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4월에 발표된 M&A는 2, 3월 두 달을 합한 규모를 넘어섰다. 물론 사모 펀드들이 매주 수십억 달러 규모의 M&A를 발표하던 작년 여름에 비할 바는 못 된다. 그러나 월가의 M&A 담당자들이 다시 바빠지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라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전언이다.다시 고개를 들고 있는 M&A 시장에서 눈에 띄는 특징은 기업 인수에 나서는 주체들이 사모 펀드가 아니라 대기업들이란 점이다. M&A 시장이 ‘붐’을 이뤘을 때는 사모 펀드들의 발 빠른 움직임에 밀려 뒷전에 서 있던 대기업들이 서서히 전면에 나서고 있다. 금융 회사로부터의 자금 조달이 여의치 않아 공격적인 ‘기업 사냥’에 나서지 못하고 있는 사모 펀드들과 대조적이다. 사모 펀드들은 그동안 금융 회사로부터 거액의 돈을 빌려 기업을 인수하는 차입 매수(LBO: Leveraged Buyout) 방식을 써 왔다. 그러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큰 손실을 본 금융 회사들은 투자 위험성에 민감해져 재무 상태가 좋은 기업들이 M&A에 나설 때만 자금 지원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석유·천연가스 회사들은 원유와 가스전을 탐사하고 채굴하는데 드는 비용이 치솟으면서 덩치를 키워야 할 필요성 때문에 M&A에 나서고 있다. M&A 전문 변호사인 스코트 윌리스 씨는 “석유 회사들이 배럴당 120달러가 넘는 돈을 벌기는 하지만 생산비용 역시 급증하고 있어 M&A의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파이낸셜타임스는 기업들이 M&A 시장에서 주요 매수 주체로 등장한 배경에 대해 ‘딜(deal)’이 진행되는 속도가 기업들이 쫓아갈 수 있을 정도로 완화된 점을 지적했다. 기업들은 의사결정 과정이 사모 펀드에 비해 느리기 때문에 M&A 시장이 ‘붐’일 때는 좀처럼 기회를 잡기가 어려웠는데 이제는 인수 대상 기업을 꼼꼼히 살펴볼 여유가 생겼다는 것이다.박성완·한국경제 기자 ps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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